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문명(ancient civilization)
현생 인류(Homo sapiens)의 아프리카 기원설(Recent African origin of modern humans)에 따르면 3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하이델베르크인(Homo heidelbergensis 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으로부터 발생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약 200,000 ~ 70,000년 전에 아프리카의 기후변화로 초원이 생성되어 외부로 나가는 길이 열림에 따라 아프리카를 떠나(Out of Africa routes) 일찍이 유럽으로 일부 이동하였고 이어서 남부 경로(Southern Route), 유럽경로(European Route), 아시아 경로(Asian Route)로 이동하여 확산하였다.
이들은 약 65,000 ~ 50,000년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도달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유럽과 아시아로도 확산하였다.
그리고 크로마뇽인(Cro-Magnon)은 현생 인류의 초기 형태이며 학명도 현생인류와 같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다.
아프리카에서 일부 하이델베르크인(Homo heidelbergensis 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이 기후변화로 초원길이 열림에 따라 35만 년 전 유럽으로 이주하여, 추운 기후에 적응하며 약 23만년 전에 출현하여 세계에 확산되어있던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는 구석기 후기(Paleolithic, 약 4만 년 전)에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와 혼혈되고 사라졌다.
이렇게 확산된 인류는 수렵, 채집, 유목 생활에서 농경사회로 정착하면서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문명의 발전은 다양하고 풍부한 식량 생산을 통해 이룩되었다,
이를 위해 물과 비옥한 토양 및 기후, 우수한 종자, 그리고 사육할 수 있는 온순하고 다재다능한 가축 등이 필요하였다.
풍부한 물, 넓은 평야, 따듯한 온대 기후 등 자연환경이 좋은 곳에 사람이 많이 모여 큰 집단을 이루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생활하는 곳에서 새로운 도구 제작, 기술, 발명 등 혁신이 빨리 일어났다.
작은 집단에서 이런 혁신이 일어난 곳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큰 집단이 되었다.
집단과 집단 간에 일어나는 발명과 혁신의 전파보다는 집단 내의 전파가 더 빠르며 그리고 집단의 발전과 전진은 전파된 것을 발판으로 일어날 것이므로 큰 집단의 발전 속도가 작은 집단보다는 빠른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 큰 집단이 되면 이들을 조직하여 큰 일을 하는 체제가 생겨 성곽, 궁궐, 수로, 도시 계획 등의 큰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조직된 체계가 보다 강력하고 개방적이며 효율적이라면 사람이 많이 모인 집단에서 다방면의 혁신이 일어나 문명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사회는 지배 계급과 관료주의가 발전하여 국가가 성립된다.
세계 어디에서나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에서는 사람이 살았지만 자연환경이 좋아 사람이 많이 모여 큰 집단을 이룬 곳에서 문명이 먼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고대 문명(ancient civilization)은 '원시문명(pristine civilization)'이라고 하며 외부의 영향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발전한 문명을 말하며, 다른 문명의 파생물이 아닌 문명으로서 원시 시대 이후 발전된 국가의 발전, 사회 계층화, 도시화, 그리고 의사소통 체계(문자 체계와 그림 문자)를 가진 복잡한 사회이다.
일찍이 서유럽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이집트 문명(나일강), 인도 문명(인더스강, 갠지스강) 등의 고대 문명을 연구하여 문명의 요람(cradle of civilization)이라 하였다.
문명의 요람(cradle of civilization)이란 다른 지역의 문명과 달리 독립적으로 문명이 발전한 장소이자 문화이다.
서유럽학자들이 연구하여 문명의 요람(cradle of civilization)을 발표하자 이에 반박하여 중국 청나라 말기 자강운동 사상가이자 중화민국의 정치인이었던 량치차오(梁啓超, Liang Qichao, 1873 ~ 1929, 사상가, 개혁가, 언론인)가 자신의 저서 '20세기 태평양가(二十世紀太平洋歌, 1900)'에서 4대 문명이 황하강 유역 등 4곳에서 번성하였다고 언급한 이후 일본의 고고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Egami Namio, 1906 ~ 2002, 역사학자,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騎馬民族征服王朝說) 등이 이를 사용하면서 동양 3국에 4대 문명이란 용어가 생겼다.
고대 문명의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도 문명(인더스 문명), 중국 문명(황하 문명),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 중미, 마야) 문명, 안데스(잉카) 문명이 인정을 받고 있으며 그 외에도 튀르키예의 샨르우르파(Şanlıurfa)에 있는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는 BC 9,500 ~ BC 8,000년경(신석기 초기)의 유적지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대 석조 신전(Temple Complex)이다.
신전의 높이는 15m이며 직경은 300m 정도로 해발고도 760m 지점에 T자형 거석 기둥(Megalithic Pillars)이 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남동부 마스빙고(Masvingo) 인근에 약 11세기 ~ 15세기경에 쇼나(Shona)족이 건설한 짐바브웨 왕국(Zimbabwe Kingdom)의 수도에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 유적이 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는 아프리카 남부에서 가장 위대한 고대 석조 도시이며 지름 약 250m, 높이 최대 11m의 타원형 석벽의 대울타리(Great Enclosure)와 그 내부에 원형 탑(Conical Tower)이 있다.
이 유적지에서 중국 자기(磁器, Porcelain), 페르시아 유리, 아라비아 동전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11 ~ 15세기 스와힐리 문명(Swahili Civilization, 인도양 해안의 도시국가들)의 동아프리카 해상 교역망과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BC 2000년경 문명 발상지 인구 추정(전 세계 총인구 약 2천만 ~ 3천만 명)
A. 서아시아(메소포타미아 등), 약 400만 명
B. 이집트, 약 200만 명
C. 인더스, 약 300만 명
D. 중국(황하), 약 300만 명
E. 중남미(당시 문명 초기), 약 100만 명 이하
1. 고대 문명의 발생
인류는 구석기시대(약 80만 년 전 ~ BC 3000)의 채집 경제로부터 신석기시대(BC 15000 ~ BC 6000년경 시작)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생산 경제로 발전하였다.
농경사회로 정착하여 수천, 수만 명이 집단을 이루었다.
이런 정주 문화(定住文化, 定居文化, Settled Culture)의 가장 초기 징후는 기원전 12,000년경에 나투프 문화(Natufian culture, 레반트 지역, 약 BC 13,000 ~ BC 9,500년경, 중석기 시대, 농경 이전 정착 생활, 준 정착 생활)가 발생한 레반트 지역에서 찾을 수 있으며 BC 10,000년경에는 농업 사회로 발전했다.
수천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최초의 원시 도시 정착지는 후기 신석기시대(Pottery Neolithic)인 BC 6500년 경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 제임스 헨리 브리스트드 James Henry Breasted가 사용, 미국 고고학자, 1916년경)에서 시작되었다.
후기 신석기시대(Pottery Neolithic)에는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와 질그릇(토기)을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 당시에 토기를 사용하는 특징을 가진 할라프 문화(Halafian culture, BC 6000년 ~ BC 5000년경, 튀르키예, 시리아, 아시리아)와 이어서 우바이드 문화(Ubaid culture, BC 5300 ~ BC 4000년경, 남메소포타미아, 우바이드)가 등장했다.
동기시대(銅器時代, Copper Age)는 BC 4500년 전에 시작되었고 엘람(Elam)의 수사(Susa, BC 약 4200년경 ~ 페르시아 제국 시대까지, 엘람의 수도, 이란 남서부), 에리두(Eridu, BC 3800 ~ BC 3100, 이라크 남부) 등이 있으며 청동기 시대(靑銅器時代, Bronze Age, 수메르 문명-남부, 아시리아-북부)는 BC 3500년 경에 시작되었으며 이때 우루크(Uruk, BC 3800 ~ BC 3100), 우르(Ur, BC 2900 ~ 2350), 키시(Kish, BC 2900 ~ 2350) 등은 수만 명의 도시를 이루었고 기원전 31세기에 이집트의 도시 멤피스(Memphis, 메네스 Menes 왕이 약 BC 3100년경 상(上), 하(下)이집트를 통일한 후 세운 도시)가 시작되었으며 철기시대(鐵器時代, Iron Age, 북부 - 아시리아, 신아시리아 제국 Neo-Assyria, 중부·남부 - 바빌로니아, 신바빌로니아 제국, Neo-Babylon)는 BC 1200 ~ BC 600년 경에 시작되었다.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James Henry Brestead, 1865 ∼ 1935, 미국)는 서아시아의 고대 문명 발생지를 발굴하고 그 지역(이라크,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 시리아, 쿠웨이트 북부, 터키 남동부, 이란 서부)을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라고 애칭 하였다.
* 문명(文明, civilisation)과 문화(文化, culture)
문명(文明, civilization)의 개념은 과학기술이나 물질적인 가치를 나타내고 문화(文化, culture)는 정신적인 가치를 나타낸다고 알려져 왔다. 그 후 문명(文明, civilization)과 문화(文化, culture)는 같은 의미의 용어라고 하였다.
문명(civilisation)이란 용어는 ‘인간의 지혜로 인하여 사회가 정신적, 물질적으로 진보된 상태’를 의미하며 이 용어는 미라보우 후작(Marquis de Mirabeau, 1715 ~ 1789, 프랑스 중농주의 경제학자)이 그의 저서 인류의 친구(L'Ami des hommes, 1756)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문명(civilisation)은 라틴어 키비스(civis, 시민)나 키빌리타스(civilitas, 도시)에서 유래하였으며 사회집단, 사회 구조, 문화, 기술, 예술, 종교, 철학, 가치관뿐만 아니라 이들의 발달 상태와 발달 과정, 다른 문명에 미치는 영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나 근대의 도시생활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용어이다.
문화(culture)라는 용어는 고대 로마의 웅변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 ~ BC 43, 로마의 정치인, 변호사, 작가)가 그의 저서 투스쿨라나에 논쟁(Tusculanae Disputationes, 투스쿨라나에 디스투타시오네스, BC 45)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경작이나 재배 등을 뜻하는 라틴어(cultus)에서 유래했으며 인간 사회에서 발견되는 사회적 행동, 제도, 규범뿐만 아니라 이러한 집단에 속한 개인의 지식, 신념, 예술, 법률, 관습, 능력, 태도, 습관을 포괄한다.
문화는 전통과 개별성을 강조하고 과거 지향적인 개념인 반면에 문명은 인류의 진보와 이성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미래 지형적인 개념이며 18세기 서유럽에서 문명은 선진국인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문화는 후발국인 독일, 폴란드, 러시아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의 개념은 과학기술이나 물질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문명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문화라는 개념은 독일에서 일본에 보급된 통념이며 프랑스에서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종합한 보다 높은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 문명이다.
2. 고대 문명의 발상지
가. 메소포타미아 문명(Mesopotamian Civilization)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그리스어로 ‘두 강 사이’라는 뜻으로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유역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Mesopotamian Civilization)은 기원전 4000년경부터 기원전 400년경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Alexander III of Macedon, BC 356 ~ BC 323)에게 점령당할 때까지의 우루크(Uruk), 니푸르(Nippur), 니네베(Nineveh), 바빌론(Babylon) 등의 도시와 아카드 왕국(Akkadian Empire), 우르 제3 왕조(Third Dynasty of Ur), 아시리아 제국(Assyrian Empire) 등을 포함한다.
1) 수메르 문명(Sumerian Civilization, 약 BC 4500 ~ BC 1900)
수메르(Sumer,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지방, 이라크 남부) 지방에서는 풍부한 강물이 흐르고 강물의 범람으로 비옥한 충적토가 생성되었다.
BC 5500 ~ BC 4000년경 수메르인(Sumerians)이 정착하였다(수메르인이 토착민인지 이주민인지 알려지지 않았음, 농경정착민, 셈족이 아니라고 함).
제방을 설치하고 큰 저수지를 만들어 곡물과 견과류 등 과실을 풍부하게 생산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의 에리두(Eridu, 이라크 남부)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우바이드 시대(Ubaid Period, BC 5900 ~ BC 4000)는 수메르 문명의 전단계이다.
가) 도시국가 시대(City-State Period, 약 BC 4000 ~ BC 2900)
도시국가 시대는 국가의 출현 이전 단계로 도시 중심 사회이며 각 도시가 독립된 신전 중심 공동체로 왕이 아닌 신전 사제(temple priest)가 지도자였다.
도시 간에는 느슨한 연맹 또는 경쟁관계였다.
(1) 우루크 시대(Uruk Period, 약 BC 4000 ~ BC 3100)
남메소포타미아(이라크 남부) 지역이며 우루크(Uruk), 우르(Ur), 에리두(Eridu), 라가시(Lagash) 등 수메르인(Sumerians)이 세운 대표도시이다.
수메르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문자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원전 약 3400년경(수메르 초기 문명, 우루크 시대)에 점토판(Clay Tablet)에 갈대촉(Stylus)을 사용하여 쐐기 모양(△, ▪)으로 표기한 설형문자(楔形文字, 楔 쐐기 설, 쐐기 문자, Cuneiform, cuneus = 쐐기, 점토판에 글자를 새길 때 파여진 홈의 모양이 삼각형의 쐐기 모양)를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그림문자(Pictograph)로 시작하여 점점 추상화·기호화하여 쐐기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곡물, 가축, 토지 등의 행정, 회계와 법전, 문학, 역사, 천문, 점성술 등을 기록하였다.
점토판(clay tablet)에 설형문자로 새겨진 문학으로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 우르크의 전설적 왕 길가메시의 영웅적 모험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그린 서사시)가 있다.
