녹색혁명(綠色革命, green revolution)
(노먼 볼로그(Norman Ernest Borlaug), Sonora 64, 헨리 비첼(Henry Beachell), IR 8, 허문회, 통일벼)
김진국
1940~1970년대에 미국이 개발도상국에 농작물의 신 품종을 개발하여 농업 생산량을 높이도록 인적,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을 지원함으로써 이들 국가의 식량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품종 개량에 이어 관계시설을 하고, 비료, 농약, 제초제, 농기계 등을 사용함으로써 농산물 생산량이 증대되어 세계 굶주림의 비율이 1960년대의 40%에서 1970년대의 17%로 감소하였다.
농업 분야에서 이러한 획기적 식량 증산을 가져온 변화를 미국 국제 개발청(USAID) 총재 가우드(William S. Gaud, 1907~1977)가 1968년에 녹색혁명이라고 불렀다.
1. 녹색혁명(綠色革命, green revolution) 시작
1944년 미국의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s)은 가난한 멕시코에 개척적인 기술 원조 프로그램을 시도하였다. 기술 원조 프로그램은 멕시코를 기아로부터 해방시키는 프로젝트였다.
노먼 볼로그(Norman Ernest Borlaug, 1914 ~ 2009, 아이오와) 박사는 지도교수인 미네소타대학 스타크만(Elvin Charles Stakman, 1885 ~ 1979, 미국, 식물병리학자) 박사의 권고로 록펠러 재단의 기술 원조 프로그램인 멕시코 기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노먼 볼로그는 아이오와 주 크레스코의 농가에서 테어 났으며 고등학교 시절에 미식축구, 농구, 레슬링 등 만능선수였다. 레슬링에서는 주 대표급 선수였다. 그때는 대공황 시절이라 돈을 벌기가 어려웠고 더욱이 노먼 볼로그의 집안이 가난하여 노먼 볼로그는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노만 볼로그의 할아버지는 '네가 나중에 가난을 면하려면 지금 공부하는 것이 현명하다'며 경제가 어려워도 노먼 볼로그가 대학에 진학하기를 권했다.
노먼 볼로그는 1933년 미네소타대학에 입학했다. 부족한 학비는 국가 청년부 대공황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아 해결했다. 대학입시에 떨어져 2년제 대학에 입학하여 4년제 농과대학 임학과를 1937년에 졸업했다.
1937 ~ 1938년 미농무부 산림청에 근무했다.
미네소타대학 식물병리학 스타크만(Elvin Charles Stakman) 교수의 지도로 1939년에 석사, 1942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2∼1944년 뒤퐁사(社)에서 항균제, 살균제에 대한 연구 책임자로 근무했다.
그 후 1944년 록펠러 재단의 멕시코 기아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멕시코에서 록펠러 재단의 농업과학 부지도자 겸 멕시코의 국제 옥수수, 밀 육종(育種) 센터의 밀 육종 계획 지도자로 1960년까지 근무하게 되었다.
멕시코에서의 근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역 관료의 비협조, 숙련된 인력의 부족, 오지의 불편함 등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강인한 의지와 체력으로 극복하였다.
멕시코에서 재배되는 밀 품종들은 키가 커서 바람에 잘 쓰러지고 이삭이 여물면 목이 쉽게 부러졌으며 특히 병충해에 약했다.
그래서 밀(Triticum aestivum, T.vulgare, T. durum, T. compactum, 염색체 수 2n=6X=42, 6X=6 배체)의 여러 품종을 6천 번 교배시켜 멕시코 토양에 번성하는 녹병과 해충에 저항성이 강하고 생산량이 높으며 바람에 잘 견디는 왜소한 신 품종의 밀을 개발 하였다.
왜성 품종(矮性品種)인 일본 밀(Norin 10, short-stemmed wheat, 한국종 기원-난쟁이 밀)과 재래종의 밀을 교배 시켜 왜소하고 다수확이며 병균에 강한 종(Sonora 64, 소노라 64, high yielding variety, HYV, 고수확품종)을 육종한 것이다.
