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왓슨, 크릭, 로잘린드,윌킨스)

진국 2017. 3. 14. 09:47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

김진국

DNA(Deoxyribo Nucleic Acid, 데옥시리보 핵산)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은 생물학적, 의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센트럴 도그마(Central dogma Theory, 중심설, 1958년, 크릭, DNA 복제 RNA 전사 단백질 번역), 돌연변이설, 게놈(genome) 완성, 유전자 재조합 등 분자생물학, 유전공학의 중요한 개념과 발달은 DNA 분자 구조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DNA는 1869년 스위스의 의사인 요한 프리드리히 미셰르(Johannes Friedrich Miescher, 1844 ~1895)에 의해 발견되었다. 미셰르는 세포의 핵(Necleus)이 어떤 기관인지 규명하고자 했다. 미셰르는 붕대에 묻어있는 고름 속에 있는 백혈구를 잔뜩 모아 산성 물질을 추출했다. 그는 핵에서 추출한 이 물질에 단백질을 의미하는 접미사 -in을 붙여 핵산(neuclein)이라고 명명했다. 그 당시에는 가장 중요한 생명현상을 나타내는 유전물질이 단백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의 기술로는 핵산(nucleic acid, 核酸)이 단백질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의 실험으로도 단백질이라고 하기엔 근거가 부족했지만 미셰르는 이것을 특별한 종류의 단백질이라고 생각했다.
단백질은 고분자 화합물로 무척 복잡한 분자구조를 가지고 있고 안정적이며 특히 그 종류가 다양하므로 다양한 유전자를 담당하는 유전물질은 단백질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핵산(nucleic acid, 核酸-DNA와 RNA)은 네 가지 염기가 단순히 배열된 고분자 화합물이었으므로 핵산이 다양한 유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그때에는 없었다.
1879년 발터 플레밍(Walther Flemming, 1843 ~ 1905, 독일)은 핵에서 염색되는 물질을 염색질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이 세포 분열 과정에 꼬여서 염색체가 된다고 하였다.
1902년 아치볼드 개로드 (Archibald Edward Garrod, 1857~1936, 영국)가 알캅톤뇨증(Alkaptonuria)을 연구하여 유전자와 효소의 관계를 처음 발견하였다. 
이어서 1910년 토마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 1866 ~ 1945 미국)은 초파리의 침샘 염색체와 유전과의 관계를 연구하여 염색체에 유전자가 있다는 유전자 설(gene theory)을 제시하였으며 그의 제자인 캘빈 브리지스(Calvin Blackman Bridges, 1889 ~ 1938, 미국, 1928, 거대 염색체의 유전자 지도 작성, 유전자 중복의 초파리 돌연변이체 발견)가 1916년 초파리의 정자와 난자에서 염색체 비분리(Nondisjunction)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하여 염색체에 특정 유전자의 위치를 밝혀 유전자 설(gene theory)의 증거로 제시하였다.
1941년 비들(George Wells Beadle, 1903~1989. 미국)과 테이텀(Edward Lawrie Tatum,  1909~1975. 미국)이 붉은 빵 곰팡이(red bread mould, Neurospora crassa)의 유전자에 X선을 쪼여 새로운 아미노산이 합성되는 것을 방해하는 관계를 연구하여 1 유전자 1 효소설을 발표하였다. 
그 후 1944년에 뉴욕 록펠러 연구소의 오스왈드 에이버리(Avery, Oswald Theodore, 1877 ~ 1955)가 DNA가 유전자의 기본 물질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오스왈드 에이버리가 유전자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었던 동기는 폐렴균 실험에서였다. S형 폐렴균은 감염성이고 R형 폐렴균은 감염성이 없는 것이었으나 감염성의 S형 폐렴균을 열처리하여 죽인 후 R형 폐렴균과 섞었더니 R형 폐렴균이 S형으로 형질이 바뀌어서 전염성 S형 폐렴균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즉 열을 가한 S형 폐렴균은 죽었으므로 전염이 될 수 없지만 죽은 S형의 유전자가 R형에 들어가 유전자를 S형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R형 폐렴균이 S형 폐렴균으로 형질이 변한 것이다. 여기서 옮겨간 유전자 물질이 DNA이었다.
그리고 DNA는 데옥시리보핵산 가수분해효소(deoxyribonuclease)에 의해서만 분해되는 물질이란 것을 밝혔다.
1928년 프레더릭 그리피스(Frederick Griffith, 1879 ~ 1941)에 의해 처음으로 이 실험이 실행되었으며 에이버리(Avery, Oswald Theodore, 1877 ~ 1955)가 더 확실한 실험을 하여 알아낸 것이다.
