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병(beriberi)과 바이타민 B1(티아민)
김진국
각기병(beriberi)이라는 이름의 beriberi는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할 수 없어'를 의미하는 스리랑카 원주민의 언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각기병은 신경계, 피부, 근육, 소화기처럼 물질대사로 많은 에너지를 생성하여 사용하는 곳이 비타민 B1 결핍에 더욱 민감하여, 이들 기관을 중심으로 다양한 증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말초신경에 문제가 생겨 다리를 못 움직이고 심장이 영향을 받아 사망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각기병(다발 신경염)은 바이타민 B1(티아민) 결핍증으로 나타나는 병으로 백미(白米, 흰쌀, milled rice, White rice)를 주식으로 하는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며, 수 주일 간 백미만 먹을 경우 발생할 수 있다. 쌀에는 바이타민 B1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능성 양분이 쌀눈과 쌀겨(속겨, 겨층, 米糠, rice bran, 과피 종피와 호분층)에 있기 때문이다.
벼알의 겉껍질인 왕겨(粗糠 조강, chaff, hull, husk)를 벗겨내면 현미(玄米 일본어, 조미 糙米 중국어, unpolished rice)가 된다.
현미는 바깥쪽부터 과피(果皮, 외과피, 중과피, 내과피), 종피(種皮), 호분층(糊粉層) 등의 쌀겨층과 쌀알의 기부(基部)의 들어간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쌀눈(배, 胚)이 있으며 대부분을 차지하는 안쪽 부분은 배젖이다. 쌀눈은 새싹이 될 부분이고 배젖은 쌀눈이 싹틀 때 양분으로 쓰인다.
현미는 약간 푸르스름하거나 누르스름하므로 현미(玄米, unpolished rice)라 한다.
현미(玄米, unpolished rice)에서 외과피를 제거한 쌀을 멥쌀(갱미, 粳米)라 하고 겨층(쌀겨, 과피 종피와 호분층)을 모두 제거하고 남은 속 부분은 흰색이므로 백미(白米, 흰쌀, milled rice, White rice)라 한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평민들은 멥쌀(갱미, 粳米)을 주로 먹었다.
백미(白米, 흰쌀, milled rice, White rice)는 녹말과 섬유소가 대부분이고 바이타민 B1을 비롯한 기능성 양분은 거의 없다.
현미(玄米, unpolished rice)는 밥 짓기도 어렵고 밥도 퍼지지 않아 맛이 없다. 그래서 벼알에서 왕겨를 벗겨내고도 속살을 더 깎아내어 백미(白米)를 만든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의 밟는 힘으로 디딜방아로 찧어서 껍질을 벗겼지만 물레방아나 가축의 힘을 이용하기 쉬운 곳에서는 큰 맷돌과 같이 쌀알을 문질러서 표면을 깎아내는 것이다. 이것을 순우리말로 '쓿다'라고 하고 한자로는 도정(搗精), 영어로는 polishing이라 한다.
디딜방아의 방앗공이로 약하게 찧는 것보다는 도정을 하는 것이 쉽게 백미(白米)를 만들 수 있다.
옛날에 흰쌀(백미, 白米)을 주식으로 했던 동아시아에서 각기병이 많이 발생했다. 특히 가난하여 반찬도 없이 밥만 겨우 먹는 빈민이 이 병에 많이 걸렸다.
동아시아에서는 옛날부터 경험적으로 현미나 메밀 등의 잡곡, 특히 도정되지 않은 곡물을 먹으면 각기병이 낫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도정되지 않은 곡물의 씨눈에는 바이타민 B1을 비롯한 각종 바이타민과 영양소가 풍부하기 때문에 각기병에 효과가 있다.
일본의 에도 지역에서는 각기병에 걸리는 일이 많아 에도 병이라 불렸는데, 메밀로 만든 소바를 먹으면 각기병이 치료된다는 경험적인 처방까지 있었다. 실제로 소바에 사용하는 메밀가루는 메밀의 겉껍질을 제거하고 속껍질을 포함하여 만든 가루이므로 각종 바이타민이 풍부하다.