멕시코에서 10년의 노력으로 신품종의 밀을 개발한 과정에서 얻은 성과를 보면 첫째, 위도와 고도가 다른 두 지역에 시험농장을 각각 설치하여 1년에 두 번 경작(왕복 육종, shuttle breeding) 함으로써 실험기간을 반으로 줄이는 동시에 다른 토양과 기후조건에서 경작함으로써 적응력이 우수한 새 품종을 빨리 찾게 되었다.
둘째, 단일 순종으로 육종 하지 않고 여러 품종을 교배하여 질병에 저항하는 다양한 유전형질을 한 품종에 다양한 계통을 넣어 계발함으로써 기후 변동이나 병원균과 해충이 순종에 적응해서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하였다.
셋째, 키가 큰 밀들 일본의 왜성 품종(矮性品種)의 밀(한국종 기원)과 교배하여 반 왜성(半矮性, semi-dwarf) 품종을 개발함으로써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목이 튼튼하여 낱알이 많은 이삭을 달 수 있는 품종을 개발했다. 넷째, 개발한 품종에 다시 병충해에 강한 품종과 교배하여 새로운 품종을 만들었으며 또 아열대, 열대종과 교배하여 다양한 지역에서 재배할 수 있는 여러 품종을 개발하였다.
이렇게 신품종을 개발한 결과 멕시코의 1963년 밀 생산량은 1944년의 6배로 증가하였다.
노먼 볼로그는 1960 ~ 1963년에 아메리카 식량 작물 프로그램(Inter-American Food Crop Program)의 책임자로 근무했으며, 1964 ~ 1979년 멕시코의 국제 옥수수·밀 육종 센터(IMWIC)의 소장을 지냈다. 멕시코의 국제 옥수수 및 밀 육종 센터(IMWIC)에서 왜성 품종으로 병충해에 강하고 글루텐 성분이 많은 밀 품종이 개발되었다.
1961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노먼 볼로그를 초청하여 밀 품종 개량을 시도하였지만 많은 어려움으로 본격적인 시작은 1965년부터 이루어졌다. 그 결과 파키스탄은 1968년에 밀 자급자족을, 인도는 1974년에 자급자족을 이루었다. 이어서 품종개량 사업은 멕시코의 국제 옥수수 및 밀 육종 센터(IMWIC)에서 훈련받은 연구자들에 의해 서남아시아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멕시코에서 계발에 성공한 농작물의 획기적인 생산 방법은 세계로 확산되어 식량증산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 결과 노먼 볼로그는 ‘녹색혁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노먼 볼로그(Norman Borlaug, 1914~2009, 아이오와)는 이 공로로 1970년에 노벨평화상을, 미국 자유훈장, 미 의회가 수여하는 gold medal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는 식량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도덕적 권리라고 하였다. ‘한 조각의 빵이 많은 새의 노랫소리보다 낫다’라는 서양 속담도 있다. 식량은 정말로 중요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요소이기 때문이다.
멕시코에서의 식량증산의 성공이 여러 개발 도상국가로 확대된 것은 미소 냉전시대에 가난한 국가의 공산화를 막기 위하여 미국이 전략적으로 인적, 경제적, 기술적 지원을 한 혜택이라 할 수 있다.
2. 기적의 벼(IR8) 육종
1949년 유엔 식량 농업 기구(FAO)는 인도의 Cuttack에서 벼(Oryza sativa L., 염색체 수 2n=24) 육종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벼 육 종가 들은 멕시코에서 노먼 볼로그가 거둔 난쟁이 밀 프로그램의 놀라운 성과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인도의 Cuttack에서도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준왜성(semi-dwarf) 품종의 쌀 품종 개발을 시도했다.
지역 과학자들은 기후가 온순한 지역의 키가 작은 japonica 벼 품종과 열대 지역의 키가 더 큰 indica 벼 품종을 교배시켰다. 그들은 ADT-27과 Mahsuri라고 명명된 두 가지 변종을 육종 했는데 인도 환경에 잘 적응했다. 특히 ADT-27은 벼 녹색 혁명의 첫 번째 성과물이 되었다.
미국 육종학자들은 벼 품종 개량 연구를 계속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더 많은 쌀 품종을 육종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60년 미국 정부, 포드 재단(Ford Foundations), 록펠러 재단 (Rockefeller Foundations) 등은 벼 육종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벼 종자개량을 지원하게 되었다.
