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천 수륜 오천(화살구미)
김진국
성주군(星州郡) 수륜면(修倫面)에는 가야산(伽倻山, 성주군 수륜면) 뒤쪽 물과 수도산(修道山, 김천시 증산면) 동쪽 물이 합해져 대가천(大伽川)을 이루어 고령 쪽으로 굽이굽이 흐른다(소가천 小伽川은 성주군 수륜면 백운동 가야산 남동쪽에서 고령군 덕곡면을 가로질러 흐른다.). 수 천 만년을 세차게 흐르니 산은 깎여 절벽이 되고 바위는 부서져 모래밭이 되었다. 냇물이 굽이치는 곳마다 넓은 들판을 이루니 산을 등지고 들판을 앞세워 옹기종기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들판은 넓고 냇물은 풍부하여 보를 막아 물을 논에 대니 가뭄 걱정 없이 쌀농사를 지어 잘 살아왔다.
수륜면(修倫面)은 옛날의 지사면(志士面)과 청파면(靑坡面)이 1934년에 합쳐지고 새로 붙여진 지명이다. 수륜면(修倫面)의 명칭은 수륜(修倫)에서 취한 것이며 수륜(修倫)은 수륜(垂綸, 낚싯줄을 드리워 고기를 낚음)이라는 지명이 변경된 것이다.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지사(志士) 초등학교로 지사면(志士面)의 흔적이 남아있다. 1845년에 지사 아방(只士牙坊) 이 지사 방으로 지명이 변경되었으며 1895년에 지사 방(只士坊)이 지사면(志士面)으로 변경될 때 오천동(午川洞)은 지사면(志士面)에 속하는 지역으로 생겼다.
오천(午川)이란 이름은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중종 38 ~ 광해군 12)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고 지나는 길에 대가천에 당도하니 정오쯤 되어 이 지역을 오천이라고 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오천리(午川里)에는 사창(社倉), 지심(지사미, 只士山), 마산(馬山), 부미(鳧山)라는 자연 마을이 있다.
옛날에는 지심 동네가 지사 아방의 중심지로 고을 관아와 주막의 흔적도 있었다. 이지방 출신의 옛 성종 때 유학자이며 문장가인 지지당 김맹성(止止堂, 金孟性, 1437~1487, 세종 19~성종 18)의 한시에도 그 흔적이 나온다.
猪邑洞中稀見花
馬山亭上月如波
唱到薰風絃緩處
闇鳥一聲其奈何
저읍 동네에는 아름다움이 드물고
마산 정자에는 달빛이 물결같이 밀려오네.
노래는 훈풍에 실려 나긋한 거문고 줄에 쌓이는데
어둠 속 새의 외마디 소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저읍(猪邑) : 마산 건너편에 있는 옛날의 읍 터인 지심. 마산(馬山) : 김맹성(金孟性)의 정사(精舍)가 있던 동네.)
지심 동네와 마산 사이를 흐르는 대가천(大伽川)은 물살도 세고 푸르며 동쪽에 있는 절벽은 높고 길다. 지심에서 코 바위를 지나 절벽 밑 봇도랑 둑을 걸으면 자연의 중압감을 느낀다.
마산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발밑에는 넓은 들판이 이어지고 들판 끝에는 모래밭이 반짝반짝 빛나고 시원한 푸른 냇물이 소를 이루는 곳에 깎아지른 절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절경을 매일 보는 이 지역 사람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옛 선비가 이 경치를 알아보고 터를 잡았으니 그가 바로 성종 때 유학자이며 선비인 지지다 김민성(止止堂 金孟性, 1437~1487, 세종 19~성종 18)이었다. 김맹성은 서울에서 출생했고 벽진 운곡리가 고향인데 대가천에 매료되어 마산에 정사(精舍)를 지어 많은 선비들과 교류했으며 글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지냈다.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기도 하였다.
지지당 김맹성은 점필제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 ~ 1492) 문하로 김종직과는 사돈 간이며 환원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1454 ~ 1504)의 스승이다. 연산군 때 나라에서 그의 유고를 지지당 시집(止止堂詩集)으로 발간했다. 묘는 이웃 동네인 수륜리에 있다고 한다. 마산은 작은 동네지만 아직까지 여러 곳에 제실이 남아 있다. 많은 선비들이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1495~ 1554, 연산군 1~명종 9) 선생도 대가천 산수의 빼어남과 성주 출신 유학자들을 칭송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한시들을 남겼다.
그중 한 수를 옮겨보았다.