1952년 앨프리드 허시(Alfred Day Hershey, 1908 ~ 1997)와 체이스(Martha Chase, 1927 ~ )는 방사성동위원소를 처리한 실험으로 DNA(deoxyribonucleic acid)가 유전자라는 것을 확정하였다(박테리오파지 T2와 대장균에 DNA의 구성 원소인 인(燐, phosphorous 원자번호 15, 원자량 31) 대신에 인의 방사성 동위 원소인 P32을 처리하고 단백질의 구성 원소인 황(黃, sulfur, 원자번호 16, 원자량 32) 대신에 황의 방사성 동위 원소인 S35를 처리한 다음 여러 대를 정상 원소에서 배양한 후 이들 동위 원소를 조사한 결과 황의 동위원소는 없어지고 인의 동위 원소만 측정됨에 따라 DNA가 유전 물질임이 증명됨).
1944년 알렉산더 토드(Alexander Robertus Todd, 1907~1997)는 DNA 분자는 당(deoxyribose, 데옥시 리보오스, 5탄당), 염기(base), 인산(phosphate)으로 구성된 A, T, G, C 4종류의 데옥시뉴클레오타이드(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950년 오스트리아 제국(우크라이나 체르노비츠 출생)출신의 미국 화학자 에르빈 샤가프(어윈 샤가프, Erwin Chargaff, 1905 ~ 2002)는 DNA의 염기를 종이 크로마토그래피(paper chromotography)와 자외선 분광광도법(ultraviolet spectrometry)을 이용하여 정량적으로 분석하여 아데닌과 타민, 구아닌과 시토신이 각각 1:1의 몰 비로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샤가프의 법칙, Chargaff's rule, 염기동량설).
이와 같이 DNA가 각 세포의 구조와 기능을 유전적으로 결정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그 구성 물질의 종류와 그 비율이 밝혀지자 그다음은 DNA의 분자 구조를 밝히려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DNA의 분자 구조를 밝히려는 이런 중요한 연구에 젊은 과학자 2명이 과감히 도전했다. 갓 박사학위를 받은 제임스 왓슨(James Dewey Watson, 1928 ~)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Francis Harry Compton Crick, 1916 ~ 2004)이었다.
미국의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James Dewey Watson)은 15살에 시카고대학에 입학하여 동물학을 전공하고 1947년에 졸업했다. 1950년에는 22살의 나이로 인디에나대학에서 샐버도어 루리아(Salvador Edward Luria, 1912 ~ 1991) 지도하에 파지(박테리오파지) 유전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박사 후 과정으로 연구할 곳을 찾고 있었다.
세계 2차 대전 후 원자폭탄을 제조했던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 미국, 영국, 캐나다 공동의 극비 무기 개발 계획)에 참여했던 수많은 과학자들은 죽음의 과학에서 생명의 과학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물리학자들도 물리학적 방법을 사용해 생물학에 접근하는 학자가 늘어갔다.
제임스 왓슨도 학부시절에 위대한 양자 과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1887 ~ 1961, 오스트리아)가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왓슨은 1951년 나폴리의 학술회의에서 윌킨스(Maurice Wilkins, Maurice Hugh Frederick Wilkins, 1916 ~ 2004)가 공개한 DNA X선 사진을 보고 이런 연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X선 연구의 중심지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를 찾게 되었다.
케임브리지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는 영국 정부의 의학 연구위원회(MRC, Medical Research Council)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재정적으로 안정된 연구기관이었으며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William Lawrence Bragg, 1890 ~ 1970, 결정학의 창시자, 부자 노벨상 수상자)가 연구소장이었다.
제임스 왓슨이 1951년에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로 오게 되어 크릭과 함께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왓슨은 23세 크릭은 34세였다.
칼리지 런던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크릭(Francis Crick, Francis Harry Compton Crick)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그가 연구하던 실험실이 파괴되는 등 연구에 연속성이 끊어졌다. 크릭은 1947년 케임 부리지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생물학으로 전향했다. 크릭은 대학원생으로 1949년, 33세라는 늦은 나이에 케임부리지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의 의학연구위원회 분과(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음)에 합류했다.