그러나 바이타민이 발견되기 전인 19세기 서구 의학에서는 각기병이 병원균에 의한 것인지 식중독인지 풍토병인지 논쟁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의 학계와 의사들, 군에서는 전통적 경험으로 나온 잡곡을 먹어 각기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과학이 아니라고 무시하였다. 더욱이 세균이 각기병의 원인이라는 서구의 가설을 추종함으로써 많은 혼란을 겪었다.
1878년 일본 군함에서는 너무나 많은 각기병 환자가 발생하여 3분의 1이 일을 할 수 없었다.
일본 해군의 군의 총감(군의관의 최고위직) 다카기 가네히로는 영국에 유학하였으므로 영국 수병들은 각기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과 일본 수병의 식사를 비교해 보았다.
일본 수병은 야채와 생선과 쌀밥을 먹고 있었다.
영국 수병은 쌀 대신 보리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 내에서도 장교의 발병은 드물고 사병의 발병은 많았는데 이 두 집단 간의 발병률의 차이도 식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카기 가네히로는 일본 수병에게 쌀밥과 함께 보리밥을 먹여 보았다.
그 결과 각기병이 발생하지 않았다.
1884년 원양 항해에 나선 연습함 쓰쿠바에서 빵과 양식을 포함한 식단 개선 실험을 하였는데, 사망자가 1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일본 해군은 식단을 혼분식과 양식 체계로 개선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는데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인도네시아에서 각기병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네덜란드는 식민지 정책 차원으로 1886년에 각기병의 원인을 조사하는 위원회를 인도네시아에 파견했다.
그때 유럽에서는 각기병의 원인이 세균에 의한 전염병이라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각기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찾기 위해 의사 크리스티안 에이크만(Christian Eijkman, 네덜란드, 1858 ~ 1930)을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파견했다. 그러나 에이크만은 자바 섬에서 각기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1896년 어느 날 병원에서 기르던 닭 여러 마리가 병든 것을 발견했다. 다발 신경염이라는 각기병에 걸린 것처럼 쇠약했다. 에이크만은 이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뻤다. 만일 닭에 다발 신경염(각기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각기병을 앓게 하는 세균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에이크만은 병든 닭의 몸에서 가능성이 높은 세균을 찾아서 건강한 닭에 주사하여 다발 신경염이 발생하는가를 실험해 보았다. 여러 번 실험해도 다발 신경염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그동안 병든 닭들이 모두 건강해지고 더 이상 병든 닭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 이상 세균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에이크만은 이 과정을 꼼꼼히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되어서 병든 닭이 모두 나아졌으며 더 이상 병든 닭이 나타나지 않는지를 조사해 보았다.
닭을 기르는 사람이 처음에는 입원 환자가 남긴 음식물을 먹이로 주었다. 거기에는 쌀밥(白米)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에이크만이 실험하는 중에 먹을 수 있는 흰쌀밥(白米)을 닭에게 주는 것이 아까워서 흰쌀밥 대신에 환자가 먹지 않는 현미(玄米, unpolished rice)로 바꾸어 주었다. 이렇게 실험 중에 닭의 먹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에이크만이 알아냈다. 그래서 에이크만은 닭의 병이 치료되고 더 이상 발병하지 않은 것은 먹이를 변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에이크만은 이 가설을 실험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건강한 닭 두어 마리를 백미(白米, 흰쌀)를 먹여 길렀다. 한참 있으니 닭들이 다발 신경염(각기병)에 걸렸다. 다음에는 병든 닭에게 현미를 먹였다. 병든 닭은 곧 건강을 회복했다.
이에 대해 에이크만은 흰쌀(白米)에는 병을 일으키는 독소가 존재하고 쌀겨에는 이 독소를 중화시키는 성분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1905년에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대학의 페켈하링(C. A. Pekelharing)은 인공 사료만을 가지고는 동물을 제대로 성장시킬 수 없으며, 이를 보완하는 필수 영양소가 우유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을 발표했다.
1906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홉킨스(Frederick Gowland Hopkins, 1861 ~ 1947)가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무기염류 이외에도 동물의 생존에 필요한 요소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부영양소라는 개념을 제창했다.