不見李陶隱 回頭止止堂
星山靑未了 伽水逝還長
試問薰天貴 誰流異代芳
魯鄒猶道路 萬古涕汪汪
이도은(李陶隱)이 살던 곳을 보지 못하고 지지당(止止堂)이 살던 곳으로 향하네.
성산(星山, 성주)의 청산은 끝없이 이어지고 대가천 냇물은 돌고 돌아 길게 흘러가는구나.
묻노니, 하늘까지 닿는 부귀를 누가 후대에 아름답다고 전하리.
공자 맹자의 가르침에 오히려 길이 있으니
오랜 세월 불변함에 눈물이 넘쳐흐르네.
(伽川途中 四首 가천 가는 길에 4수 중 한 수 :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이도은(李陶隱) -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대가천(大伽川)은 마산과 부미를 서쪽에, 사창과 지심을 동쪽으로 나누면서 그 사이를 남쪽으로 흘러 지심 동안들을 감싸고 동쪽으로 굽어 흐른다. 대가천이 이렇게 굽어 돌아가는 대가천 지역을 활 모양이라고 화살구미(활구비, 활굼이)라고 하였다.
냇물이 굽이굽이 돌 때마다 여울을 이루고 소(소 沼;물이 흘러들어와 모였다가 흘러나가는 넓고 깊은 곳, 호 湖 lake;물이 흘러들어와 나가지 않고 모여 있는 곳)를 이룬다. 여울은 경사진 곳을 흐르므로 물 깊이는 얕으나 물살이 빠르고 물결은 햇빛에 금가루 뿌린 듯 반짝거린다. 물이 움직이므로 산소가 많이 녹아 있어 성질 급한 피라미 등이 산다. 소는 물이 많고 넓어 멱을 감기에 좋지만 깊은 곳도 있어 수영을 못하면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 혼 줄이 난다. 냇물의 가 쪽은 모래나 자갈만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갇혀 웅덩이를 이루는 곳도 있다. 이런 곳은 물이 맑지 않았다. 냇물 속에는 피리(피라미), 먹지(피라미 수놈), 고딩이(다슬기), 납자루, 날카로운 침으로 찌르는 꺽자구(꺽지), 텅겡이(퉁가리, 동자개), 물속 모래를 걸으면 밟히는 모래무지, 마자, 특별한 징기미(징거미, 민물 새우 종류), 자라, 조금 더러운 물에서는 메기, 돌무더기를 파 해치면 뱀장어도 있었다. 3 급수(더러운 물)에 사는 송어, 잉어를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여름날에는 은어를 잡은 기억도 있었는데 은어를 제외하고는 모든 물고기를 잡어라 했다. 형님이 물고기를 잡는 데에 일가견이 있으셔서 방학이면 도랭이(물고기 담는 통) 들고 종종 따라다녔다. 물고기를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 가면 잡기는커녕 구경도 못한다.
사창(社倉)이란 지명은 곡식을 빌려주는 사창 제도가 있을 때 사창이 있던 곳이라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그래서 옛날부터 동네가 커서 사창서당(社倉書堂)이 세워졌으며 지금도 지방문화제로 남아 있다. 사창서당(社倉書堂)은 성주 대가면 유촌 출신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중종 38~광해군 12) 선생이 제자를 가르쳤던 초가 서당 자리에 200년이 지난 후 정조 때 후학들이 한강을 기리며 곡식을 거두어 세웠다 한다. 서당 앞에는 한강(寒岡) 유허비(遺墟碑, 선현의 자취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가 있다. 비석 밑의 귀부(龜趺)가 조금 우수광스럽다. 할아버지께서도 이 서당에서 공부하셨고 필사본이 집에 남아 있었는데 형제들이 때기(딱지)를 접어 없앴다.
지심 동네와 사창 동네 사이의 뒷산을 안개토라 하였다. 안개토산은 황토를 파낼 수 있었다. 황토는 집을 짓거나 추수를 위해 마당을 다질 때 많이 사용하였다. 익은 보리나 나락을 베서 말린 다음 소 등의 질매(길마) 위에 얹은 걸채(옹구)에 볏단과 보릿단을 싣고 집으로 운반하여(소가 한번 실어 나른 양을 한 바리라 했다) 황토로 다진 마당에서 탈곡을 하였다. 그래서 이런 곡식을 타작하기 위해서는 평상시에 황토를 깔고 고르게 다진 마당을 장만하여 놓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안개토에는 상엿집(상여를 분해하여 보관하던 곳)이 있어 평시에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안개토 위쪽에는 꼭개라는 고개가 있는데 몇 천 년이나 된 고개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과 소가 다녔는지 고개에 몇십 미터의 골이 났다. 고개로 이어지는 길이 상당히 넓은 것을 보니 곡물을 실어 날랐던 것 같다.