그 후 크릭은 폴리펩타이드와 단백질에 대한 X선 연구를 하여 1953년에 학위를 받았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한 연구에 전념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왓슨과 같이 DNA 분자 구조에 대한 연구를 같이 진행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지라 물자가 부족한 영국에서는 같은 대학에서 한 주제에 1팀만 연구하도록 되어 있었다. DNA 분자는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X선 회절 방법으로 연구하고 있었으므로 왓슨과 크릭은 공개적으로 DNA 분자 구조를 연구할 수 없었다.
당시 당대 저명한 과학자였던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의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 Linus Carl Pauling, 1901 ~ 1994, 화학자, 노벨상 2회 수상) 박사도 DNA 분자 구조를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왓슨은 크릭에게 DNA 분자의 3차원 구조가 밝혀지면 DNA의 유전적 역할이 명확해질 것이라면서 크릭을 끌어들였다. 왓슨은 크릭에게 라이너스 폴링이 분자모형을 만들어 유명해진 것과 같이 우리도 DNA 분자 구조 모형을 만들어 폴링을 이겨보자고 하였다. 둘은 의기투합하였다.
DNA 분자 구조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론적 통찰과 실제 모형 구축이 매우 중요했지만 이 모든 연구는 DNA X선 회절 사진을 기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최초의 DNA X선 회절 사진은 1937년에 애스트버리(William Thomas Astbury, 1898 ~ 1961, 영국)가 벨(Florence Ogilvy Bell, 1913 ~ 2000, 영국 여성 X선 결정 학자)을 고용하여 캐스퍼슨(Torbjörn Oskar Caspersson, 1910 ~ 1997, 스웨덴, DNA를 분리하여 고분자라는 것을 밝혔고 DNA의 염기를 염색하여 자외선 현미경으로 형광띠를 관찰하여 DNA 분자량을 측정하였고 단백질합성에 RNA역활을 제시)이 보내 준 DNA 샘플을 이용하여 X선 회절 사진을 찍었지만 사진이 명확하지 않았고 또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어서 연구에 진전이 없었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 킹스 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 Maurice Hugh Frederick Wilkins, 1916 ~ 2004)와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 1920 ~ 1958)이 DNA X선 회절 사진을 찍었다.
모리스 윌킨스는 1940년 영국 버밍햄 대학에서 존 랜들(John Turton Randall, 1905 ~ 1984, 물리 및 생물학자, 마그네트론 발명-전자레인지)의 제자가 되어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44년 그는 미국의 원자탄 개발 프로젝트였던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에서 방사성동위원소와 그것을 분리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윌킨스는 1945년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여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죽음의 학문이 아니라 생명의 학문이라 생각되는 생물학 연구로 방향을 전향하고, 당시 영국 정부의 의학 연구위원회(MRC)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던 케임부리지대학교의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 London) 생물물리학(biophysics) 그룹에 합류했다. 생물물리학 그룹은 세포 수준에서 분자들의 구조를 밝히는 연구를 수행했다.
케임부리지 대학교의 킹스칼리지(King’s College, London) 생물물리학(biophysics) 그룹은 영국 정부의 의학 연구위원회(MRC, Medical Research Council)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재정적으로 안정된 연구기관이었으며 스승인 존 랜들(John Turton Randall, 1905~1984, 물리 및 생물학자, 마그네트론 발명-전자레인지)이 소장이었다.
1946년 이곳에서 첫 생물학 연구를 수행하게 된 윌킨스는 핵산(DNA, RNA)에 대한 연구를 제안받았다. 그는 처음에 자외선 현미경을 사용해 세포 내에 존재하고 있는 핵산(DNA, RNA)의 양을 측정하는 물리학적, 광학적 방법을 개발하려 시도했다.
당시 여러 학자들이 DNA(deoxyribonucleic acid), RNA(ribonucleic acid) 같은 핵산이 세포 내의 단백질 합성에 관여하는 중요한 물질이라는 점을 제안한 상태였다.
학자들이 DNA라는 핵산이 세포 내의 유전정보를 지니는 물질이라는 것을 밝힌 1944년 이후 DNA는 분자생물학과 생물물리학의 중요 연구주제로 부상했던 것이다.
1950년 6월 존 랜들(John Turton Randall, 1905 ~ 1984)은 엑스선 결정학(X-ray crystallography) 전문가였던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을 생물물리학 그룹으로 영입하게 된다.
모리스 윌킨스가 1950년 5월 런던 학회에서 만난 루돌프 지그너(Rudof Signer, 1903 ~ 1990, 화학자, 스위스)로 부터 추출된 핵산(nucleic acid, 核酸-DNA와 RNA) 샘플을 받아옴에 따라 존 랜들은 단백질과 지질의 X선 회절 연구를 위하여 1950년 6월에 영입했던 로잘린드 프랭클린에게 최신 주제인 DNA로 방향을 바꾸어 연구하게 하였다.