기근이 극심하여 공산화의 위험이 있는 아시아 지역을 가아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이 지역에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다는 미국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그래서 1960년에 세계은행, 포드 재단(Ford Foundations), 록펠러 재단 (Rockefeller Foundations)은 기금을 지원하여 국제 미작 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 IRRI)를 최적지인 필리핀에 설립하고 로버트 챈들러 박사(Robert F. Chandler, 1907 ~ 1991, 미국, 원예학자)를 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하였다.
국제미작연구소(IRRI)의 벼 품종 개발 팀은 기존의 벼 품종은 키가 크고 줄기가 가늘어 크고 무거운 벼 이삭을 견디지 못해 목이 부러지거나 넘어지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키가 작으면서 기후에 알맞고 병충해에 강하며 수확량이 많은 벼 품종 개발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전 세계에서 1만 종 이상의 벼 씨앗을 수집했다. 이들 중에는 키가 큰 품종과 교배가 가능한 왜성 품종(矮性品種)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멕시코 프로그램의 왕복 육종(shuttle breeding)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겨울에 한 지역에서 쌀을 재배하고 이때 생산된 종자를 여름에 다른 지역에서 쌀을 재배하여 1년에 두 번씩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어 새로운 품종 개발에 소요되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다(열대 지방인 필리핀은 2 기작이 가능함).
1962년 피터 제닝스(Peter Randolph Jennings, 1931 ~ , 미국, 벼 육종학자) 박사는 IRRI에서 38가지의 다양한 종류 교배를 했다. 38종 상호 간의 교배 중에서 여덟 번째는 DGWG (Dee-geo-woo-gen)라는 중국 왜성 품종(矮性品種)과 인도네시아의 Peta 품종을 교배한 것이었다. 이 여덟 번째 교배는 생산성은 낮아 130개의 씨앗만 생산되었다. 이 130개의 종자를 시작으로 해서 그 유명한 IR 8이라는 새로운 명품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130종의 씨앗을 화분에 심어 식물의 잡종 제1세대 (F1)를 생산했다. 모두 키가 컸다.
키가 큰 F1 종자로 자가 교배하여 잡종 제2세대 (F2)를 약 10,000개 생산했다. 그 식물의 1/4이 왜소했다. 이 결과는 키가 큰 것이 우성이고 키가 작은 것이 열성이며 단일 인자 유전(단 인자 유전)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왜성(矮性, dwarf)이 단일 인자 유전의 열성이라는 것이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 1931 ~ , 미국) 박사에 의해 1963년에 발견된 것이다.
왜성(dwarf)이 DGWG 품종의 단일 유전자에 의해 유전된다는 것은 여러 유용한 왜성 품종(矮性品種)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 1931 ~ , 미국, 벼 육종학자) 박사는 흥분하여 텍사스의 헨리 비첼(Henry Beachell, 1906 ~ 2006, 미국, 벼 육종학자) 박사에게 소식을 전했다.
헨리 비첼(Henry Beachell, 1906 ~ 2006, 미국, 벼 육종학자)은 1906년에 Nebraska 주의 Waverly에서 태어나 Nebraska 대학을 졸업했다. 쌀 육종의 전문가로 미국 농무성과 텍사스 A&M 대학(TAMU) 교수로 재직하면서 전 세계의 벼 전문가들과 교류하고 함께 연구하여 식물 육종 연구원을 교육했다.
1963년에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 1931 ~ , 미국, 벼 육종학자) 박사는 다른 연구를 위해 IRRI를 떠났고 헨리 비첼(Henry Beachell, 1906 ~ 2006, 미국, 벼 육종학자)이 IRRI에 합류하였다. 헨리 비첼(Henry Beachell, 1906 ~ 2006, 미국, 벼 육종학자) 박사는 IRRI의 수석 쌀 육종 연구원이 되었다.
헨리 비첼(Henry Beachell, 1906 ~ 2006, 미국, 벼 육종학자) 박사는 F2 세대의 키가 큰 식물 개체를 모두 버리고 키가 작은 개체를 심어서 상호 교잡하여 F3 세대를 얻었다.