일본의 스즈키 우메타로(Suzuki Umetaro,1874 ~ 1943)는 크리스티안 에이크만(Christian Eijkman, 네덜란드, 1858 ~ 1930)이 닭에서 밝힌 유사 각기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1910년에 이를 예방 및 치료하는 성분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쌀겨에서 추출한 이 성분을 오리자닌(oryzanine, 바이타민 B1)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농업 화학자인 스즈키는 의사가 아니었으므로 사람을 대상으로 각기병에 대한 임상 실험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의사들은 각기병 원인을 세균에 의한 전염병이라고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었으므로 의사들의 협조를 얻기가 어려웠다.
1913년에 의사들에 의한 임상 시험이 시작되어 스즈키가 추출한 오리자닌(바이타민 B1)이 각기병의 치료물질임이 증명되었다.
미국의 화학자인 카지미르 풍크(폴란드 : Kazimierz Funk 카지미에시 푼크, 영 : Casimir Funk 캐지머 펑크, 1884 ~ 1967)는 1912년에 바이타민 가설을 주장하고, 각기병, 괴혈병, 펠라그라, 구루병 등이 특정한 필수 영양소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각기병 예방 물질(바이타민 B1)을 완전하게 분리해 내지는 못하였으나 아민(amine)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다른 필수 영양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여 그것에 바이타민(vitamine, '생사에 관련된'이란 뜻을 가진 vita-와 아민의 합성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후의 연구에 의해서 바이타민 B1을 제외한 나머지 바이타민이 아민(amine)을 함유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바이타민(vitamin, vitamine에서 e를 제외함)이라는 말은 계속 쓰이고 있다.
그 후 비타민 B1은 유황을 함유하고 있는 비타민이라는 의미에서 'thi(o + vit) amin', 즉 thiamin(티아민)이라는 화학명이 되었다.
1927년 B. C. P. Jansen(잔센)이 쌀겨에서 바이타민 B1 결정을 분리, 1936년 미국의 R. R. Williams, 영국의 A. R. Todd, G. Barger, 독일의 A. Windaus, H. Andersag 등이 구조를 결정하고, 합성, 양산하였다.
비타민 B1(티아민, thiamin)의 분자식은 C12H17N4OSCl이며 분자구조는 가운데 위치한 탄소에 질소가 함유된 육각형의 환(pyrimidine)과 황이 함유된 오각형의 환(thiazole)이 메틸렌 다리(methylene bridge)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네덜란드의 생리학자인 크리스티안 에이크만(Christian Eijkman, 네덜란드, 1858 ~ 1930)과 1901년에 트립토판(tryptophan, 아미노산)을 분리하고 부영양소 개념을 제창한 영국의 프레드릭 홉킨스(Frederick Gowland Hopkins, 1861 ~ 1947)가 바이타민을 연구한 공로로 1929년에 공동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각기병은 바이타민 B1의 결핍으로 나타나지만 야맹증과 안건조증 등은 바이타민 A의 결핍, 결합조직의 이상으로 모세혈관이 파괴되어 출혈이 일어나는 괴혈병은 바이타민 C의 결핍, 뼈의 이상이 일어나는 구루병과 골연화증은 바이타민 D의 결핍으로 발병한다.
이외에도 바이타민 B2(리보플래빈, riboflavin)의 결핍으로 구각염(口角炎, commissural cheilitis), 구순염, 설염 등이 발생하고, 피부에는 홍반이 생기고 신경장애와 위장장애가 나타나는 펠라그라(pellagra)는 니코틴산(nicotinic acid, 니아신, 바이타민 B3)의 결핍, 바이타민 B6(피리독신, pyridoxine, PN)의 결핍에 의한 피부염, 바이타민 F(linnoleic acid, ℒ-linolenic acid 등)의 결핍으로 인한 불임증, 간에서 프로트롬빈(prothrombin) 생성에 관계하는 바이타민 K(K1, phylloquinone, 필로퀴논, K2, menaquinone, 메나퀴논)의 결핍으로 혈액응고가 되지 않아 일어나는 출혈 증상, 바이타민 L(anthranilic acid)의 결핍에 의한 젖 분비 장애 등이 있다.
각기병(beriberi)과 바이타민B1(티아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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