이미 DNA 분자 구조에 대한 연구를 행하고 있던 윌킨스는 같은 분야에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들어와 공동으로 연구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은 1938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뉴넘 컬리지(Newnham College)에서 자연 과학 Tripos(NST, 자연과학의 여러분야 전공)를 공부했고 1941년에 졸업했다.
로잘린드는 뉴넘 컬리지(Newnham College)에서 결정학의 아버지인 윌리엄 브래그(William Bragg, 1862 ~ 1942)를 만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남녀 차별로 여성에게는 학사, 석사 학위를 수여하지 않다가 1947년이 되어서야 여성에게 학사, 석사 학위를 수여하였으며 그래서 1941년에 졸업한 프랭클린은 나중에 소급 적용받았다.
학사학위 없이 졸업하게 된 프랭클린은 1941년 최종 졸업 시험에서 준우등을 하였는데 이 성적에 의해 영국 석탄이용연구소(BCURA) 연구원 채용 응시자격에 학사학위로 인정받아 채용되었던 것이다.
화학을 전공한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은 1942년부터 창의적 연구를 허용하였던 영국석탄이용연구소(BCURA)에서 석탄 결정을 연구하여 다공성 구조를 밝혀냄으로써 유명하게 되었으며 이에 관한 논문(석탄 및 관련 물질들에 관한 고체 유기 콜로이드의 물리 화학, The physical chemistry of solid organic colloids with special reference to coal.)으로 1945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6년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파리의 국립 화학 연구소에서 만난 자크 메링(Jacques Mering, 1904 ~ 1973, 러시아 태생 프랑스인, X선 결정학 및 광물학)으로부터 비정질 물질의 X선 결정학을 배웠다.
1950년 6월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3년 동안 존 랜들(John Turton Randall)의 지도하에 단백질과 지질의 X선 회절 연구를 하여 펠로십을 받기로 하고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 London)로 왔다. 그런데 존 랜들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에게 최신 주제인 DNA로 방향을 바꾸게 하고 윌킨스와 같이 연구하게 하였다.
여기서 X선 회절장치를 사용할 수 있는 대학원생인 레이먼드 고슬링(Raymond Gosling, 1926 ~ 2015, DNA 연구, 의학물리학)을 만났다. 윌킨스 하에 있던 고슬링이 로잘린드를 도우게 된 것이다.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은 X선 회절장치를 새롭게 계획하고 주문한 부속품을 맞추어 성능이 탁월한 새로운 X선 회절장치를 만들었으며 그리고 연구 학생인 레이먼드 고슬링의 도움을 받아 선명한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킹스 칼리지의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DNA를 선도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의견이 맞지 않아 협력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자신과 고슬링 둘이서 연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윌킨스는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실험 결과를 상관인 자신이 해석하고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윌킨스는 동료 스토크스(Alec Stokes, 1919 ~ 2003, 영국, 물리학자, DNA 나선구조 밝힘)가 계산한 나선구조의 X선 패턴이 DNA X선 회절 사진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았다.
윌킨스는 스토크스가 계산한 나선 구조, 자신이 DNA 팽창을 실험한 결과, DNA 사슬의 밀도와 경사각에 대한 자신의 생각 등을 메모하여 프랭클린이 보도록 자리에 놓아두었다(윌킨스는 소심했으며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그 반대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메모를 보고 폭발했다. 그녀는 자기 것을 제삼자가 관여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이렇게 불화가 일어나자 랜들은 윌킨스에게는 구형 X선 회절장치를 사용해 B형 DNA를 연구하도록 하고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신형 X선 회절장치를 사용해 A형 DNA를 연구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마음이 상한 윌킨스는 옛 친구인 프랜시스 크릭을 만나기 위해 캐번디시를 자주 찾아갔다. 윌킨스는 크릭에게 DNA의 나선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윌킨스는 캐번디시에서는 아무도 DNA에 관한 연구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왓슨과 크릭에게 자유롭게 DNA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윌킨스에게 모델을 만들라고 했지만, 윌킨스는 프랭클린은 모델을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킹스 칼리지에서도 실제와 매우 유사한 모델을 만든 적이 있었지만, 프랭클린은 평소의 견해대로 증명할 증거가 없다고 했다.