수학에서는 60진법(sexagesimal system), 역법(曆法, calendar system)으로는 태음력(Lunar calendar)을 사용하였다.
우루크에는 이난나(Inanna, 사랑, 성, 전쟁, 권력의 여신), 니푸르에는 엔릴(Enlil, 공기·바람·폭풍의 신, 권력과 질서의 수호자)과 같이 도시마다 수호신이 존재했다.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는 모두 운하망으로 연결되었으며 수메르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교역하며 상업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2) 젬데트 나스르 시대(Jemdet Nasr Period, BC 3100 ~ BC 2900)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수메르 지역에 우루크 시대보다 도시 규모가 조금 작은 행정 중심 도시 형태이다.
우루크 시대에서 초기 왕조 시대로 넘어가는 수메르 문명 발전의 과도기이며 문자, 행정, 도시국가 조직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나) 초기 왕조 시대(Early Dynastic Period, 약 BC 2900 ~ BC 2350)
초기 왕조 시대는 도시국가들이 주변의 농촌까지 병합하고 발전하여 도시마다 독립된 왕(Lugal)이 존재하였으며 수메르 지역에 우루크(Uruk, BC 4000년경 ~ BC 2334년, 최초의 진정한 대도시, 이라크 와르카 Warka 지역), 우르(Ur, BC 3800년경 ~ BC 6세기경, 이라크 디카르 주 텔 엘-무카이야르 지역), 라가시(Lagash, BC 2900년경 ~ BC 2334년, 왕권이 신권적·행정적 성격, 점토판 3만 개 이상 발견, 라가시의 종교적 수도인 기르수 Girsu, 텔 알-히바 Tell al-Hiba 지역), 나푸르(Nippur, BC 5,000년경 ~ AD 800년경, 수메르 신들의 왕 엔릴 Enlil을 모시는 성소 '에쿠르 Ekur'가 있어 영적 중심지, BC 2,000년경의 사원 도서관, 우르-남무 왕이 건설한 거대한 지구라트, 이라크 알카디시야주 지역), 카시(Kish, BC 3000년경 ~ BC 2660년경 우루크 제1왕조의 왕 길가메시에게 멸망, “도시국가 패권” 개념의 시초, 최초 왕조의 수도, 전설의 초대왕 에탄나(Etana), “키시의 왕”이라는 칭호는 실제 지배 여부와 무관하게 패권의 상징적 칭호, 이라크 바빌 주 지역), 움마(Umma, 초기왕조 ~ 우르 3왕조, 라가시와 국경 분쟁, BC 24세기 루갈자게시 Lugal-Zage-Si 왕, 슐기 왕의 움마 달력, 샤라 Šara의 에샤게파다 신전, 이라크 디카르 주 지역), 아다브(Adab, BC 30세기 ~ BC 20 세기 중반, 루갈 달루 Lugal-dalu 조각상이 대표적인 유물, 비스미야 지역), 에리두(Eridu, BC 5400년경 ~ BC 600년, 최초의 도시, 압주의 신전에 주신 엔키 Enki를 모시는 성지, 이라크 디카르주 지역), 쉬루팍(Shuruppak, BC 약 3000년경 ~ BC 2000년경, 곡물 저장 및 유통의 핵심 도시, 대홍수 전설의 배경, 이라크의 '텔 파라 Tell Fara' 유적지) 등의 도시국가(city-states)들이 형성되어 독립 국가로 분리되었으며 도시국가 간에는 전쟁과 정복을 통한 패권 경쟁관계였다.
사회 구조는 왕과 귀족(Kings & nobles, 성직자(Priests), 상인·장인(Merchants & artisans), 농민(Farmers), 노예(Slaves)로 계층화되었고 신전 중심 경제이며 종교 권력과 왕권이 결합되었다.
농업은 관개 시설을 이용하여 보리 중심으로 밀, 콩 등을 경작하였으며 도자기, 금속, 방직, 목공 등의 산업이 발달하여 인더스 문명과 교역하였다.
기원전 25세기경 수메르 남부에서 일어난 움마-라가시 전쟁((Umma–Lagash War, 세계 최초로 기록된 영토 전쟁) 등 도시 간에 전쟁이 빈번하였다.
최초 도시국가인 우루크(Uruk)에는 지구라트(ziggurats, 계단식 신전탑, temple tower) 유적이 있다.
우르(Ur)는 상업의 중심지이고 왕 무덤(Royal tombs)이 출토되었고 라가시(Lagash)는 정치·행정의 중심이었고 행정 점토판과 라가시 석비(Lagash stelae, 왕과 신에게 바친 기념석, 라가시와 움마 전쟁, 법과 조세 의무, 비석)가 출토되었다.
니푸르(Nippur)는 종교 중심지로 엔릴(Enlil, 공기·바람·폭풍의 신, 권력과 질서의 수호자) 신을 숭배했다.
BC 2300년경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에 살던 셈족(Semites, Semitic peoples, 유목민) 계통의 아카드인(Akkadians, 페니키아계)이 남하하여 아카드 지방(바그다드 남쪽의 남부 이라크 지역)에 아카드 제국(Akkadian Empire, BC 2334 ~ BC 2154)을 세우고 수메르인(Sumerians)을 정복하였다.
다) 아카드 제국(Akkadian Empire, BC 2334 ~ BC 2154)
아카드 제국의 창시자 사르곤 대왕(Sargon of Akkad, Sargon the Great, 재위 BC 2334 ~ BC 2279, 셈족 페니키아계)은 젊은 시절 도시국가 키시(Kish)의 왕 우르-자바바(Ur-Zababa)의 술 시중 관리(cup-bearer)였다.
우르-자바바는 사르곤이 권력자가 될 것이라는 징조가 나타나자 두려워서 죽이기 위해 사르곤을 강력한 도시국가 우르크(Uruk)의 왕 루갈자게시(Lugalzagesi, 재위 BC 24세기 말 ~ BC 2350년경)에게 보냈으나 사르곤은 살아서 돌아와 반란을 일으켜 키시를 차지하고 우르크의 루갈자게시와 전투을 벌여서는 포로로 잡아 우르(UR) 성문(엔릴의 문) 앞에서 조롱하였다.
이어서 수메르 도시 국가들을 정복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사이, 이라크)에 다민족 국가로 처음으로 통일된 제국을 세웠으며 수도를 아카드(Akkad)로 정하고 아시리아 등 여러 초기 도시국가를 지배하였다.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채택하고 지방에 총독(ensi)을 파견하여 통치했으며 정복 전쟁을 하기 위해 상비군을 창설하여 계속 유지했다.
수메르 문화를 계승하였고 아카드어 사용이 확산되었으며 이후 바빌로니아어·아시리아어가 사용되어 점토판(clay tablet)에 쐐기문자(Cuneiform)로 기록하였다.
아시리아 등 아카드 제국은 쐐기 문자를 소아시아(Anatolia, 아나톨리아, 튀르키예)와 레반트(Levant,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에 전파하였으며 조세와 교역에 은·동·곡물 등을 사용하였다.
아카드 제국은 내부적 혼란과 가뭄과 같은 환경적 요인으로 약화되었으며 이에 BC 2154년 구티족(Guti, 이란 서부와 이라크 동북부 경계 지역의 산악계 민족, 쿠르드족으로 추정)의 침입으로 멸망했으며 구티족(Guti)은 구티움(Gutium, The Gutian dynasty, 구티 왕조 BC 2150 ~ BC 2119)을 세워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지배했다.
라) 우르 제3왕조(Third Dynasty of Ur, 약 BC 2112 ~ bC 2004)
수메르의 최후의 국가는 초기 왕조 시대(Early Dynastic Period, 약 BC 2900 ~ BC 2334, 수메르 도시국가가 발달하던 시기)와 구티움(Gutium, BC 22세기 후반 ~ BC 21세기 초, 이란 서부 고원)이 침입하여 지배한 혼란기에 우르(Ur)의 왕 우르남무(Ur-Nammu, 재위 BC 2112 ~ BC 2095)가 수메르를 재통합하여 세운 우르(Ur) 제3왕조(Third Dynasty of Ur, 약 BC 2112 ~ BC 2004)이다. 우르(Ur) 제3왕조는 수메르인들이 세운 최후의 패권국인 신 수메르 제국(Neo-Sumerian Empire)이다.
우르(Ur)가 수도이며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이다.
제3왕조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수메르 문명의 전통을 계승하고 행정과 법률을 체계화하였으며 왕을 신권적 군주로 강조하고(왕을 신격화하여 아마르신 Amar-Sin이라 함) 도시마다 총독(ensí)을 파견하여 관료제를 확립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법전 중 하나인 우르남무 법전(Ur-Nammu Law Code)을 제정하여 재산권, 결혼, 범죄 관련 규정을 하였으며 이 법전을 수메르어와 설형문자(Cuneiform)로 기록한 점토판(clay tablet)이 남아있다.
신전 중심의 도시로 엔릴(Enlil, 공기·바람·폭풍의 신, 권력과 질서의 수호자)과 난나(Nanna, 달의 신 Moon God, 우르 도시의 수호신)를 숭배하였다.
우르 3왕조는 중앙집권 체제였기 때문에 문서 기록 체계가 가장 발달된 수준으로 기록물이 정밀하고 방대했다.
점토판(clay tablet)에 갈대촉(Stylus)을 이용한 설형문자(Cuneiform)로 경제, 행정, 문학 등을 수메르어(Sumerian)로 기록하고 이 점토판(clay tablet)을 건조와 굽기 과정을 거쳐 보존하였다.
유적으로 지구라트(ziggurats, 계단식 신전탑, temple tower)인 우르 대지구라트(Ziggurat of Ur)가 남아 있다.
우르 대지구라트는 기원전 약 21세기경에 우르남무(Ur-Nammu) 왕이 건설을 시작하여 아들인 슐기(Shulgi)가 완성하였고 난나(Nanna, 수메르의 달의 신, 아카드어로는 신(Sîn))을 봉헌하였으며 종교 중심지이자 왕권의 신성함을 상징하였다.
우르 대지구라트의 구조는 3단 계단식 지구라트이고 기단 크기는 약 64m × 46m이며 원래 높이는 약 30m 이상으로 추정된다.
중앙과 양쪽에 3개의 대형 계단이 정상으로 이어지고 꼭대기에 신전(사원)이 있었다.
내부는 흙벽돌로 쌓았고 외부는 구운 벽돌로 쌓고 역청(아스팔트)으로 방수하였다.
신과 인간을 잇는 상징적 산으로 제의 용이었으며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었다.
우르 대지구라트는 지구라트 건축의 전형이다.
BC 2004년 엘람(Elamites, 메소포타미아 동쪽 이란 남서부에 있던 고대 문명으로 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와 함께 서아시아 4대 고대 문명권 중 하나, 엘람을 세운 인종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음)이 침입하여 수도가 함락되고 북방 아모리인(Amorites, 시리아와 유프라테스 상류의 반유목민, 셈족)의 침입으로 우르가 함락되어 멸망했다.
우르 제3왕국이 멸망하자 수메르 지역은 이신 왕조(Isin Dynasty, BC 2017 ~ BC 1794), 라르사 왕조(Larsa Dynasty, BC 1961 ~ BC 1763), 제1바빌로니아 왕조(Old Babylonian Kingdom, BC 1894 ~ BC 1595, 셈족의 아모리인) 등으로 분열되어 혼란에 빠졌다.
우르 제3왕조의 관리였던 이슈비-에라(Ishbi-Erra)가 BC 2017년 엘람 세력을 몰아내고 남부 도시 이신(Isin)을 중심으로 이신(Isin) 왕조(BC 2017 ~ BC 1794)를 세워 우르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나 BC 1794년경 엘람의 지원을 받은 라르사 왕조(Larsa Dynasty, 약 BC 2025 ~ BC 1763)의 왕 리므-신(Rim-Sin, 재위 BC 1822~1763)이 이신 왕조을 정복하였다.
이어서 BC 1763년경 고(古) 바빌로니아 왕국(Babylonia, 제1 바빌로니아 왕조, BC 1900 ~ BC 1600)의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 ~ BC 1750)가 라르사를 정복하면서 수메르 지역은 바빌로니아 왕국에 통합되었다.
2) 바빌로니아
바빌론(Bablu, Babilani)은 BC 24세기 ~ BC 20세기경 아카드 제국과 수메르 도시들 사이에 있었던 작은 도시국가였다.
가) 고(古) 바빌로니아 왕국(Babylonia, 제1 바빌로니아 왕조, BC 1900 ~ BC 1600)
기원전 19세기경 아모리인(Amorite, 셈족 계통, 시리아와 유프라테스 상류의 반유목민) 계통의 부족이 유프라테스강 서부 지역(이란)에서 이동하여 유프라테스강 중류 지역(이라크 남부 지역)의 바빌론 지역에 정착하였다.
약 BC 1894경 수무-아부(Sumu-abum, 재위 약 BC 1894 ~ BC 1881)가 여러 수메르·아카드 도시국가를 차례로 병합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바빌론(Babylon)을 수도로 하는 고(古) 바빌로니아 왕국(Babylonia)을 세웠다.
바빌로니아 왕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 ~ BC 1750)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을 통일하여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행정과 법률, 종교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적 왕권을 강화하였다.
인류 최초의 성문법(成文法) 중 하나인 함무라비 법전(Hammurabi’s Code)을 제정하였다.
함무라비 법전은 아카드어로 쐐기문자로 기록되었고 약 282조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법(lex talionis)이 있으며 귀족, 평민, 노예의 신분에 따라 형벌이 달랐다.