F3 세대에서 Henry Beachell(1906 ~ 2006, 미국, 벼 육종학자)은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가장 좋은 298종의 씨앗을 선택하여 각 계통별로 심어 재배하고 상호 교잡하여 잡종 제4세대 (F4)를 생산하였다.
그 F4 세대에서 Beachell은 다시 최고의 개별 종자를 선택, 재배하고 상호 교잡하여 F5세대를 생산했다. F5세대 재배 생산 구역 중에서 288행의 제3구역의 식물이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이 F5 품종을 IR 8-288-3이라고 불렀고 일반인들에게는 IR 8로 알려지게 되었다.
IR 8이라는 벼 품종은 다양하게 이어서 계속 개발되는 신품종들의 원천이 되었다.
IR 8 계통은 키는 약 120cm로 작고 줄기는 견고하여 낱알 수가 증가한 거대한 벼 이삭에도 문제가 없었으며 중요한 각 형질의 대립유전자는 순종으로 만들어진 균일한 식물이 되었다.
전통 품종은 재배기간이 160 ~ 170일로 길지만 IR8 계통은 130일로 짧았다.
무엇보다도 IR 8 계통은 생산량에서 혁명적인 증산을 가져왔다. 전통 품종은 1 헥타르 (헥타르는 2.5 에이커)에 쌀이 평균 약 1 톤 생산되는데 비해 1966 년 인도의 젊은 IRRI 농민 학자인 SK De Datta는 IR 8 벼는 비료를 쓰지 않고 헥타르 당 약 5 톤의 쌀을 생산했고 헥타르 당 120kg의 질소비료를 사용하여 거의 10톤의 쌀을 생산했다. 그것은 전통적인 쌀 수확량의 10배였다.
60년대 중반 아시아의 대부분은 가뭄과 잠재적인 기근 상황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IRRI는 IR 8을 다른 지역으로 신속하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Beachell 박사는 IRRI는 모두에게 벼 유전자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허용하는 정책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세계 모든 나라에 씨앗과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Beachell은 IR 8 재배 지역의 벼를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육종 연구를 제안하였다.
IR 8은 완벽하지 않았다. 특정 해충과 질병에 약했으며 벼의 도정 중에 파손율이 높았다. IR8 품종의 쌀은 실제로 굵고 광택이 없으며 색이 뿌옇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좋지 않게 보였다. 또한 높은 아밀로스 함량으로 요리 후에는 경화되었다.
그래서 1967년부터 Beachell과 거뎁 쿠시(Gurdev Singh Khush, 1935 ~, 인도, 벼 품종 60% 생성) 박사는 여섯 개국에서 IR 8을 개량하여 13종 이상의 새 품종을 개발했다.
결국, 그들은 다양한 해충 및 질병에 대해 내성이 강하고 반왜소 종인 IR 36을 개발하여 많은 국가에서 선호되는 날씬한 쌀을 생산했다. 또한 IR 36은 재배기간이 105 일로 IR 8의 130일, 전통 품종의 170일보다 짧다. 즉, 많은 지역이 마침내 1 년에 두 차례 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 전 세계적으로 IR 36이 적어도 1100만 헥타르 재배되었다.
1990년 거뎁 쿠시(Gurdev Singh Khush, 1935 ~, 인도) 박사는 IR 72를 개발하였다. 인도계 벼 육종학자가 많은 것은 세계 최대의 쌀 생산국이 인도인 것에 기인하며 중국이 두 번째이다.
필리핀에 본부를 둔 IRRI는 쌀 품종을 전 세계에 보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중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스리랑카, 대만, 말레이시아, 한국, 버마, 심지어 미국에서도 IRRI 품종과 농업 기술을 사용했다.
이러한 공헌으로 비첼 박사는 1969년에 IRRI 상, 1972년에 캔자스 주립 Medallion 상, 1978년에는 한국의 정부 상, 1987년 Japan Prize을 받았다. 그는 네브래스카 대학과 서울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에는 거뎁 쿠시(Gurdev Singh Khush, 1935 ~, 인도) 박사와 함께 World Food Prize를, 1998년의 존 스캇 메달과 필라델피아의 프리미엄 메달을 수상했다.