제임스 왓슨은 윌킨스의 이야기를 듣고 크릭에게 우리가 DNA모델을 만들자고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라이너스 폴링과 코리는 DNA 분자 구조 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X선 회절 사진 기술이 뒤져 사진이 선명하지 않았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1952년 5월에 자신의 DNA 사진 몇 장을 폴링의 동료인 코리에게 보여주었으며 코리는 이 사진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로 가지고 가서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1952년 캐번디시의 왓슨은 선명한 DNA X선 회절 사진을 찍지도 못했으며 단지 애스트버리(William Thomas Astbury)의 DNA X선 회절 사진과 킹스 칼리지의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발표한 자료(어떤 사람들은 왓슨은 그 자료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했다)를 이용하여 크릭과 함께 DNA 모형을 만들었다. 그 모형은 줄이 서로 꼬여 있고 뉴클레오티드 염기(A, C, G, T)가 옆으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윌킨스(Maurice Wilkins)와 프랭클린을 초청하여 여러 동료들에게 그 모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모형에 대해 평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혈기 넘치는 왓슨까지 한동안 거처에서 은둔할 정도였고, 크릭도 일단 자신의 단백질 연구에 전념했다.
이에 월리엄 로렌스 브래그(William Lawrence Bragg, 캐번디시 연구소장, 결정학의 창시자, 부자 노벨상 수상자)는 DNA 분자 구조 연구를 킹스 칼리지 생물물리학 그룹의 윌킨스와 프랭클린이 하도록 하고 왓슨과 크릭에게는 DNA 분자 구조 연구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왓슨과 크릭은 연구소장인 로렌스 브래그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1952년 여름에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고슬링은 새로운 X선 회절 장치를 만들어 51번의 명확한 DNA X선 회절 사진을 확보하였다.
1952년 여름, 크릭은 화학자, 수학자, 생물 물리학자인 존 스탠리 그리피스(John Stanley Griffith, 1928 ~ 1972, 프레더릭 그리피스Frederick Griffith, 1879 ~ 1941의 조카)와의 대화 중 DNA 구조에서 분자들이 결합하려면 DNA 분자의 뉴클레오티드(염기)들이 어떤 식으로든 서로 짝을 맞추어 결합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말했다. 이에 관심을 느낀 그리피스는 아데닌(A)과 티민(T)이 한 쌍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되고, 구아닌(G)과 시토신(C)은 세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되는 상보적 결합(相補的結合, complementary bond)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이 외 다른 방식으로는 쌍을 이룰 수 없는 그런 분자 형태라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크릭은 이 짝짓기가 갖는 중요성과 수소 결합의 관련성을 즉시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샤가프 법칙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1952년 7월에 캐번디시를 방문한 샤가프(Erwin Chargaff, 1905 ~ 2002, 오스트리아 출생의 미국 생화학자)를 만났다.
크릭이 DNA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샤가프(Erwin Chargaff)는 DNA 분자가 어떻게 항상 동일한 수의 A와 T, 동일한 수의 G와 C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크릭은 이것을 전에 들었던 그리피스의 설명과 종합한 결과, DNA 분자 구조는 A와 T 그리고 C와 G가 상보적 결합(相補的結合, complementary bond)을 한 다리가 두 개의 긴 사슬을 연결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심지어 C와 G 다리의 길이와 A와 T 다리의 길이가 동일하며, 따라서 두 개의 분자 사슬 사이에는 간격이 일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개월 동안 캐번디시의 왓슨과 크릭은 그 아이디어에 대한 진지한 연구도 없이 대화로만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1952년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새로운 모형 구축(모형을 만드는 일은 왓슨이 대부분 했고 크릭은 근사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에 정신없이 뛰어들게 된다. 이때까지도 왓슨과 크릭은 계속 DNA 분자 구조를 삼중 나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캐번디시 연구소의 대학원생이자 라이너스 폴링의 아들이었던 피터 폴링은 1952년 12월에 아버지로부터 DNA 분자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편지를 받았다. 왓슨과 크릭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그 편지에는 모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1953년 1월, 아버지 논문을 출판하기 전의 견본판 형태로 받게 된 피터 폴링은 그 논문을 왓슨과 크릭에게 보여주었다. 기본 구조는 DNA 사슬 가닥 세 개가 서로 엮인 3중 나선 형태로 자신들이 만든 모형과 비슷하였다.
왓슨은 라이너스 폴링의 논문을 가지고 윌킨스와 프랭클린에게 보여 주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왓슨은 평소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왓슨은 프랭클린의 실험실에 찾아가 폴링의 논문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왓슨은 폴링의 오류를 지적했다. 그녀는 나선 구조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왓슨의 말을 반박했다. 하지만 왓슨은 프랭클린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왓슨은 프랭클린이 X선 사진 해석을 할 줄 모르며, 그녀가 나선형 구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진이 나선형 분자들이 포개져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랭클린은 분노했고, 왓슨은 프랭클린에게 겁을 먹었다.