다신교로 신전 중심의 도시 행정을 하였고 주신(主神)은 마르둑(Marduk)으로 바빌론의 수호신이었다.
60진법, 역법(曆法, calendar system)으로는 태음력(Lunar calendar), 천문 관찰 등이 발전되었고 농업은 관개 시설이 발달되었으며 은(銀)을 단위로 한 교환경제생활을 하였다.
함무라비 사후 왕권이 약화되면서 지방 반란이 증가하고 약 BC 1595년에는 철기와 청동기로 무장한 히타이트 제국(Hittite, Anatolia, 하티인 Hattians을 흡수한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 군의 침입으로 바빌론이 약탈당하여 멸망하였다.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인 하투샤(Hattusa)가 위치한 아나톨리아 중부 고원은 바람이 강하게 부는 지형적 특성을 갖고 있어 풀무가 없던 때에 고원의 바람을 용광로에 이용하여 고온을 만들어 철과 청동 제련에 활용하였던 것이다.
이후 바빌론이 망한 지역에 카시트(Kassite)족이 들어와 카시트 왕조(중기 바빌로니아)를 세웠다.
나) 카시트 왕조(Kassite Dynasty, 중기 바빌로니아, Middle Babylonian Period, BC 약 1595 ~ BC 1155)
BC 1595년 히타이트 제국(Hittite Empire, BC 18세기 ~ BC 12세기, 아나톨리아, 튀르키예 중심부, 수도 하투샤 Hattusa, 인도유럽계 민족)이 바빌로니아를 침입하여 약탈하고 물러간 후 바빌로니아가 혼란한 시기(BC 1650 ~ BC 1595)에 카시트족의 가쉬틸리아시 1세(Gandaš, Gashtiliaš I)가 바빌론을 장악했다.
카시트족은 이란 서부 자그로스 산맥 지역의 산악민족이다.
카시트 왕조는 바빌로니아 행정을 계승하고 지방 총독을 파견하하였으며 수메르-아카드 전통의 계승자 역할을 하였다.
토지 분배 제도(쿠두루, kudurru, 경계석, 토지 기증 기록석)를 통해 귀족에게 토지를 하사하였다.
카시트 왕조는 아시리아 제국의 부상((浮上)과 엘람(Elam, BC 3200 ~ BC 539, 이란 서남부 지역에 위치한 고대 문명)의 침입으로 약화되었으며 엘람 왕 슈트루크-나훈테(Shutruk-Nahhunte, 재위 BC 1184 ~ BC 1155)가 침입하여 바빌론을 함락(BC 1155)시켰다.
3) 아시리아(앗시리아, BC 2450 ~ BC 609, 전·중기 청동기 ~ 후기 철기 시대)
초기 아시리아(Early Assyria, BC 2500 ~ BC 2025), 구(古)아시리아 왕국(Old Assyrian Kingdom, BC 2025 ~ BC 1378), 중아시리아 제국(Middle Assyrian Empire, BC 1392 ~ BC 934),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 ~ BC 605)으로 구분한다.
가) 초기 아시리아(Early Assyria, BC 2500 ~ BC 2025)
아시리아는 BC 2500년 경에 수메르인에 의해 티그리스강 중류 북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도시국가 형태의 초기 아시리아(Early Assyria, BC 2500 ~ BC 2025)가 아슈르(Ashur, 수도)에 세워졌다.
중심 도시는 아슈르(Ashur), 니네베(Nineveh), 아르벨라(Arbela) 등이고 수메르·아카드 문명과 교류하며 성장하였고 정치 형태는 통일된 왕국이 아닌 여러 도시국가로 구성된 상업 중심의 지역 세력이었으며 아카드(셈족) 등의 지배하에 있었다.
지리적으로 티그리스강 중류의 교통 요지에 위치하여 메소포타미아 남부–소아시아–시리아–이란 고원을 연결하는 무역 중심지로 상인들은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아갔다.
나) 구(古)아시리아 왕국(Old Assyrian Kingdom, BC 2025 ~ BC 1378)
BC 2025년 우르 제3왕조로부터 독립하여 작은 도시 국가 형태의 구(古)아시리아(Old Assyria)가 건설되었다. 구(古)아시리아는 일시적으로 고(古) 바빌로니아(Babylonia, BC 1895 ~ BC 1595, Semite Amorite 셈계 아모리인)의 함무라비 왕의 지배를 받았다.
BC 1430년경 구(古)아시리아는 미탄니 왕국(Mitanni Kingdom, 후르리인 Hurrians, 청동기 후기인 BC 16 ~ BC 13세기에 시리아, 아나톨리아 동남부, 이라크 북부를 지배한 강대국,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지배를 받았다.
고(古) 아시리아는 아슈르(Assur)를 중심 도시로 하여 소아시아 지역 카파도키아의 한카룻-카니쉬(Kanesh)를 대표 무역지로 삼아 교역했다는 점토판 기록인 “아시리아 무역 식민지(karum)”가 있다.
교역 품목은 직물(양모), 주석, 은, 금, 구리 등이었다.
아시리아 상인들은 무역로를 따라 여러 지역에 카룸(karum)을 세우고 다양한 무역에 참여하며 아시리아 문화와 영향력을 확장했다.
다) 중아시리아 제국(Middle Assyrian Empire, BC 1392 ~ BC 934)
구(古)아시리아는 BC 14세기 히타이트 제국(Hittite Empire, BC 1650 ~ BC 1500, BC 18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북중부의 수도인 하투샤 Hattusa를 중심으로 형성)이 미탄니 왕국(Mitanni Kingdom, BC 1500 ~ BC 1300년, 이라크 북서부)과 전쟁에서 승리하여 레반트(Levant,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의 패권을 차지할 때 패배한 미탄니 왕국으로부터 아슈르-우발리트 1세(Ashur-uballit I, 재위 약 BC 1365 ~ BC 1330)에 의해 독립하여 BC 1392년 영토를 가진 중기 아시리아 제국(BC 1392 ~ BC 934, 북부 메소포타미아)이 세워졌다. 중기 아시리아 제국은 제국의 기틀을 확립하고 주변국에 대한 패권을 확보하였다.
틸글랏필레세르 1세 (Tiglath-Pileser I, 재위 BC 1114 ~ BC 1076)는 중 아시리아를 강력한 군사국가로 부흥시켜 영토를 시리아, 아나톨리아(튀르키예 동부), 바빌로니아 북부까지 확장하였다.
아시리아는 자그로스 산맥부터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주요 교역로를 확보하고 통제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무역 활동뿐만 아니라 세력권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중아시리아 제국은 형성기인 고아시리아 왕국과 전성기인 신아시리아 제국 사이의 과도기이며 쇠퇴기이다.
라)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 ~ BC 605)
신아시리아 제국(BC 911 ~ BC 605)은 아슈르바니팔 왕 (Ashurbanipal, 재위 BC 668 ~ BC 627) 때에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체와 서쪽으로는 시리아·팔레스타인, 동쪽으로는 엘람, 남쪽으로는 바빌로니아(남부메소포타미아), 이집트(BC 664), 아나톨리아까지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수도 니네베, Nineveh, 이라크 북부 모술 Mosul 근처).
신아시리아 제국은 정복 지역에서 조공과 자원 수탈로 부를 쌓고 무역을 국가 주도형으로 바꾸고 왕의 길(도로망)을 통해 니네베를 중심으로 국제 교역이 활발(특히 지중해–페르시아만 노선)히 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신아시리아 제국은 철기 시대를 앞당긴 히타이트 제국(Hittite Empire, 약 BC 17세기 ~ BC 12세기, 수도 하투사 Ḫattuša, Anatolia 지역)이 BC 1200경에 망함에 따라 히타이트로부터 공기를 용광로에 불어 넣어 온도를 높혀 철광석을 녹이고 생성된 괴철을 담금질로 강하게 하며 단조로 불순물을 제거하고 조직을 치밀하게 하는 철 제련 기술을 받아들였다.
청동기 제작에 필요한 주석이 귀하여 청동기 제품을 많이 제작하기가 어려웠으나 철은 기술만 있으며 쉽게 재료를 구하여 청동기보다 강한 철제 무기를 대량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아시리아 제국은 철제 무기와 전차를 활용한 강력한 군사력을 길러 정복 전쟁을 하였으며 피정복 민족을 강제 이주시키고 각 지역에 총독을 두어 조공과 세금 징수하여 왕의 절대권을 강화하였으며 반란 진압 시 잔혹성으로도 유명하였다.
살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 재위 BC 859 ~ BC 824)는 이스라엘과 시리아에 원정하여 카르카르 전투(Battle of Qarqar, BC 853)를 하였다.
기원전 9세기에 세워진 쿠르크 석비(Kurkh Monoliths)에 살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의 여러 정복 전쟁과 공적을 아카드어(Akkadian language)를 사용하여 설형문자로 기록하였는데 카르카르 전투(Battle of Qarqar, BC 853)에서 레반트 지역 여러 왕국의 연합군(이스라에 포함)과 아시리아의 대결이 서술되어 있다.
또 살마네세르 3세(Shalmaneser III)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BC 9세기) 석비에는 북이스라엘 10대 왕 예후(Jehu, 재위 BC 841 ~ BC 814)가 살마네세르 3세 앞에 엎드려 절하는 장면이 부조(浮彫, relief)되어 있다.
사르곤 2세(Sargon II, BC 722 ~ BC 705)는 BC 722년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였으며 에살핫돈(Esarhaddon, 재위 BC 681 ~ BC 669)은 BC 671년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신아시리아 제국은 광범위한 도로망 건설과 왕의 길(Royal Road)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605)은 조직적 도로망과 행정용 교통 체계를 발전시킨 '왕의 길(Royal Road)’의 건설을 시작한 첫 왕조였으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Darius I, 재위 BC 522 ~ BC 486)가 아시리아가 구축했던 메소포타미아–아나톨리아 지역의 도로망을 확장·정비하여 “왕의 길(Royal Road, 길이 : 약 2,700 km, 구역 : 엘람의 수사 Susa ~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Sardis)”을 완성시켰다.
왕의 길(Royal Road)은 단순한 교통 도로의 건설이 아니고 신아시리아 왕권의 군사·행정적, 정치적 통합 전략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주요 도시와 식민지 및 국경지대를 연결하여 병력과 장비를 신속히 이동시키고 국왕의 명령, 조세, 정보를 전달하며 상업과 세금 수취에도 이용되었다.
이를 원활이 하기 위해 도로 양쪽에 중간 거점(post stations) 설치하고 관리인과 병참 지원 시설을 두었다.
니네베(Nineveh)의 아슈르바니팔 도서관(Ashurbanipal Library)에 수천 점의 설형문자(쐐기 문자, cuneiform)로 새긴 점토판 문서(Clay Tablet Documents)가 보관되어 있고 『길가메시 서사시, Epic of Gilgamesh』 도 보존되었다.
궁전, 성벽, 웅장한 양식의 지구라트(ziggurats, 계단식 신전탑, temple tower)형 신전 등이 남아있다.
BC 612년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 BC 626 ~ BC 539), 메디아(media, Median kingdom, BC 678 ~ BC 550), 스키타이(Scythians, BC 7세기 ~ BC 3세기, 남부 우크라이나의 초원), 킴메르(Cimmerians kingdom, 흑해 북쪽 스텝 지역의 유목 민족 킴메르족의 왕국), 유다(Kingdom of Judah, 북이스라엘, BC 930 ~BC 586), 엘람(Elam, Haltamti, BC 3200 ~ BC 539, 이란 남부 후제스탄 지역), 킬리키아(Cilicia, 튀르키예의 남부 해안) 연합군의 공격으로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 ~ BC 605)은 멸망했다.
4) 바빌로니아 제국(Chaldean Babylonian Empire, BC 626 ~ BC 539, Neo-Babylonian Empire, 신바빌로니아 제국)
아시리아에 의해 통치를 받던 바빌로니아 지역의 칼데아인(Chaldeans, Chaldaeans, 셈족의 아모리인 계열)들은 칼데아인(Chaldean)의 지도자인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 재위 BC 626 ~ BC 605, 신바빌로니아 창시자)의 지휘로 BC 609년 아시리아의 니네베를 함락시키고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통합하여 바빌론을 수도로 하는 칼데아인의 바빌로니아 제국(Chaldean Babylonian Empire, BC 626 ~ BC 539, Neo-Babylonian Empire,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 재위 BC 605 ~ BC 562)는 BC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Battle of Carchemish, BC 605,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튀르키예-시리아 국경 근처)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네카우 2세(Pharaoh Necho II)와 아시리아 잔존 세력을 격파하여 도시국가 카르케미시(Carchemish)를 영향하에 두고 레반트(Levant,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였으며 BC 597년에는 예루살렘의 유다 왕국을 정복(Jerusalem’s Fall)하고 왕 여호야김·귀족·기술자들을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아갔으며(바빌론 포로, Babylonian Captivity) BC 586년 솔로몬 성전(First Temple)을 불태웠다.