3. 허문회 박사와 통일벼
가. 통일벼 개발
1960년대 한국은 6.25 전쟁 후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농업기술은 뒤떨어져 식량부족으로 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특히 쌀이 부족하여 가난한 사람들은 주식인 쌀밥을 먹기 어려웠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는 쌀 생산을 높여 전 국민이 밥을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세계적인 녹색혁명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에서도 이를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인이 먹는 쌀은 온대에서 자라는 자포니카 종이고 녹색혁명을 일으킨 나라들에서 재배하는 열대 종인 인디카 종은 우리나라에서는 기후가 맞지 않아 재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포니카 품종의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만 일부 정도이다. 일본은 자포니카 벼 품종을 상당한 수준으로 개량하였으며 관개시설, 비료, 농업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켜 생산력을 높이고 식생활 개선으로 쌀이 남아돌아 수출하였다.
그래서 자포니카 계통의 쌀을 먹는 나라 중에서 쌀 부족 국가는 우리나라밖에 없었다. 일본의 신품종을 들여와 우리나라에 재배해 보았으나 기후에 잘 맞지 않고 생산량이 IR 8과 같이 획기적으로 높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나라 스스로 벼 종자를 개량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한국의 벼 종자 개량의 첫 시도는 1964년 “희농 1호”이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큰 성공을 거둔 “나다(Nahda)”라는 품종으로 우리나라에서 시험재배를 해 보았으나 기후에 맞지 않아 폐기되었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허문회(1927~2010, 충주) 교수가 IRRI에 벼 육종을 연구하러 간 것은 1964년이었다.
허문회는 1954년 서울대 농과대를 졸업하고 중앙 농업기술원과 농촌진흥청의 전신인 농사원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하였다. 1959년 미국 텍사스 A&M대학교로 연수를 갔으며 그곳에서 쌀 육종 연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헨리 비첼(Henry Beachell) 박사로 부터 벼와 곡물의 육종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다.
1960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교수로 임명되었다.
1962년 필리핀에 설립된 국제미작연구소(IRRI)의 요청으로 정부에서 1964년부터 2년간 그를 파견했다.
그때 헨리 비첼(Henry Beachell) 박사가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RI)에 근무하고 있었다.
허문회 교수가 IRRI에 파견된 목적은 품종 개량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면서 열대형 벼인 인디카(Oryza sativa L. subsp. indica K.) 종 중에서 우리나라에 재배할 수 있는 종을 선별하기 위해서였다. IRRI에 의해 개발된 인디카 종은 열대에 적응한 벼로써 각종 질병과 해충에 강하며, 생산성이 높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곳에서 거의 모든 인디카 종을 살펴보며 연구한 허문회 박사는 인디카 종을 한국에서는 재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열대성으로 생산성과 병충해에 강한 인디카(Oryza sativa L. subsp. indica K.)와 우리나라의 온대성인 자포니카(Oryza sativa L. subsp. japonica K.)를 교잡해 생산성이 높고 병충해에 강하며 우리나라 기후에 맞는 왜소증의 신품종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런데 열대 인디카 종과 한국의 자포니카 종은 벼의 아종이지만 품종 간의 유전자의 이질성이 강해서 교잡이 잘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잡이 되어도 태어난 잡종은 불임이 되어 종자를 맺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일본 학자들도 이 두 품종의 우수한 특징을 가지는 잡종 쌀을 개발하기 위해서 오랜 기간 교잡 연구를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허문회 박사는 유전자 이질성이 커서 교잡이 안 되는 아종 간에 교잡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두 아종의 중간에 속하는 종과 먼저 교잡하여 이질성을 좁혀 만든 종과 최종적으로 멀리 떨어진 종과 교잡시키는 삼원 교잡 법을 개발하여 자포니카와 인디카 간의 교잡이 가능함을 확인했다.
한국에 알맞은 품종을 개발하기 위하여 일본의 벼 가운데 출하시기가 빠른(조생종) 유카라(Yukara)라는 자포니카종(한국 자포니카 종은 출하시기가 빠른 품종이 없었음)을 찾아내어 냉온에 견디는 대만산인 인디카 종 TN1(Taichung Native 1)을 교잡하여 얻은 종자를 생산성이 뛰어난 인디카 교잡종인 IR 8을 교잡시키는 삼원 교잡을 해서 1969년에 ‘IR667’이라는 통일벼 품종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창의적인 육종 방법이었다. 국제미작연구소의 667번째 개발품종이라는 의미로 IR667이라 불렸다.