그때 윌킨스가 그 모습을 보게 되어 왓슨을 위로하며 1952년 여름에 찍은 프랭클린의 51번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때에 고슬링은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이 불화로 킹스 칼리지를 떠날 예정이어서 혼자 남게 되면 지도자 없이 자신의 논문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연구물인 51번 사진을 부학과장인 윌킨스에게 보여준 것이다. 고슬링은 프랭클린이 떠난 뒤에는 윌킨스와 DNA 연구를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윌킨스는 이 사진이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왓슨에게는 경이적인 것이었다. 왓슨은 검은 X자 모양의 사진을 보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내내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DNA를 촬영한 X선 회절 사진을 보면 이 사진이 DNA의 나선구조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DNA의 분자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사진을 본 왓슨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 사진이 의미하는 것은 적어도 DNA 분자가 삼중 나선구조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왓슨과 크릭은 결국 이 사진으로 DNA 분자가 이중 나선 모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로잘리드 프랭클린의 X선 사진에 대해서 왓슨이 그 사진을 봤을 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진을 그나마 해석할 만한 사람은 물리학 전공이며, 단백질 X선 사진을 판독한 경험이 있는 프랜시스 크릭일 것이며, 크릭이 자서전 '열정 어린 탐구의 나날'에서 '나는 당시 그 사진을 본 적이 없다'라고 기술한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왓슨과 크릭은 이 사진을 보고 DNA 분자가 나선 구조일 뿐만 아니라 경사도와 간격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이때 캐번디시 연구소의 책임자였던 브래그는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윌킨스와 불화로, 그리고 연구소와의 계약기간이 끝나 버크벡 칼리지(Birkbeck College)로 떠나기로 결정됨에 따라 자신과 경쟁 관계에 있는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이 DNA 분자 구조를 먼저 풀어낼 것을 걱정하여 왓슨과 크릭에게 내린 DNA 연구 금지를 풀어주었고, 왓슨과 크릭은 DNA 분자 모형 구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2월 4일, 왓슨은 모델을 만들기 시작했다. 왓슨은 이중 나선의 정확한 수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인산을 중심에 놓은 상태였다. 크릭은 인산이 바깥에 위치하는 모델을 만들기를 제안했고, 왓슨은 그에 따랐다.
2월 8일 윌킨스와 점심을 같이 한 왓슨과 크릭은 윌킨스에게서 모형 구축을 시작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2월 중순경에는 크릭의 스승인 막스 페루츠(Max Perutz, Max Ferdinand Perutz, 1914 ~ 2002, 1962년 헤모글로빈의 구조 연구로 노벨 생화학상 수상)로부터 왓슨과 크릭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연구비 지원 기관인 의학 연구위원회(MRC)에 비공개로 제출한 보고서를 받았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MRC 보고서에는 왓슨과 크릭이 필요했던 정보가 들어있었다. 이것을 통해 DNA의 두 나선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평행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폴링의 DNA 분자 구조 발견을 알리는 편지가 2월 21일에 네이처지에 실렸으며 이를 본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폴링에게 인산의 배치에 대해서 편지를 썼다. 하지만 폴링은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폴링은 X선 회절 사진에 대한 유럽의 최신 정보(51번 사진)를 얻지 못했다. 폴링은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한 것이 문제가 되어 1952년에 유럽으로 가서 학술회의도 참석하고 윌킨스 팀의 DNA X선 회절 사진도 볼 예정이었으나 정부에서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폴링은 새로운 X선 회절 사진의 정보를 얻지 못해 DNA 분자 구조는 3가닥이고 인산이 밖으로 돌출되어있다는 논문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폴링은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하였는데 두 번째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51번의 선명한 DNA X선 회절 사진을 확보하고 많은 데이터를 분석하여 DNA가 이중나선이고 인산이 밖에 있다는 것을 확정했으나 사진으로 염기가 두 가닥 안쪽 사이에 상보적으로 결합한다는 것 등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A형 DNA 연구에 집중하고 사진으로 모든 증거를 찾으려고 했으므로 결과를 얻는데 많은 시간이 흘렀다. 