느부갓네살 2세는 바빌론의 문(Gate of Babylon) 중에서 이슈타르의 문(Ishtar Gate, BC 575, 도성의 성문으로 바빌론의 부와 신앙, 권력을 상징)과 바빌론의 공중정원(The Hanging Gardens of Babylon, BC 610) 등의 건축물들을 건설하는 등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둑(Marduk)을 섬기는 지구라트(ziggurats, 계단식 신전탑, temple tower)인 에테메난키(Etemenanki, 하늘까지 닿는 탑)는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 BC 605 ~ BC 562)가 대규모로 확장하여 완성한 기초 면적이 약 91m × 91m이고 높이가 약 91m(300 큐빗)이며 7층 계단형 벽돌 구조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 중 하나였다(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로 언급됨).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 BC 626 ~ BC 539)은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6 ~ BC 539)의 사제 와의 갈등 등으로 약화되어 BC 539년 수도 바빌론(Babylon)이 신흥 강국인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 BC 550 ~ BC 330)의 키루스 2세(Cyrus II, the Great)에 정복되어 멸망했다.
*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의식주
인류는 오래전부터 건축 재료로 목재, 흙, 자연석(Natural Stone) 등을 사용하여왔다.
그 후 기원전 9000 ~ 6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이 인류 최초의 '가공된' 인공 건축 재료인 점토벽돌(Clay Brick, 진흙 벽돌, sun-dried mud-brick, 어도비, Adobe)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점토벽돌은 진흙에 물과 갈대를 섞어 틀에 넣고 모양을 만들어 햇볕에 말린 것으로 건조지역에서는 문제가 적었으나 비에 약했다.
기원전 5000 ~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음식을 굽는 중에 점토벽돌에 열이 가해지면 점토벽돌이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며서 구운벽돌(Fired Brick)이 생산되었다.
가마에서 소성(燒成)된 구운벽돌은 햇볕에 말린 점토벽돌보다 강도와 수명이 훨씬 뛰어났으며 고대 바빌로니아의 지구라트, 중국의 만리장성(기원전 7세기~) 등에 남아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천연 아스팔트인 역청(Bitumen)을 벽돌 사이의 접착제나 방수재로 사용하여 견고함과 내수성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식생활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대규모 관개 농업으로 발전했다. 강수량이 적고 불규칙한 홍수를 통제하기 위해 운하와 저수지를 건설하여 보리, 밀, 대추야자 등을 생산하였다.
보리, 밀, 수수, 콩류가 주식이며, 양파, 마늘, 부추, 오이 등을 채소로 사용하였으며 수메르인들은 보리죽이나 보리빵에 양파나 콩을 곁들이고 맥주를 만들어 마셨다.
화덕(Fire pit)은 약 50만 년 전 인류가 불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난방과 조리를 위해 돌이나 흙으로 만들어졌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의복의 재료는 기후와 환경의 영향으로 주로 양모(울, Wool)와 아마 섬유(아마포, 亞麻布, 린넨, Linen)가 옷의 주된 재료로 사용되었다.
아마포(亞麻布, 린넨, Linen)는 인류가 발견하고 직조에 사용한 가장 오래된 천연 섬유로, 약 3만 년 전 조지아 동굴에서 염색된 아마 실이 발견되었으며 신석기 시대(약 1만 년 전, 스위스 호수 거주지 등)에 본격적으로 재배 및 직조되었다.
아마포(亞麻布, 린넨, Linen)는 아마(亞麻, Flax) 줄기 껍질로 만든 섬유로 짠 직물을 리넨(Linen)라 한다. 리넨(Linen)는 목화(木花)가 보편화되기 전까지 유럽의 주요 섬유 소재였다.
목화(木花)는 약 5,000 ~ 6,000년 전 인도와 멕시코 등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여 인도에서 기원전 3500년경 면직물로 만들어졌다. 목화는 아랍인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되었으나 유럽에서는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집트 문명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건축, 법, 종교적 관습, 그리고 기술 등이 이집트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문자가 이집트의 문자 체계에 영향을 미쳤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리스 문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법, 예술 등은 그리스 문화에 다양한 형태로 흡수되었고, 이를 통해 그리스 문명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페니키아인(Punic people, Phoenician)
셈족(Semites, Semitic peoples)인 페니키아인(Punic people, Phoenician)들은 레반트(Levant,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에 강력한 도시국가인 티레(Tyre, 레바논의 항구)와 시돈(Sidon, 레바논 남부 지중해 연안)을 세웠다.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을 가나안인(Canaanites, 셈족 Semites)이란 뜻의 케나아니(Kenaani) 또는 키나아니(Kinaani)로 불렀으며 페니키아라는 말은 라틴어 푸니쿠스(punicus)에서 유래했다.
그리스어 포이닉스(phoenix)는 심홍색,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 왕의 자주색 Royal Purple), 뿔고동을 뜻하는데, 이는 뿔고동 껍질을 원료로 한 심홍색 옷을 페니키아인이 즐겨 입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최초로 알파벳을 사용하였으며 그들이 사용한 카나니테 문자(Proto-Canaanite script), 페니키아 문자(Phoenician script)의 알파벳으로부터 그리스어 알파벳(Greek alphabet)이 만들어지고 다시 에트루리아 문자(Etruscan script, 고대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 Etruria 문명에서 사용된 문자)와 로마자(Roman alphabet, Latin alphabet)의 형성에도 기여했다.
페니키아는 갤리선(galley)을 만들고 발달된 항해술로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였다. 이집트에 선박과 건축자재로 이용되는 백향목(레바논시다, Cedar of Lebanon, Cedrus libani)을 수출하였고 페니키아의 도시 바빌로스(biblos)는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 종이(paper)로 쓰이는 파피루스(Papyrus)를 수출하였다.
파피루스(Papyrus, paper의 어원)와 바이블(Bible, 성경)은 바빌로스(biblos, 레바논 해안의 도시, Jbeil 지벨)에서 유래하였다.
카데시 전투(Battle of Kadesh,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Hittites와 이집트의 케메트Kemet와의 전쟁, BC 1274) 이후, 히타이트와 케메트, 미케네(Mycenae, 그리스)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페니키아인들은 발달한 항해술을 이용해서 지중해 동남부를 빠르게 장악하였다.
이어서 페니키아인들은 아프리카 북부의 카르타고(Carthago, 현재 튀니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해 타르테소스(Tartessos, BC 9세기 ~ BC 6세기) 왕국을 세웠다.
페니키아는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인 키루스 대왕(Cyrus II, 재위 BC 550 ~ BC 530)에 함락되어 속국이 되었다.
페니키아의 식민지인 고대도시 카르타고(Carthago, 현재 튀니지)는 기원전 814년 티레(Tyre, 레바논 남부 해안)에서 온 페니키아인들이 그들의 항해에 필요한 정박지와 보급품을 제공하기 위해 건설하였다.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사르데냐, 시칠리아, 몰타, 발레아레스 제도, 남부 이베리아 반도에 걸쳐 성장했지만, 포에니 전쟁(Punic war, BC 264 ~ BC 146)에서 로마에 패하여 파괴되었다.
이후 카르타고는 BC 49년에서 BC 44년 사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BC 100 ~ BC 44)에 의해 로마의 식민도시(Colonia Julia Carthago)로 재건되었다.
* 알파벳(Alphabet)의 기원
알파벳(Alphabet, 그리스 문자의 첫 두 글자인 알파 Α, Alpha와 베타 Β, Beta에서 유래)의 기원과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19 ~ 18세기경 고대 레반트 지역과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 상형문자(Hieroglyphs)를 단순화하여 음절과 자음 표기가 가능한 시나이 알파벳(Proto-Sinaitic Script)을 만들어 광산 근로자와 상인들이 사용하였다.
BC 1700 ~ BC 1100년경에 시나이 문자(Proto-Sinaitic Script)를 발전시켜 프로토-가나안 문자(Proto-Canaanite)가 만들어지고 그 후 기원전 1050년경 페니키아(레바논, 시리아 해안, 북이스라엘)에서 프로토-가나안 문자(Proto-Canaanite)를 발전시켜 22자 자음 중심(Consonantal alphabet)의 고대 페니키아 문자(Phoenician script)의 알파벳을 완성하여 모음은 표기하지 않고 자음만으로 표기하여 지중해 상업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기원전 9세기경(약 BC 900 ~ 800) 고대 그리스 본토 및 에게해 지역에서 페니키아 문자(Phoenician script)를 도입하고 모음을 추가하여 그리스 알파벳(Greek Alphabet)을 만들었다.
그리스 알파벳(Greek Alphabet)을 사용한 가장 오래된 예로는 약 BC 740년경 디피론 항아리 비문(Dipylon inscription)이다.
그리스 알파벳(Greek Alphabet)은 현대 알파벳(라틴문자 Latin alphabet, 로마문자 Roman alphabet, 키릴문자 Cyrillic alphabet 등)의 기초가 되었다.
※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敍事詩, epic, 역사적 사실이나 신화, 전설, 영웅의 사실이나 자취를 있는 그대로 쓴 시)로 수메르 남부의 도시 국가 우루크(Uruk)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시(Gilgamesh)의 설화 모음집이다.
길가메시(Gilgamesh)는 수메르의 초기 왕조 시대(BC 2900 ~ BC 2334) 초의 도시국가인 우루크를 BC 2800 ~ BC 2500년경에 126년 동안 지배한 우루크의 5대 왕이다.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는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초기 수메르어 길가메시 서사시(기원전 약 2100년경)를 오랜 기간에 걸쳐 신전·왕궁의 전문 서기관들이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기록했다.
이어서 아카드어 작품으로 확장되고 편집되어 여러 전승판본이 만들어져 전해진다.
여러 전승판본 중 BC 약 1200 ~ BC 1100년경에 바빌로니아 시인 신-레키-운니니(Sîn‑lēqi-unninni, BC 1300 ~ BC 1000)가 편집하고 정리한 ‘표준 바빌로니아판본(Standard Babylonian Version, SBV)’이 가장 완성도가 높다.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판본은 니네베(Nineveh,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모슬 근처)에 있는 신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재위 BC 668 ~ BC 627)의 서고에서 발견된 12개의 점토판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히 전하지 않아 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전해지는 여러 판본으로 전체 모습을 복원하고 있다.
*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의 내용
우루크(Uruk)의 왕인 길가메쉬(Gilgamesh)는 우루크의 왕인 인간 남자 루갈반다(Lugalbanda)와 암소의 신인 여신 닌순(Ninsun) 사이에 태어난 3분의 2는 신, 3분의 1은 인간으로 잘 생기고 총명하며 엄청난 힘을 가진 초인(超人)이었다.
길가메쉬가 온 세상을 둘러보고 우루크로 돌아온 후 자신보다 강한 자가 없다는 자만에 빠져 허구한 날 백성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등 압제와 악행을 행하자 백성들이 그의 압제에 불만을 터뜨리고 호소하자 천신(天神) 아누(Anu, 안, An, 최고의 신)는 길가메쉬의 힘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대지와 창조의 여신인 아루루(Aruru, 모신, 母神)를 시켜 힘센 야만인 엔키두(Enkidu)를 만들게 했었는데, 이때 아루루는 야생동물이 사는 습지에 씨앗을 뿌려 엔키두(Enkidu)를 만들었다.
이슈타르 신전의 여사제인 샴하트(Shamhat, 신전 창녀, 神殿娼婦, Temple prostitute, Hierodule, 성스러운 매춘 여사제)가 엔키두를 지혜롭고 신같이 만들어 우루크에 도착하도록 안내하였다.
엔키두는 백성들의 호소를 듣고 분노하게 되었으며 길가메시도 엔키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길가메시는 어느 누가 자신에게 대항할 수 있겠냐며 엔키두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둘이 호각으로 싸우다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여 무승부로 종료한다. 둘은 화해하고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그 후 둘은 영웅으로서 온갖 행적을 남긴다.
그때 태양신 샤마쉬(Shamash, 태양·정의·법·예언·진실을 관장하는 신, 달의 신 난나 Nanna의 아들)는 자신의 신전을 엘림(삼목)산에 짓고 싶었으나 산림 수호자 훔바바(Humbaba)가 지키고 있어 그를 죽여야 했는데 신 엔릴(Enlil, 폭풍·질서·통치의 신, 신들 세계의 질서를 유지, 천신 아누의 아들)의 명령으로 산림 수호자가 된 훔바바(Humbaba)를 직접 죽일 수는 없어 그 지역까지 영토를 넓히고 싶어하는 길가메시를 부추겼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명성과 영광을 얻기 위해 훔바바(Humbaba, 엔키두가 야민인이었을 때 친구)를 정벌하기 위해 삼나무 숲을 침입하였으나 삼나무 숲의 수호자인 훔바바가 너무나 강해서 온갖 감언이설로 방심하게 만든 뒤에 기습해서 그를 죽이고 우루크로 돌아온다.
길가메시의 명성이 하늘까지 알려질 정도가 되자 사랑과 풍요의 여신 이슈타르(Ishtar)가 길가메시에 관심을 가졌다. 이슈타르는 길가메시에게 구애를 하였지만 길가메시는 엄청나게 기나긴 장문의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그녀를 무시한다. 이렇게 길가메쉬가 여신 이슈타르(Ishtar)의 유혹을 뿌리치자 여신 이슈타르는 아버지인 천신(天神) 아누(Anu, 안, An, 최고의 신)에게 길가메시를 징벌할 수 있도록 강력한 신수(神獸)인 하늘의 황소(Bull of Heaven, 신들의 무기, 하늘 세계의 파괴적 힘을 상징)를 지상에다가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천신 아누(Anu)는 반대했지만 이슈타르(Ishtar)의 애원에 어쩔 수 없어 하늘의 황소를 내려 주었다.
하늘의 황소(Bull of Heaven)는 대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성을 부숴 많은 백성들을 고생하게 하였다.