허문회 박사는 통일벼 보완을 위해 계속 연구했으며 간척지에서 벼를 재배하기 위해 1990년에 개발한 ‘HP3319’는 당시 세계에서 내염성이 가장 강한 종으로 인정받았다.
나. 통일벼 재배
통일벼는 3년의 시험재배를 거쳐 1972년에 농가에 보급되었다.
통일벼는 키가 작으면서도 줄기가 두텁고 이삭이 크며, 잎이 곧게 뻗어 태양빛을 이용하는 효율이 높아 생산성이 좋았다(한 개의 이삭에 일반 벼는 80~90알, 통일벼는 120 ~ 130알).
당시 재배되었던 재래종인 자포니카 품종에 비해 30% 이상 생산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는 3배 이상으로 많은 쌀을 생산하는 농가도 있어서 농가에서는 수익을 많이 올렸다. 지역마다 농사 조건이 달라 통일벼로 농사를 망친 집안도 생겨났으며 정부는 이를 보상하면서 계속 재배면적을 넓혀 나갔다.
1976년 3621만 석의 수확량을 기록하면서 우리나라의 쌀 자급을 성공시켰으며 1977년에는 농지의 76%까지 통일벼를 심어 쌀이 남아 돌게(113%) 되었다.
그런데 통일벼 쌀은 생산량은 어마어마하게 많았지만 쌀알이 길고 찰기가 없는 안남미라 사람들이 싫어했다. 그래서 서글프게도 가난한 사람은 값이 싼 통일벼 쌀로 밥을 지어먹고 살만한 집에서는 값이 비싼 재래종인 일반미로 밥을 지어먹는 사회가 되었다(세계적으로는 인디카 종의 안남미가 90%로 대세이며 자포니카 종이 안남미보다 비싸지도 않다.). 이 불평등한 현상만 보고 통일벼 개발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이기적이고(자기 집이 가난했으면 그런 말 못 하지) 얼치기인 진보주의자가 있는데 통일벼 때문에 불평등하게 된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어 통일벼 쌀을 먹은 것이다. 이때 가난한 사람은 통일벼가 없었으면 밀가루 음식을 먹거나 겨우 연명했을 것이다.
각설하고 일반미 값은 올라가고(통일벼 쌀값의 2배에 육박함) 통일벼 쌀값은 내려가서 농민이 통일벼 농사짓는 것을 기피함에 따라 정부는 쌀의 자급자족을 위해 정부의 벼 수매는 통일벼만 하게 하는 등 통일벼 생산 장려를 반강제 하였다. 농가는 정부의 벼 수매에 응해야 제값의 쌀값을 받을 수 있었고 대량으로 팔아 목돈을 쥘 수 있었다. 정부 수매 값이 상당히 높았으므로 소농가는 자기 집에서 먹을 식량만큼은 재래종으로 심고 정부 수매할 양은 통일벼로 심기도 하였다. 소농가는 재래종을 재배하여 소량의 일반미를 아름아름으로 소개받아 처분할 수 있었지만 대농가는 정부 수매에 응하지 않으면 대량의 쌀을 팔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농촌진흥청은 벼 품종을 개량하여 1980년부터 새 품종이 개발 보급되었으며 그 후 밥맛이 좋은 자포니카 계열의 유신 벼 등 신품종을 개발하였다.
통일벼는 1992년도에 정부 수매 종에서 제외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계속하여 개발된 여러 신품종, 통일벼 전의 재래종, 일본 종(아카 바레, 추청미) 등 여러 종류가 지역에 따라 농부의 선택에 의해 다양하게 재배된다.
주택지와 공장부지, 도로 등으로 농지가 줄어들었지만 관계시설을 개선하고 농업기술의 발달로 쌀 생산량은 크게 줄지 않았고 식생활 개선으로 쌀 소비는 줄어들어서 쌀이 남아 저장 창고를 채우고도 넘쳐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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