옛날에는 산보다는 강물이나 냇물이 더 길을 막는 장애물로 작용하므로 고갯길로 동네를 연결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강이나 냇물이 지역을 나누는 경계가 되었다.
꼭개 동쪽 부근에 자연석으로 정교하게 대와 담장을 쌓고 가운데 석불상을 모신 곳이 있었다. 지붕이 없어 근처를 지날 때면 애처롭기도 하고 엄숙한 기분도 들었다.
그 옛날 꼭개골, 남은골, 우죽골, 지식골, 아랫골에 소 올려놓고 냇물에 멱 감고 다시 올라가니 소가 없어져 소 찾는다고 혼쭐이 나기도 했었다.
또 각자 집에서 가져간 감자를 구별하기 위해 댕댕이덩굴에 꿰어 감자를 삼 곳(삼나무 大麻 껍질을 벗기기 위해 끓이는 것) 하듯이 삶아 먹었던 감자 삼 곳도 기억이 난다.
감자 삼 곳을 하는 방법은 돌로 아궁이를 만들어 자갈을 아궁이 위에 쌓아 놓고는 마른나무를 주워 불을 때면 자갈이 뜨겁게 되는데 이를 돌로 내려쳐 아궁이 속으로 내려 앉히고 그 위에 잎 달린 나뭇가지를 펴고 감자를 놓고는 다시 잎이 달린 가지를 덮고 그 위에 젖은 흙으로 덮어서 봉하고 나뭇가지로 가운데를 뚫어 물을 주입하고는 다시 봉하여 데운 돌로 감자를 익히는 것이다.
꼴 망태 메고 서툰 낫질로 풀을 베다가 손가락을 베이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사방의 모든 산이 꾸부러진 소나무들만 듬성듬성 자라던 민둥산이었는데 지금은 삼림이 우거져 산길도 찾기 어렵다. 더워진 기후로 산자락에는 소나무가 사라지고 낙엽수로 덮였다.
들판은 경지정리로 꾸불꾸불한 천정천(天井川, ceiling river, 하천 바닥이 논보다 높은 하천)은 사라지고 농경지가 자로 잰 듯 반듯하다.
구방천도, 뒤말 방천도 사라지고 없다. 그 옛날 비가 오면 할아버지께서는 도롱이 걸치고 삿갓 쓰고 뒤말 방천에서 미리 준비해 둔 말뚝과 생나무 가지를 옆에 옮겨 놓고 방천이 터질까 지키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전에 방천이 터져 밀려 나온 흙이 논을 덥었는데 이를 할아버지 혼자서 지게로 날라 치우는 데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사창은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곳이라 전통적 관습은 사라지고 개인적 생활이 빨리 정착되었지만 마을 전체 일에는 단합이 옛날부터 잘 되었다. 옛날 우리 집 뒤 굴뚝에서 나온 불씨로 처마에 불이 붙었으나 주인은 모르고 있는데 먼 곳에서 먼저 보고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물을 퍼 날라 순식간에 불을 꺼 주었다.
대장간과 물레방아는 그 옛날에 없어졌고 어른들이 쉬시던 정자나무들은 경지정리 때 베어지고 언덕은 논으로 편입되었다. 어른들은 세상을 떠나시고 찐쌀 나누어 주던 이웃집 아지매는 시집가고 초등학교는 폐교되었으며 친구들은 도시로 흩어졌다.
더 심한 것은 산천도 모두 바뀌었다는 것이다. 대가천의 상류에 댐을 막아 수량이 줄어 냇물 바닥에 검은 조류가 끼고 냇가 백사장은 제방을 쌓아 논으로 개간해 사라져 버렸다.
어쨌든 대가천은 그래도 어디에나 경치가 좋다. 상류에는 큰 바위와 절벽이 많아 이름난 곳이 많지만 하류는 하류대로 넓고 평온하며 수량이 많다. 바람 쌩하게 부는 겨울도, 버들강아지 움트는 봄도, 가을의 황금들판도 좋고, 여름에는 더욱 좋다. 여름에는 비 온 뒤 맑은 날 가면 수량도 많고 내 전체가 깨끗하다.
고령읍과 가천면을 있는 33번 국도는 대가천과 같이 달리므로 사람 적은 곳을 골라 어디에서나 냇가로 내려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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