결국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나서서 하늘의 황소를 무찌르게 되는데, 길가메시는 신의 짐승이라 망설였으나 엔키두가 나서서 황소를 죽여버린다.
그것을 본 이슈타르가 기가 막혀 저주를 퍼붓자 엔키두는 자신의 친구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것이라며 황소의 넓적다리를 잘라 여신 이슈타르에게 던지며 그녀를 모욕한다. 화가 난 이슈타르와 엔릴(Enlil, 폭풍·질서·통치의 신, 신들 세계의 질서 유지, 천신 아누의 아들)은 길가메시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하늘에서는 훔바바(Humbaba)와 황소의 죽음에 대한 이슈타르의 응징 간청으로 길가메시를 응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신왕 엔릴은 이슈타르의 응징 간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샤마쉬는 자신이 부추겼으므로 응징을 반대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대회의 끝에 천신 아누(Anu)의 최종평결로 '길가메시는 신의 피가 섞인지라 죽일 수 없고 그들의 창조물인 엔키두는 죽는다' 로 최종결정이 된다.
엔키두는 병에 걸려 죽게 되는데 이때 길가메시의 품에 안겨서 죽었다고 하며 이후 시체에서 벌레가 나올 때까지 그 시체를 길가메시가 안고 있었다고 한다. 애통해하던 길가메시는 그 후 불사(不死, Immortal)를 추구하게 된다.
친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길가메시는 영생의 비밀을 듣기 위해 대홍수의 생존자이며 불멸을 얻은 유일한 인간인 우트나피시팀(Utnapishtim, 수메르어로는 지우수드라, Ziusudra)과 그의 아내를 찾아 나선다.
여행 중에 만난 여관집 젊은 여주인 시두리(Siduri)는 길가메시와의 대화에서 '길가메시여, 그대의 배를 채우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라.
낮에는 즐겁게 춤추고 밤에는 기쁘게 쉬어라.
사랑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아내를 기쁘게 하라.
이것이 인간의 몫이니라.'라고 말하며 '신들은 불로불사지만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인간은 삶이 유한하기에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그 충고를 무시하고 우트나피쉬팀의 거처를 수소문하여 찾아간다.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영생의 비밀을 가르쳐 줄 것을 애원하자 우트나피쉬팀은 대홍수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는다면 영생의 비법을 알려줄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길가메시가 이를 시도하던 중 마지막에 잠들어 버려서 실패로 돌아갔다.
우트나피시팀은 "잠도 못 이기면서 어찌 죽음을 이기려 하는가"라고 하였으며 이를 보던 우트나피쉬팀의 아내가 "그럼 불로초만 전해줍시다"라 하였고 이에 우트나피시팀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불로초가 강바닥에 있다는 사실을 길가메시에게 알려주었다.
길가메시는 강물에 잠수하여 불로초를 찾았으며 돌아오는 도중에 목이 마르고 피로하여 개울에서 쉬면서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다.
그 사이 뱀 한 마리가 몰래 불로초를 삼켜버려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길가메시는 불로초마저 잃어버리자 우루크로 돌아와 한탄만 하다가 잠이 들어 꾼 꿈속에서 지혜와 물의 신 엔키(Enki), 죽음의 신 네르갈(Nergal) 등을 만나 그들에게 위로와 함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죽으면 저승의 왕이 될 수 있으니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는다.
꿈에서 깬 길가메시는 깨달음을 얻고 남은 여생은 백성들을 위해 헌신한 뒤 말년이 되자 자신의 여태까지의 행적을 돌에 새긴 후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의연하게 죽는다.
이후 그의 시신은 호화롭게 치장되고, 수많은 시종과 애첩들이 순장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 우트나피시팀(Utnapishtim, 수메르어로는 지우수드라, Ziusudra)의 대홍수 이야기(The Great Flood Myth)
a. 인간이 번성하고 도시가 커지면서 “소란이 심해져 신들의 휴식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일부의 신들이 인간 세계에 불만을 품고 있어서 지혜의 신 에아(Enki/Enki)는 반대했지만 천신 아누(Anu, 최고의 신)는 소극적 동의를 했고 엔릴(Enlil, 천신 아누의 아들)이 지상에 대홍수를 일으켜 응징하기로 결정한다.
b. 지혜의 신 에아(Enki/Enki)가 비밀리에 벽에 속삭이는 방식으로 우트나피시팀(Utnapishtim)에게 대홍수를 알리고 배를 만들라고 했다.
c. 우트나피시팀은 거대한 배(방주)를 만들고 가족·장인·동물 등 생명체를 태우고 홍수를 견딘다.
d. 홍수가 멈춘 뒤 산 정상에 배가 정착한다.
e. 땅이 마른 것을 확인하기 위해 새(비둘기·제비·까마귀 등)를 차례로 날려보낸다.
f. 홍수가 끝나고 우트나피시팀이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자 신들은 인류가 멸망한 현실을 보고 후회하였고, 그의 행위를 감동적으로 본 신 엔릴(Enlil, 폭풍·질서·통치의 신, 신들 세계의 질서 유지, 천신 아누의 아들)은 신실함을 인정하여 “너와 아내는 다른 인간과 다르다” 고 말하고는 그와 그의 아내에게 영원한 생명(불사)를 부여하였다.
*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한 국가들
A. 메소포타미아 문명(Mesopotamian civilizations, 도시국가 시대)
a. 수메르 문명(Sumerian Civilization, BC 4500 ~ BC 1900)
a) 도시국가 시대(City-State Period, 약 BC 4000 ~ BC 2900)
b) 초기 왕조 시대(Early Dynastic Period, 약 BC 2900 ~ BC 2334년경, 도시국가)
c) 아카드 제국(BC 2334 ~ BC 2154)
사르곤 대왕(Sargon of Akkad, Sargon the Great, 재위 BC 2334 ~ BC 2279)은 젊은 시절 도시국가 키시(Kish)의 왕 루갈자게시(Lugalzagesi) 밑에서 관리로 근무하다가 반란을 일으켜 루갈자게시를 우르(UR) 성문 앞에서 포로로 삼고 수메르와 아카드를 통합하는 등 수메르 전역을 통일하여 인류 최초의 제국(帝國)을 세웠다.
d) 우르 제3왕조(BC 2112 ~ BC 2004)
b. 바빌로니아
a) 고(古) 바빌로니아 왕국(Old Babylonian, BC 1894 ~ BC 1595)
수무-아부(Sumu-abum, 약 BC 1894경)가 여러 수메르·아카드 도시국가를 차례로 병합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바빌론(Babylon)을 수도로 하는 고(古) 바빌로니아 왕국(Babylonia)을 세웠다.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 ~ BC 1750)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을 통일하여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행정과 법률, 종교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적 왕권을 강화하였다.
인류 최초의 성문법(成文法) 중 하나인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하였다.
b) 카사이트 왕조 바빌로니아(BC 1595 ~ BC 1155)
BC 1595년 히타이트가 바빌로니아를 침입하여 멸망시키고 물러간 후 바빌로니아가 혼란한 시기(BC 1650 ~ BC 1595)에 카시트족의 가쉬틸리아시 1세(Gandaš)가 바빌론을 장악했다.
c.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 ~ BC 605)
초기 아시리아(Early Assyria, BC 2500 ~ BC 2025), 구아시리아 왕국(Old Assyrian Kingdom, BC 2025 ~ BC 1378), 중아시리아 제국(Middle Assyrian Empire, BC 1392 ~ BC 934),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 ~ BC 605)이다.
신아시리아 제국은 중앙집권적 군사 국가로 기마와 보병 활용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남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잔혹하게 도시를 파괴하였으며 도로망과 행정에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d.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BC 626 ~ BC 539)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은 BC 609년 아시리아를 점령하고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통합하였다.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 재위 BC 605 ~ BC 562)는 카르케미시 전투(Battle of Carchemish, BC 605)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네카우 2세(Pharaoh Necho II)와 아시리아 잔존 세력을 격파하고 레반트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였고 BC 597년 예루살렘의 유다 왕국을 정복(Jerusalem’s Fall)하고 왕 여호야김·귀족·기술자들을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아갔으며(바빌론 포로, Babylonian Captivity)
BC 586년 솔로몬 성전(First Temple)을 불태웠다.
B. 아케메네스 페르시아(Achaemenid Empire, BC 550 ~ BC 330)
페르시아의 메디아 제국(Median Empire, BC 7세기 ~ BC 550, 이란 북서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종속국으로 소왕국이었던 안샨(Anshan) 의 왕 키루스 대왕(Cyrus II, 재위 BC 559 ~ BC 530)가 BC 550년 메디아 제국(Median Empire)을 정복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의 기초를 마련한 후 약 547년 리디아(Lydia, BC 7세기 ~ BC 6세기)를 정복(BC 546년)하여 소아시아(튀르키예 서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약 BC 547 ~ BC 540년에는 엘람 지역(수사 중심)을 병합하였으며 BC 539년 신바빌로니아 제국(New Babylonian Empire, BC 626 ~ BC 539)을 점령하여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키루스 대왕(Cyrus II, 재위 BC 550 ~ BC 530)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바빌론을 평화롭게 점령하고 관용 정책(Policy of Tolerance)을 펼쳤다. 이때 제작된 점토 원통형 선언문(칙령)이 키루스 실린더(Cyrus Cylinder)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권 선언문으로 평가받는다.
키루스 실린더를 통해 유대인 포로의 귀환을 허용하였다.
다리우스 1세(Darius I, 재위 BC 522 ~ BC 486)는 서쪽 사르디스(Sardis, 소아시아 리디아 지방)에서 동쪽 수사(Susa, 엘람 지방)까지 길이 약 2,700km (1,700마일)의 포장도로인 왕의 길(Royal Road)을 건설하였다.
C. 알렉산드로스 제국(헬레니즘 제국, Hellenistic Empire, BC 332 ~ BC 309)과 그 후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BC 336 ~ BC 323)이 메소포타미아 평야(티그리스 근처)에서 일어난 고르가무라 전투 (Battle of Gaugamela, 기원전 331)에서 다리우스 3세에 결정적으로 승리하였다.
대왕 사후 그의 부하 장군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Seleucus I Nicator)가 셀레우코스 왕조(BC 312 ~ BC 63)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다.
헬레니즘 문화가 확산되어 그리스·페르시아 문화의 융합이 일어났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Pompey)가 시리아를 점령하면서 멸망하였다.
D.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 BC 247 ~ AD 224)
헬레니즘 세계가 혼란스러웠고 셀레우코스 제국이 약화되자
다하에(Dahae)라는 이란계 스키타이계 유목민 연맹에 속한 파르니(Parni) 부족의 지도자였던 아르사케스 1세((Arsaces I, BC 250년경 ~ BC 211)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북동부에서 점령을 시작하여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했다.
파르티아 제국은 봉건적 통치를 하였으며 기병 중심의 군대를 양성하여 로마와 반복 충돌하였다.
E. 사산 왕조(Sassanid Empire, AD 224 ~ AD 651)
파르스(Pars, 오늘날 이란 남부 파르스 주) 지역의 지방 총독(사산 가문 출신)이었던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I, 재위 AD 224 ~ AD 242)가 파르티아 제국의 마지막 왕 아르타반 5세(Artabanus V)와 224년 호르모즈간 전투에서 승리하여 크테시폰을 수도로 사산 왕조(Sassanid Empire, AD 224 ~ AD 651)를 세웠다.
아르다시르는 파르티아 귀족 중심의 분권 체제로 지배하던 메소포타미아를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로 개편하여 지방 총독(샤흐라브, shahrab)을 임명하고 세금과 군사력으로 직접 통제하였다.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Mazdaeism, 선악 이원론)를 국교로 하였으며, 로마, 비잔티움과 계속 전쟁을 지속하였다.
AD 651년 아랍의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되었다.
* 시대별 메소포타미아 문명
A. 고대 메소포타미아(신석기시대, BC 6000 ~ BC 5000)
하싸나(Hassuna, 티그리스 상류, 모술 근처, 단순한 적색토기), 사마라(Samara, 티그리스 중류, 텔 에스사완 주변, 정교한 회화문 토기), 할라프(Halaf, 시리아 북부 ~ 튀르키예 남동부, 정교한 채문토기), 우바이드(Ubaid, BC 5,000 ~ BC 3,800년경, 남부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우르 주변, 대형 신전 건축)
B. 금석 병용 시대(金石倂用時代, 구리와 석기를 함께 사용하였으므로 금석 병용 시대, 신석기와 청동기의 사이 시대, 동기 시대는 구리를 합금으로 사용하지 않은 순동기 시대 純銅器時代)
우바이드기(Ubaid period, BC 6500 ~ BC 3800, 남부 이라크의 우르 부근),
우루크 기(Uruk period, BC 4000 ~ BC 3100, 메소포타미아지역 우루크),
고대 젬데트 나스르(Jemdet Nasex Period, BC 3100 ~ BC 2900, 우루크 문명에서 '수메르 도시국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이며 과도기)
C. 중기 청동기 시대
초기 아시리아 왕국(BC 2000 ~ BC 1800),
고 바빌로니아 제국 (BC 1800 ~ BC 1700),
히타이트 왕국(BC 3300 ~ BC 1200, 18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북중부의 하투샤를 중심으로 형성된 왕국)
D. 후기 청동기 시대
카사이트 왕조(Kassite Dynasty, BC 1595 ~ BC 1155),
아시리아 중기(BC 1600 ~ BC 1200),
히타이트 제국(BC 1400 ~ BC 800)
E. 철기시대(鐵器時代, Iron Age)
신 히타이트(BC 1100 ~ BC 700),
신아시리아 제국(BC 1000 ~ BC 700),
신바빌로니아 제국(BC 700 ~ BC 600),
아케메네스 제국(BC 600 ~ BC 400, 페르시아)
나. 이집트 문명
이집트 문명의 발생은 나일강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BC 460년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 BC 484 ~ BC 425, 고대 그리스, 역사의 아버지)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했다.