또 DNA 분자 구조 모형 연구가 주 목표가 아니어서 DNA 분자 구조 모형 발견에 집중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1953년 2월 28일 36살의 프랜시스 크릭과 25살의 제임스 왓슨이 여러 곳의 정보를 모으고 이를 통합 분석하여, 특히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X선 회절 사진과 데이터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얻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먼저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쪽 가닥이 데옥시리보뉴크레오타이드의 탄소 3'에 새로운 데옥시리보뉴크레오타이드의 탄소 5'의 인산이 공유결합(3'-에스테르 결합)으로 계속 결합하는 중합을 하여 긴 가닥을 이루고, 이들 2개의 가닥이 반대방향으로 나선구조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들 두 가닥의 안쪽에는 양쪽 가닥의 염기가 상보적으로 수소결합(complementary hydrogen bond)을 이루어 쌍으로 존재한다. 아데닌(A)은 티민(T)과 이중 수소결합을 하고 구아닌(G)은 시토신(C)과 삼중수소 결합으로 상보적인 염기쌍을 이루어 사다리의 발판과 같은 형태가 된다. 이때 바깥쪽에 존재하는 두 가닥의 인산과 당의 결합이 서로 반대 방향이 되므로 두 가닥은 반대 방향이다. 염기쌍과 염기쌍 사이의 거리는 3.4Å(angstrom 옹스트롬, 1Å=0.1nm, 1백억 분의 1m)이며, 10개의 염기쌍이 1회전을 형성하므로 나선이 1회전하는 거리는 34Å(3.4nm)이다. 그리고 나선의 지름은 20Å이다. 이렇게 DNA 이중 나선 모형을 완성했다.
DNA의 분자 구조가 나선을 이루는 원인은 데옥시리보뉴클레오타이드와 데옥시리보뉴클레오타이드 사이의 결합인 phosphodiester bond(인산-2-에스테르 결합 ; 3', 5') 때문이다. 데옥시리보오스의 5번 탄소에 있는 히드록실기(-OH)와 인산(H3PO4)이 에스테르 결합을 하고, 3번 탄소에 있는 히드록실기와 인산이 에스테르 결합을 할 때 약간씩 비틀어지는 결합을 하므로 헤릭스(helix, 나선) 구조를 하게 되는 것이다. DNA 분자의 헤릭스(helix, 나선) 구조는 크릭의 동료인 스토크스(Alec Stokes, 1919 ~ 2003, 영국, 물리학자)가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밝혀냈던 것이다.
3월 7일에는 높이 180센티미터가 넘는 DNA 분자 모형이 완성됐다. 라이너스 폴링도 4월 초에 케임브리지대학 캐번디시 연구소로 와서 모형을 보고 그것이 옳다는데 동의했다.
이 모형은 윌킨스와 프랭클린의 X선 회절 사진, 샤가프의 ‘염기 동량설’ 등 DNA에 대해 알려진 사실을 모두 만족시키는 매우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왓슨과 크릭은 자주 가던 선술집에서 “우리가 생명의 비밀을 발견했다!”라고 선언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들이 이중 나선구조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이 논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DNA 이중나선 구조 모형은 오늘날에도 별로 고칠 것이 없는 이상적인 모형이다.
이것은 왓슨과 크릭이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한데 모아 완벽한 최종 형태로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왓슨과 크릭은 상보적인 염기쌍의 구조를 바탕으로 DNA 분자의 복제 메커니즘 예측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유전물질인 DNA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실마리가 됐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모든 의문을 설명 가능하게 되었다. 진화론 중 돌연변이설은 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었는데, DNA 분자의 이중나선이 둘로 분해되어 상보적 결합을 할 때, 특정 염기가 빠져나가거나 복제 오류가 생기면 돌연변이가 생겨난다는 가설이다. 그리고 이것은 DNA 분자를 조작함으로써 생물의 특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전자 재조합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크릭과 왓슨이 쓴 DNA 분자 모형에 관한 이론은 고작 1페이지 남짓한 내용에 불과했지만 그 모든 내용이 현대 유전공학의 주춧돌이 되었다.
그다음 왓슨과 크릭은 이 모형을 학술지에 발표하려 했지만, 문제점이 있었다. 그들의 논문은 킹스 칼리지 연구팀의 실험 결과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그들의 논문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캐번디시 연구소와 킹스 칼리지 연구팀은 협의를 하여 두 연구소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연구자들은 이에 따랐다. 합의에 따라 랜들은 네이처지에 왓슨과 크릭의 논문이 발표될 때 윌킨스와 프랭클린의 논문이 같이 발표되게 해 놓고 연구 팀에게 논문을 빨리 쓰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1953년 4윌 25일에 발행된 네이처지 171호에는 왓슨과 크릭의 논문이 첫 번째로 나오고, 다음 스토크스, 윌킨스의 ‘데옥시펜토오스 핵산의 분자구조’와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고슬링의 ‘티모핵산나트륨의 분자 구조’가 실리게 되었다.