나일강은 강수량이 적은 이집트에서 중요한 수자원일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강물이 범람하였으며 이때 양분이 풍부한 미세모래가 떠 내려와 퇴적되어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특징이 있었다. 나일강의 범람은 예측이 가능했고 농사 시기와도 잘 맞았다.
이집트인은 양분이 풍부한 미세모래와 물을 막아 가두어서 농사에 아용하였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홍수가 규칙적으로 일어났으므로 이를 예측하기 위한 달력을 만들었고, 범람으로 사라진 농토의 경계를 측량하기 위한 도구 등을 계발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천문학, 역학, 측량술 등이 발달되었던 것은 규칙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을 관리하고 활용하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1) 고대 이집트
BC 6000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에서 먼저 일어난 신석기 문화가 이집트로 전파되면서 나일강 유역의 수렵, 채집 문화가 농경문화로 대체되었다. 이집트에서 발달되고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BC 5500년경에 시작된 파이윰(Fayum, 중북부 파이윰 오아시스에 위치한 도시)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차이점을 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강이 불규칙적으로 범람하고 지리적으로 개방적이라 작은 여러 도시로 분열됨에 따라 정치는 도시 국가 중심이고 외침이 많아 세계관은 비관적·불안정하였으나 교역은 광범위한 국제적이었다.
이에 반해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이 규칙적으로 범람하고 사막으로 싸여 있어 정치는 안정적인 중앙집권 왕조로 이어지고 외침이 적어 세계관은 낙관적·안정적이었으며 자급자족으로 교역은 제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 초기 왕조 시대(Early Dynastic Period, BC 약 3100년 ~ BC 2686년경)
나카다 문화(Naqada culture, 약 BC 4000 ~ BC 3100)는 고대 이집트 선왕국 시대(Pre-dynastic Egypt, BC 6000 ~ BC 3100, 파라오 왕조가 수립되기 전)의 대표적인 문화이다.
이집트 문명은 나카다 문화의 두 번째 단계인 게르제 시대(Gerzeh period, Naqada II, BC 3500 ~ BC 3200)에서 시작되었다.
BC 3300년 경 이집트는 남쪽의 상(上)이집트(Upper Egypt)와 북쪽의 하(下)이집트(Lower Egypt)의 두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집트의 초기 왕조 시대(Early Dynastic Period, BC 약 3100년 ~ BC 2686년경)는 선왕국 시대 말기인 나카다 Ⅲ 문화(Naqada III, 약 BC 3200 ~ 3000년경, 세마이아나 문화, Semainean)의 발전을 계승하여 통일왕국이 형성된 시기이다.
이집트의 초기 왕조 시대는 이집트 제1왕조와 제2왕조로 구분된다.
BC 3150년경 나르메르(Narmer, 재위 약 BC 3100년경, 초대 파라오, Pharaoh : 국가 최고 통치자 겸 종교적 지도자, 신권 통치자) 초대 파라오는 상하(上下) 두 왕국을 통일하여 멤피스(Memphis, 후의 상上 이집트 중심)를 수도로 하는 이집트 최초의 제1왕조(Dynasty I, Egypt’s First Dynasty, BC 3100년경 ~ BC 2890년경)를 열었다.
이집트 제2왕조(Dynasty II, Egyptian Second Dynasty, BC 약 2890년경 ~ BC 2686년경)는 통합 왕국의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과 종교적 권위가 확립되어 가는 과도기이다.
이집트인들은 농업이 발달되어 식량 공급이 증가함에 따라 앉아서 생활하는 생활 방식이 늘어났으며 정착지는 약 5,0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고대 이집트 문자의 기원은 상형문자(Hieroglyphs, 약 BC 3200경 시작)이다.
그림문자(표의문자 + 표음문자 혼합체)로 신전 벽, 무덤, 비문 등 종교적·공식적 기록에 쓰였다.
상·하 이집트 통일을 기념하는 의식용 석판인 『나르메르 팔레트(Narmer Palette), 약 BC 3100년경』의 상단 중앙에 나르메르의 이름을 카르투슈(왕명 틀) 안에 상형문자(Hieroglyphs, 약 BC 3200경 시작)로 표기된 것을 히에라콘폴리스(Hierakonpolis)에서 발견하였다.
BC 2600년경부터는 상형문자의 간략화된 필기체인 히에라틱(Hieratic, 사제문자)으로 파피루스 문서, 행정 문서, 종교 경전 등에 널리 사용되었다.
BC 2680년경 나일 강 범람 이후 매년 토지 경계를 복원하기 위해 직선·직각·피타고라스 삼각형(3-4-5) 형태의 기초 기하학을 사용하였고 건축·측량·천문 정렬을 담당하는 전문 기술자 집단인 로프 스트레처(Rope-stretchers, harpedonaptae)가 밧줄로 직각을 측량하는 등 기초적 측량과 기하학이 시작되었다.
나) 제3왕조 고왕국(BC 2686 ~ BC 2181)
BC 2686년에는 파라오 조세르(Djoser, 재위 BC 2670 ~ BC 2640)가 제3왕조를 개창하면서 이집트 고왕국(Old Kingdom, 제3왕조 ~ 제6왕조, BC 2686 ~ BC 2181)이 열린다.
고왕국 시대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의 황금기로 불리는데, 제4왕조 시대에 활동한 쿠푸(Khufu, 재위 BC 2589 ~ BC 2566) 때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기자의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Giza)가 건설되었다.
조세르의 계단 피라미드, 스네프루의 굴절 피라미드, 쿠푸의 대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동안 북쪽 하늘의 ‘지지점(불멸의 별)’을 기준으로 피라미드의 방위를 맞추는데 대피라미드의 오차가 0.067°일 정도로 천문학이 발전했으며 기하학적 비례 감각이 정립되고 큐빗(royal cubit) 단위와 단위를 재는 정밀한 큐빗 규범봉을 사용하고 측량과 기반공사에 완벽한 수평 조정 기술을 사용하였다.
20 ~ 30톤의 석재(주재료는 석회석 Limestone, 화강암 일부 사용)를 운반하여 정밀 절단하고 조적하는 등 피라미드 과학이 절정에 도달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최고의 업적인 기자 피라미드군(Giza pyramid complex, 대 피라미드 BC 2560)은 중심부(Core)에 노란색 석회암 블록으로 쌓고 외장재(Casing)는 고운 백색 석회암으로 덮여 있어 햇빛에 밝게 빛났으나 현재는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왕의 방 등 내부 구조물과 파라오 카프레 Khafre 피라미드와 멘카우레 Menkaure 피라미드의 하단부에는 단단한 분홍색 화강암(Granite)을 사용하여 건축하였다.
기자 대 스핑크스(Grand sphinx, BC 2500년경)는 기자 고원의 천연 석회암 암반을 직접 깎아 만든 거대 단일 조각상(Monolith)이다.
파라오의 강력한 왕권 제도로 토지, 노동, 자원을 국가가 통제했다.
고대 왕국은 농업 생산성이 증가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중앙 행정이 발전되고 이들의 노력으로 건축, 예술 및 기술의 주요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집트인들은 BC 약 2700년경(제2왕조 말 ~ 제3왕조 초)부터 태양력(태양력 달력, Solar Calendar)을 세계 최초로 사용하였다.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예측하기 위해 천문을 관측하여 시리우스(Sirius, 큰 개자리 Canis Major의 별)가 새벽 하늘에 처음 나타나는 시점이 나일강 범람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태양력을 만들었다.
1년을 365일, 1개월을 30일, 한 해를 12개월로 하였다.
월에 포함되지 않는 보정일(에파고메날, epagomenal days) 5일은 신들의 탄생일로 하였으며 윤년이 없어 해가 지날수록 달력의 날짜가 빨라져 약 1,460년마다 계절과 다시 일치하였다.
다) 제1중간기(BC 2181 ~ BC 2055)
파라오(Pharaoh) 시대가 500년 지속되는 동안 경제력이 서서히 약화되어 경제가 더 이상 대규모 중앙집권적 행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파라오(Pharaoh)의 권력이 쇠퇴하자 파라오의 대리인으로 세금 징수·행정·치안 등을 담당하던 지역 총독(總督, Nomarch)들이 파라오의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했으며 더욱이 BC 2200 ~ BC 2150년의 극심한 가뭄과 겹쳐 국가는 제1중간기라고 알려진 140년간의 기근과 분쟁 기간에 들어가게 되었다.
라) 이집트 중왕국(BC 2055 ~ BC 1892)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Mentuhotep II, 재위 BC 2055 ~ BC 2004)가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를 다시 통일한 시점부터를 이집트 중왕국이라고 부른다.
BC 1991년 아메넴헤트 1세(Amenemhat I, 재위 BC 1991~ BC 1962)가 즉위한 시점부터 이집트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III, 재위 BC 1878 ~ BC 1839)와 아메넴헤트 3세(Amenemhat III, 재위 BC 1842 ~ BC 1797) 때 가장 강력하였다.
기원전 약 1850년경(중왕국 12왕조 시대)에 제작된 수학문제집인 모스크바 파피루스(Moscow Mathematical Papyrus, MMP, 보관 장소가 러시아 국립 박물관이어서 모스크바 파피루스라함)에 원주율 π ≈ 3.16 수준의 값을 사용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 파라오 소베크네페루(Sobekneferu, 재위 BC 1806 ~ BC 1802, 여성 파라오) 시기부터 쇠락했다.
BC 1800 ~ 1600년경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 상형문자를 기반으로 하는 원시 알파벳(Proto-Sinaitic script)이 생성되었다.
이 문자가 훗날 페니키아 문자로 이어지고 이어서 그리스 문자, 라틴 문자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이집트 문자가 알파벳의 원형(phonetic alphabet)의 간접적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의 주신으로 격상된 아문(Amun) 숭배의 중심지인 카르나크 신전(Karnak Temple)은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 복합체로 아문(Amun), 무트(Mut), 콘수(Khonsu) 삼위일체 신에게 봉헌된 거대한 신전군으로 규모, 예술성, 축조 기간 등 모든 면에서 고대 이집트 건축의 정점이다.
초기 건축 및 기초 부분에는 석회암(Limestone)을 사용했고 주재료로는 사암(Sandstone)을 사용하였으며, 거대한 기둥과 벽체, 오벨리스크에는 화강암(Granite)을 사용했다.
이집트 룩소르(Luxor) 북쪽에 위치하며 중왕국(BC 1971경)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BC 1세기)까지 약 2,000년 동안 건설·확장되었다.
카르나크 신전은 거대한 제1탑문 (First Pylon), 세계 최대의 기둥 숲인 대열주실(Hypostyle Hall, 람세스 2세 등 신왕국 시대 파라오가 건설), 오벨리스크(Obelisks, 태양신 라(Ra)의 상징이며, 파라오의 신성과 권력을 나타내는 기념물), 신성 호수(Sacred Lake, 사제들이 정결 의식을 행하는 곳), 아문 경배의 중심인 아문 라 신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르나크는 단일 신전이 아니고 여러 왕조가 세운 신전, 축제홀, 탑문, 거리, 정원 등이 모여 있는 거대한 종교 도시로 국가 의례, 왕권 정당화, 신년 축제(오페트 축제)의 기능을 가진 중심지이다.
마) 이집트 제2중간기(BC 1802 ~ BC 1550)
이집트 제13왕조는 소베크호테프 1세(Sobekhotep I, 약 BC 1800년경 추정)가 BC 1802년에 세웠으며 이어서 굉장히 많은 파라오들이 난립하게 된다. 18 왕조까지 이어졌다.
기원전 1600년경, 제2중간기(16~17왕조, BC 2600 ~ BC 2400년경 고왕국 원본 문헌)에 제작된 의학 외과학(外科學) 전문서인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Edwin Smith Papyrus)에는 상처·외상·골절·탈구를 중심으로 하는 48개 임상 사례가 기록되어 있으며 발견자는 미국인 고동방학자 에드윈 스미스(Edwin Smith)이다.
기원전 약 1550년(제2중간기)경에 테베 지역에서 제작된 라이нд 파피루스(Rhind Mathematical Papyrus, RMP)는 약 87개 문제로 구성된 방대한 수학문서로 수학 교과서·서기관 훈련 교재로 사용된 것이다.
원본은 더 오래된 문헌(기원전 2000년경)이며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에 있는 이것은 베낀 것이다.
스코틀랜드인 A. 헨리 라이нд(A. Henry Rhind)가 발굴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라이нд 파피루스라 명명하였다. 주요 내용으로는 모든 분수를 단위분수 합으로 표현하는 단위분수(1/n) 체계, 선형 방정식(미지수 문제), 비례·배분 문제, 기하학 계산(원의 넓이를 “지름의 8/9를 제곱한 값”으로 계산, π ≈ 3.1605 를 암시), 곡물 저장창고(실린더형)의 부피 산정, 노동력·건설 관련 문제 등이다.
바) 이집트 신왕국(BC 1550 ~ BC 1077)
BC 1550년 아흐모세 1세(Ahmose I, 재위 약 BC 1550 ~ BC 1525)가 고대 이집트의 제2중간기(Second Intermediate Period) 말기에 테베(Thebes, 상 이집트 수도, 이집트 남부)를 중심으로 힉소스(Hyksos, 이집트 제2중간기, Second Intermediate Period, 약 BC 1720 ~ BC 1550, 제15 ~ 16 왕조)에 맞서 싸운 왕조가 제17왕조(17th Dynasty, 약 BC 1650 ~ BC 1550)이다.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를 몰아내고 통일을 완수한 후에는 제18왕조라 하며 이때 이집트는 세 번째 전성기였다.
기원전 약 1550년(신왕국 초, 제18왕조 초기)에 작성된 의학 전 분야를 아우르는 종합 진료서인 에버스 파피루스를 독일 이집트학자 게오르크 에버스(Georg Ebers)가 발견하였다.
에버스 파피루스는 약 700개 이상의 약물 처방, 질병 분류와 증상 설명, 마법 주문과 의학 처방 혼합, 내과·피부과·치과·기생충·여성 질환·정신 질환 등을 다루고 있다.
여성 파라오인 하트셉수트(Hatshepsut, 재위 BC 1479 ~ BC 1458)는 태평성대로 이끈 파라오였다.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재위 BC 1477 ~ BC 1423)는 재위 23년을 계모 하트셉수트가 섭정이자 공동파라오로서 실권을 행사했으며 시리아, 누비아 등을 대규모의 군사로 정복하여 이집트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III, 재위 BC 1390 ~ BC 1352)는 “태양신 아멘-라(Amun-Ra)”의 숭배를 강화했고 BC 1352년에 즉위한 아케나톤(Akhenaten, 재위 BC 1352 ~ BC 1335)은 기존의 다신교를 부정하고 태양신 아톤(Aten, 태양원반)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도입했다.
아케나톤은 수도를 아케타톤(Akhetaten, 아마르나)으로 옮기는 등의 대규모 개혁을 벌였다. 이런 혼란기에 황금 마스크로 잘 알려진 투탕카멘(Tutankhamun, 재위 BC 1332 ~ BC 1323)이 즉위했다.
BC 1319년 호렘헤브(Horemheb, 재위 BC 1323 ~ BC 1295)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파라오가 되었다.
호렘헤브 사후 그의 친구인 람세스 1세(Ramesses I, 재위 약 BC 1295 ~ BC 1294)가 BC 1292년 이집트 제19 왕조를 개창했다.
제19 왕조 시기에 람세스 2세(Ramesses II, 재위 BC 1279 ~ BC 1213)가 즉위하여 최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람세스 2세는 재위 67년에 수많은 건축물을 남기고 수많은 전쟁을 겪었으며 자녀가 100명을 넘었고 90세에 죽었다.
이집트 남부 누비아 지역, 나일강 서안에 있는 아부 심벨(Abu Simbel) 신전은 람세스 2세 재위 중(약 BC 1264 ~ BC1244)에 람세스 2세 자신을 신격화하여 위엄을 과시하고 남방 누비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조하며 신 아문(Amun), 라-호라크티(Ra-Horakhty), 프타(Ptah)에게 헌정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아부 심벨 신전은 나일강변의 거대한 사암(Sandstone) 절벽을 직접 깎아 만든 암굴 신전(Rock-cut temple)으로 대신전(Great Temple)과 소신전(Small Temple)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신전(Great Temple)은 람세스 2세 본인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기념 신전으로 해가 뜰 때 1년에 두 번(2월 22일, 10월 22일)만 신전 깊은 성소의 신상 3기에 햇빛이 정확히 비추는 태양 정렬(일조 현상)을 하였다.
소신전(Small Temple)은 람세스 2세의 왕비 네페르타리(Nefertari) 를 위해 건립하였는데 왕비 네페르타리를 여신 하토르(Hathor)와 동일시하여 봉헌하였다.
이집트 신왕국의 카르나크 신전(확장), 룩소르 신전(대규모 파문 pylon, 오벨리스크, 외부 조각 추가), 아부심벨 신전, 하트셉수트(Hatshepsut)의 데이르 엘 바흐리(Deir el-Bahari, 제18왕조) 신전 등의 신전 과학은 기하학과 천문학을 종합한 건축 시스템이자 “이집트 공학의 완성형”이다.
신전 축이 태양의 출몰과 일치하도록 정렬하였고 오벨리스크 제작에 수십 ~ 수백 톤의 대형 붉은 화강암(Red Granite) 석재를 견인하여 운반하였으며 신전의 정밀한 기둥 배열, 축 정렬, 대칭성을 극대화하고 신전 축선의 각도와 방위를 수학적으로 설계하였다.
람세스 2세 사후에는 아멘메세스(Amenmesse, 재위 약 BC 1203 ~ BC 1197, 람세스 2세의 후손 계통)의 난이 일어나는 등의 혼란이 있었고, 마지막 파라오인 투스레트(Twosret, 재위 약 BC 1188 ~ BC 1186)가 기원전 1189년 살해당하며 제19 왕조는 종료되었다.
투스레트를 살해한 세트나크테(Setnakhte, 재위 약 BC 1186 ~ BC 1182, 제20 왕조 창시자)는 기원전 1189년 이집트 제20 왕조를 세웠다.
사) 이집트 제3중 간기(BC 1077 ~ BC 664)
이집트 제3중간기는 BC 1077년 스멘데스 1세(Smendes I, 재위 BC 1077 ~ BC 1052)가 이집트 제21왕조를 세웠을 때부터이다. 이때부터는 신왕국 시대에 비해 왕권이 추락하고 왕조가 단절되자, 사위였던 리비아 계통 셰숑크 1세(Shoshenq I, 재위 BC 943 ~ BC 922)가 BC 943년 이집트 제22왕조를 세웠다.
BC 837년 타켈로트 2세(Takelot II, 재위 BC 845/834 ~ BC 820/809)가 반란을 일으켜 상이집트에 이집트 제23왕조를 세웠다.
BC 732년에는 테프나크트 1세(Tefnakht I, 재위 기원전 727 ~ 720)가 하이집트에서 이집트 제24왕조를 세웠으나 12년 만에 멸망했다.
BC 744년 누비아 인들의 쿠시 왕국(Kingdom of Kush, BC 785 ~ AD 350, 수단의 누비아 Nubia지방)의 군주인 피이(Piye, 재위 BC 744 ~ BC 714)가 스스로 파라오를 선언하면서 이집트 제25왕조를 세웠다. 이들은 BC 728년 제23왕조를, BC 720년에는 제24 왕조를, BC 716년에는 제22 왕조까지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다시 통일했다.
제25 왕조는 이집트에 유일한 흑인 계통의 군주들로 셰비쿠(Shebitku, 재위 BC 714 ~ BC 705), 타하르카(Taharqa, 재위 BC 690 ~ BC 664) 등 쿠시 왕국 출신의 왕들이 이집트를 통치하며 이어갔다.
아) 이집트 말기 왕조(BC 664 ~ BC 332)
이집트는 BC 7세기경 신아시리아 제국(New Assyrian Empire, BC 934, 911 ~ BC 609)에게 정복당한 이후부터 BC 332년 헬레니즘 제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하기 직전까지를 이집트 말기 왕조라고 한다.
이집트를 정복한 신아시리아는 직접통치를 하지 않고 네코 1세(Necho I, 재위 약 BC 672 ~ BC 664)를 파라오로 즉위시켜 이집트 제26왕조를 수립했다.
BC 650년경(제26왕조, Saite Dynasty, 사이스 왕조 시기)에는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일상용 문자인 데모틱(Demotic, 민용문자)으로 행정, 상업, 계약 문서에 사용하였다.
데모틱(Demotic, 민용문자)은 그리스 알파벳 등장 이전이고 이집트 문자의 후기 단계이다.
네코 2세(Necho II, 재위 BC 610 ~ BC 595) 때 신아시리아는 멸망했으나, 제26 왕조는 멸망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나 제26 왕조는 525년에 프삼티크 3세(Psamtek III, 재위 BC 526 ~ 525) 시기에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됨으로써 멸망했다.
BC 525년 이란 지역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d Dynasty, 약 BC 550 ~ BC 330)의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재위 BC 530 ~ BC 522)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파라오가 되었다.
페르시아의 이 제1차 지배기를 이집트 제27왕조라고 부른다. 캄비세스 2세는 폭정을 벌였으나, 다리우스 1세(Darius I, 재위 BC 522 ~ BC 486) 때는 관용적인 통치를 펼쳤다. 이렇게 120년간의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배기가 이어졌다.
BC 404년 아미르타이오스(Amyrtaeus, 재위 BC 404 ~ BC 399, 북이집트 델타지역 사이스 Sais를 기반으로 한 저항 세력 출신)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혼란한 틈을 타 이집트를 독립시키고 이집트 제28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BC 398년 네페리티스 1세(Nepherites I, 재위 BC 399 ~ BC 380)가 반란을 일으켜 아미르타이오스를 처형하고 이집트 제29왕조를 세웠다.
BC 380년 넥타네보 1세(Nectanebo I, 재위 BC 380 ~ BC 362)가 세운 이집트 제30 왕조는 BC 351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와의 전쟁을 시작하였고, BC 343년에 아케메네스 왕조에게 정복당하여 멸망했다.
이집트를 재정복 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xes III, 재위 BC 358 ~ BC 338,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왕)가 파라오에 즉위하여 페르시아의 2차 지배기인 이집트 제31 왕조 시대가 열렸다.
31 왕조 시기에 페르시아는 약탈, 파괴를 일삼다가 11년 만에 막을 내렸다.
* 이집트의 의식주
고대 이집트 의복의 주재료는 아마 식물의 섬유로 짠 리넨(Linen)이며 양털/염소털, 가죽, 파피루스나 야자 섬유 등도 일부 사용되었다.
인류는 일찍부터 사냥한 동물 가죽을 그데로 착용하였으며, 그 후 지방을 바르고 문질러 부드럽게 하거나 훈연하여 가죽의 부패를 막아 사용했다.
기원전 1550년경의 이집트 벽화에 가죽 제조 과정이 있으며 주로 샌들이나 일부 군인들의 보호대 등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식생활은 나일강의 비옥한 토양에서 밀, 보리, 야채, 과일 등을 '샤듀프(shaduf, 수동식 양수 장치)' 같은 도구와 소를 이용한 쟁기질로 토지를 경작했으며 빵과 맥주가 주식이었고 부식으로 양파, 마늘, 콩, 채소, 과일 등을 먹었다. 부유층은 육류(소, 거위)를, 일반 대중은 생선을 섭취했고, 꿀과 와인도 귀족층에서 애용되었다.
고대 이집트 건축은 초기에 갈대, 파피루스 등도 사용했으나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Mud Brick)과 석회암(Limestone), 화강암(Granite) 등의 석재(청동기시대 도구 제작 이후)를 주재료로 사용했다. 피라미드와 신전 등은 주로 석회암(Limestone, CaCO3, 물러 다듬기에 편리함)과 석재로 쌓았으며, 왕궁과 일반 주택은 진흙 벽돌과 목재(Wood, 이집트는 나무가 부족하여 구조재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주로 문, 천장 기둥, 가구 등에 사용)를 주로 사용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결합재로 석고 몰타르와 석회 몰타르가 있다.
석고 몰타르(Gypsum Mortar)는 석고(CaSO4)가루를 물과 혼합하여 만들었으며 피라미드와 같은 석조 구조물의 돌 사이를 채우거나 평탄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석회석(CaCO3)을 구워 만든 석회(CaO), 모래, 물을 혼합하여 만든 석회 몰타르(Lime Mortar)를 벽돌이나 돌을 접착하는 데 사용하였는데 석회 몰타르(Lime Mortar)는 시멘트와 콘크리트(석회 몰타르에 돌조각을 넣어 사용)의 원시적 형태이다. 로마에서는 석회와 화산재로 만든 포졸란 시멘트가 개발되어 로마 콘크리트가 발명되었다.
생석회(生石灰, 산화칼슘, CaO, quicklime)를 생산하는 방법은 석회석(탄산칼슘, CaCO3)을 약 900℃로 가열하면 생석회(산화칼슘, CaO)와 이산화탄소로 분리된다.
소석회(消石灰, 수산화칼슘, Ca(OH)2, Hydrated Lime)를 생산하는 방법은 생석회(산화칼슘, CaO)에 물을 가하면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물을 흡수하여 소석회(수산화칼슘, Ca(OH)2)가 되고 말리면 분말 형태가 된다. 이 과정을 생석회의 소화(Slaking)라고 한다
그리고 생석회(산화칼슘, CaO)가 다시 석회석(탄산칼슘, CaCO3)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생석회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CO2) 및 수분(H2O)과 반응하여 원래의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자연적인 탄산화(Carbonation) 과정이다. 이 과정은 수화반응과 탄산화반응으로 된다.
생석회(CaO)는 물과 강력하게 반응하여 수산화칼슘(Ca(OH)2, 소석회)이 된다(수화 반응 : 생석회 → 소석회).
생성된 소석회(Ca(OH)2)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CO2)와 반응하여 탄산칼슘(CaCO3, 석회석)과 물(H2O)로 변화하며 물이 증발하면 건조된 상태가 된다(탄산화 반응 : 소석회 → 탄산칼슘/석회석).
천연의 단단한 이수석고(Dihydrate, 석고, 石膏, gypsum, CaSO4•2H2O, 황산칼슘)를 약 150 ~ 200 °C로 가열하면 결정수의 일부를 잃고 분말 형태의 반수석고(Hemihydrate, 소석고, Plaster of Paris, CaSO4•1/2H2O)가 된다.