크릭과 왓슨의 논문을 본 독자들은 바로 뒤에 이어진 스토크스,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윌킨스의 논문을 보고 DNA 분자가 이중나선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프랭클린과 윌킨스의 연구결과가 마치 근거를 제시하는 것처럼 된 것이다.
이 논문으로 왓슨과 크릭은 순식간에 분자 생물학계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고 수많은 과학자들로부터 이것에 관련된 수많은 데이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그 데이터들을 정리하여 정교한 논문을 쓰게 되었다. 5주 뒤에 DNA 복제에 대한 논문을 네이처지에 다시 발표하였다. 그리고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공동저자로 인정하였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논문의 제4 저자로 이름을 올리는데 그쳤을 뿐만 아니라, 1958년 난소암으로 요절했기에 죽은 사람은 노벨상 수상자가 될 수 없으므로 노벨 생리의학 상 후보에 이름도 올리지 못하였다. 1962년 왓슨, 크릭, 윌킨스 이 세 사람이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렇게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업적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왓슨과 크릭의 논문에서는 킹스 칼리지 연구 팀의 논문의 자세한 결과는 알지 못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1년 뒤 그들의 논문에서 킹스 칼리지의 데이터가 없었다면 모델 구축은 힘들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1953년 3월 런던 대학교 버크벡 칼리지(Birkbeck College, University of London)로 옮긴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X선 결정학을 이용하여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TMV, tobacco mosaic virus)의 구조를 연구하여 모든 TMV의 길이가 같다 것을 밝히는 등 RNA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53년 DNA 분자 구조 논문 발표 후 제임스 왓슨은 캘리포니아공대 교수로 갔으며 하버드대 교수를 역임했다. '이중나선(1968)'이란 책을 저술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뒤에는 뉴욕 롱 아일랜드 북부 콜드 스프링 하버의 정량 생물학 연구소로 옮겨 소장이 되었다. 1988년부터 4년간 미국 국립 보건 연구소의 인간 유전체 계획(human genome project)의 책임자가 되었다.
프랜시스 크릭은 뉴욕 브루클린 폴리 테크닉으로 가서 실험실의 현역으로 남았다.
반 보존적 법칙 가설, RNA의 존재를 알고 실험을 통해서 예언, 3개의 염기로 정보를 나타내는 코돈, 코돈과 20개의 아미노산과의 연결자를 예언한 어댑터 분자(adaptor molecule, 연결자, tRNA) 가설(RNA의 염기에 맞는 아미노산을 끌고 오는 어댑터, 1958)을 세우는 등 센트럴 도그마설(Central dogma Theory, 중심설, 1958년, 크릭, DNA 복제 RNA 전사 단백질 번역)로 이어지는 연구를 계속하였다.
크릭은 많은 논문을 읽고 종합 분석하여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1977년에 크릭은 캘리포니아 라졸라에 있는 소크 생물학 연구소 연구원이 되었고 1994년에 소장이 되었다. 여기서 뇌와 인간 의식의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이후 캘리포니아 대학(샌디에이고) 생화학과 교수가 됐다.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The Dark Lady of DNA, Brenda Maddox 씀, 2002)'라는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전기가 발표됨에 따라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DNA 분자 연구에 미친 영향이 알려졌고, 당시 여성 과학자들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받았던 불공정한 처우들이 알려졌으며, 크릭과 왓슨은 프랭클린의 영광을 도둑질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왓슨은 인종차별 발언을 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게 되고, 크릭은 1973년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 미국, 물리학자), 레슬리 오르골(Leslie Eleazer Orgel FRS, 1927 ~ 2007, 영국, 화학자) 등과 같이 지구상의 생명은 지구외의 다른 외계 문명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구에 생명의 씨앗을 뿌렸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우고 외계의 우주공간에서 무기물이 유기물 분자로 합성될 수 있다는 정향 팬스퍼미아(정향 범종설 定向汎種說, Directed panspermia) 설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프랜시스 크릭과 그의 동료인 제임스 왓슨은 분자생물학, 생화학, 세포학, 유전학, 의학, 유전공학 등의 발전에 크나큰 업적을 남겼지만, 그들의 학자적 양심과 행동에 손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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