약간의 물에 반수석고를 혼합하면 석고몰타르가 되고 석고몰타르는 시간이 지나면 반수석고와 물이 반응하여 이수석고가 되어 굳어진다.
*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
이집트 상형문자(Hieroglyph, 히에로글리프)는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서 발견된 로제타석(Rosetta Stone, BC 196,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사제들에게 베푼 혜택을 찬양하는 칙령)을 단서로 1822년 프랑스 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 ~ 1832)이 이집트 상형문자가 그림(뜻)뿐만 아니라 소리(음)를 나타내는 표음문자 요소가 있음을 밝혀내어 해독했다.
로제타석 (Rosetta Stone)은 동일한 내용이 상형문자(신성 문자,神聖文字, Hieroglyph), 민중문자(Demotic), 그리스어(Greek, Hellenic) 3가지로 기록된 석판으로, 해독의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샹폴리옹은 해독되어 있던 그리스어와 고대 이집트어의 마지막 형태인 콥트어(Coptic)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 상형문자의 소릿값을 연결했다.
자) 헬레니즘 시대의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조, BC 332 ~ BC 30)
BC 334 ~ BC 330년 사이에 벌어진 알렉산드로스 3세(Alexander III, BC 356 ~ BC 323,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 제국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Darius III, 재위 BC 336 ~ BC 330,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페르시아 왕)의 아케메네스 왕조 간의 전쟁은 헬레니즘 제국이 BC 332년에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끝이 났으며 이집트인들은 11년간의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폭정에서 자유를 되찾았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i, BC 322 ~ BC 281,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헬레니즘 세계를 차지하기 위한 장군들 간의 권력 투쟁)에서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Ptolemy I Soter, 재위 BC 305 ~ BC 283)가 BC 305년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c Dynasty, BC 305 ~ BC 30,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이집트에서 건국된 헬레니즘 왕조)를 세웠다.
제32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하여 영화를 누렸다.
이때 이집트는 그리스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토착종교를 존중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상업이 활발하고, 여성의 상속권이 인정되며,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세워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자 고대 건축과 항해 기술의 상징인 파로스의 등대(Lighthouse of Pharos, BC 3세기), 세계 최고의 박물관 겸 도서관 등이 있는 선진문명국이 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BC 2세기쯤 군사력 유지가 어렵게 되자 왕조의 생존을 동맹국 로마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로마의 후원으로 번영하던 이집트는 결국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lulius Caesar, 기원전 100년 ~ 기원전 44) 사후 로마 내전에서 클레오파트라(Cleopatra VII Philopator, 재위 BC 51~ BC 30,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마지막 왕)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BC 83 ~ BC 30)와 연합하여 아우구스투스(황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 BC 63 ~ AD 14)와 대립하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로써 650년 동안 로마 시대가 시작되었다.
차) 로마 시대의 이집트(BC 30 ~ AD 641)
로마 속주인 이집트를 '아이깁투스(Aegyptus)'라 부른다. 로마 편입 이후에도 이집트는 동방의 중심지이자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로서 중대한 위치를 유지했다.
수도 로마는 대부분의 밀을 속주에서 공급받았는데 3대 곡창 중 한 곳이 이집트였기 때문에 이집트는 로마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이집트는 그리스 문화와 토착 문화, 기독교가 한데 섞인 매우 독특한 문화가 번영했다.
이집트는 언제나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고,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과 더불어 5대 총대주교좌 중의 하나로서 특히 아프리카 대륙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였다.
기원후 3세기경 그리스 알파벳(Greek alphabet)과 이집트 데모틱 부호(Demotic script)로 구성된 콥트 문자(Coptic alphabet, 후기 이집트 문자)가 이집트 기독교(콥트교)의 종교 문자로 사용되었다.
콥트 문자는 이집트어의 마지막 형태로, 오늘날까지 일부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 인도 인더스 문명((Indus Civilization, Indus Valley Civilization, BC 3000 ~ 2000)
인더스 문명(Indus Civilization)은 기원전 3,000년경 ~ 기원전 1,500년(청동기) 사이로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인도 북서부 지역인 인더스 강(Indus River) 유역에서 번성한 고대 문명이다.
인더스 문명은 단순히 인더스강 주변 지역이 아니라 가가-하크라강(ghahhar-hakra river) 유역까지 포함하는 폭과 길이가 모두 1,000km가 넘는 매우 광범위한 범위에 도시 유적이 250여 곳으로 어떤 문명보다 넓은 땅에 걸쳐 발달했다.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지는 인더스 강과 사라스바티(Sarasvati) 강 유역에 있는 BC 3300 ~ BC 1300 시기의 하라파(Harappa)와 모헨조다로(Mohenjo-daro)이다.
1920년대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하라파·모헨조다로 유적이 발굴되었다.
모헨조다로나 하라파의 유적은 BC 2,500년경의 것으로 정교한 도시계획을 가진 도시 문명의 흔적을 보여준다. 양자는 모두 같은 도시계획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총 네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 시가지에서 약간 높은 곳에 성채가 있으며 이곳에는 주로 제단과 공공시설이 있고 낮은 쪽에 일반 시민들의 주거지역이 집중된 구조를 보인다. 둘째, 도로는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 정연하게 조성되어 있고 셋째, 매우 정교한 배수시설을 가지고 있으며, 넷째, 집들은 견고한 구운 벽돌을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모헨조다로의 대목욕장, 동물무늬와 문자가 새겨진 인장(Indus Seal, 도장, 하리파, 모헨조다로), 춤추는 소녀 청동상(bronze dancing girl, 모헨조다로), 사제왕상(司祭王像, Priest-King Statue, 왕, 제사장으로 추정되는 인물상, 모헨조다로), 삼면신(三面神, Trimurti-like figure 또는 여신상, 모헨조다로) 등이 있다.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 인더스 문명에는 중앙권력 상징하는 왕궁·신전이 없어 왕이나 신권이 지배하지 않는 계획도시·공공시설 중심의 문명으로 평등하고 협동적인 시민 공동체적 성격을 지녔다.
인더스 문명의 유물인 채도(彩陶, 채색토기), 금은 세공품, 구리, 청동제 식기 등의 분포로 미루어 이란과 수메르 등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교역하고 있었으며, 멀리 나일강 유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가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인장처럼 생긴 유물은 같은 모양의 유물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도 많이 발견되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인장에 등장하는 악어, 코뿔소, 물소 등의 동물로 미루어 보아 오늘날보다는 습하고 숲이 우거진 환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장, 점토판에 새겨진 문자로 보아 인더스의 고유 문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나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들은 목화를 원료로 한 면을 옷감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이 인류 최초의 목화 재배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신앙생활을 위한 성채가 마련되어 있고, 여러 동물이 그려져 있어 자연물을 숭배한 흔적도 보인다. 시바신(Shiva, 고대 인도의 힌두교의 주요 신의 하나로 파괴와 재생, 변형을 상징하는 신)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삼면신(三面神, Trimurti-like figure, 여신상)이 발견되었으며, 수많은 동물에 둘러싸여 요가의 자세를 취하는 수행자의 모습이 인장이나 돌 위에 새겨놓은 그림이 있어 오늘날의 인더스인의 신앙인 힌두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나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던 인더스 문명은 BC 1900 ~ BC 1300년경에 갑작스럽게 멸망하였으며, 몰락의 원인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게 추측된다. 천재지변인 홍수로 인해 강이 범람하면서 붕괴하였을 것이라는 설, 고생물학적 연구에 따라 과도한 경작과 삼림파괴로 인한 환경의 변화로 붕괴하였다는 설, 이후에 이 지역에 들어온 아리아족(Aryans, 인도 유럽어족)과 같은 외적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는 설 등이 있다.
* 아리아 민족(Aryans, 인도-유럽어족)
아리아족(Aryans)은 인도 - 유럽어족에 속하는 민족으로, 인더스 문명이 쇠퇴한 기원전 1500년 경 카스피해 북쪽 지역에서 펀자브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갠지스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도시를 만들고 왕국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아리아 민족은 소수였던 데 비해 그 지배에 들어온 선주민들(인도 토착민족, 비(非) 아리아인, 드라비다족, Dravidians)은 절대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이에 소수의 아리아 민족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질서를 확고하게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인종적인 구별을 기초로 한 신분 제도인 바르나(Varna, 種姓, 종성) 제도를 만들었다.
* 바르나(種姓, 종성) 제도(Varna, 카스트 제도, Caste system)
BC 1500년경에 카스피해 북쪽 지역에서 인도에 이주한 아리아 민족(Aryans, 인도-유럽어족)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아리아족은 상위 계급인 브라만(Brahman), 크샤트리아(Kshatriya), 바이샤로(Vaisya)로, 비(非) 아리아족은 수드라(Sudra)로 나뉘어졌다. 이 제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종성(種姓, Varna, 출생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구분되는 계급)으로 분화되었는데, 각 종성(種姓)에 따라 직업과 신분이 세습되었다.
그 구분이 매우 엄격하여, 종성이 다르면 결혼까지 금지되었으며, 주거지 역시 구별되었다.
이 바르나(Varna, 종성) 제도를 훗날 포르투갈 인들은 '카스트 제도(Caste system)'라고 불렀다.
* 브라만교(Brahmanism)
브라만교(Brahmanism, BC 1000 ~ BC 500)는 카스트 제도(Caste system, 바르나, Varna)와 밀접하게 관련된 종교이다. 브라만교의 주요 교리는 환생설(還生說, Reincarnation, 윤회설)인데, 카스트 제도의 네 계급으로 구분되며 영원히 지금과 같은 계급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종교는 네 계급 중 가장상위에 있는 브라만(Brahman)의 종교로 볼 수 있으며 이에 브라만교(Brahmanism)라 불려진다.
* 시바(Siva)
힌두교의 신이며 원래 '길(吉)하고 좋은'을 뜻하는 형용사이며, 한글로 번역한 불교경전의 습파(濕婆)라는 글자를 적용하여 대자재천(大自在天) 또는 마혜수라(摩醯首羅)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시바'(Siva)의 기원은 인도 최고(最古)의 종교문헌인 '베다(Veda, 브라만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 BC 1500 ~ BC 500)'의 폭풍신 루드라(Rudra)에서 일반적으로 찾을 수 있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이 신의 기원을 인더스 문명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다.
라. 중국의 문명발상
중국의 문명발상지는 전통적으로 황허문명(黃河文明)을 중국 문명의 기원으로 보았으나, 1980년 ~ 2000년대에 발굴된 홍산문화를 중심으로하는 요하문명(遼河文明), 양자강문명(長江文明, 량주문화, 펑뚜산문화 등), 타이호(太湖) 유역, 쓰촨 청두 평원(三星堆문화) 등의 문명이 황허문명과 동시대 혹은 더 이른 시기의 문명 요소를 지님에 따라 “중화문명 다원기원론(中華文明 多元起源論, Multiregional Origins of Chinese Civilization)”이 등장했다.
중화문명 다원기원론은 중화문명이 하나의 지역(황허)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중국 여러 지역의 문명 중심지들이 동시에 혹은 연속적으로 발전하여 상호 교류하며 형성되었다는 이론이다.
다원 기원의 시기별 주요 문명 중심 지역은 다음과 같다.
A.북방 요하 유역(BC 6500 ~ BC 1500)
홍산문화(紅山文化) : 옥문화, 제사·여신신앙, 요하문명의 핵심
B. 중부 황허 유역(BC 5000 ~ BC 1600)
양사문화(仰韶文化), 룽산문화(龍山文化) : 중국 고전문명의 중심으로 발전
C. 남방 양쯔강 유역 (BC 5000 ~ BC 1500)
량주문화(良渚文化) : 정교한 옥기, 제사 중심 사회
D. 서남부 쓰촨 지역(BC 5000 ~ BC 1200)
산싱두이문화(三星堆文化) : 청동 조각과 신상, 독자적 청동기 문명
E. 산둥반도 및 동해안(BC 5000 ~ BC 1200)
다원커우문화(大汶口文化) : 조개·옥·청동의 교류 중심지
1) 요하문명(遼河文明, Liaohe Civilization, BC 6500년 ~ BC 1500년경)
요하(遼河) 유역인 랴오닝성(遼寧省), 내몽골 동남부, 허베이 북부 일대에서 수천 년 동안 이어진 문화 계통 전체를 말하며 시대순으로 요하문명을 구성하는 주요 문화는 다은과 같다.
가)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 BC 6200 ~ BC 5200)
흥륭와문화는 신석기 초기 ~ 중기 문화로 요하(遼河) 중상류의 랴오닝성 흥륭와(興隆洼), 하이룽 지역 등에서 발굴되었다.
요하문명의 시초이며 가장 이른 정착 농경의 흔적이 있다.
나) 자하이문화(查海文化, BC 5500 ~ BC 4500)
자하이문화는 신석기 후기 단계 문화로 랴오닝성 하이룽(海龍)·요하 중류 지역에서 발굴되었으며 농경문화의 초기 단계로 조·수수 등 곡물을 본격적으로 재배하였고 개, 돼지 등을 가축화하였으며 수렵·채집을 병행하였다.
대형 석조 용상(龍狀)이 발굴되었다.
다) 홍산문화(紅山文化, BC 4700 ~ BC 2900)
홍산문화는 니우허량(牛河梁), 홍산, 샤자점 등에서 발굴되었으며 신석기 후기문화로 요하문명의 전성기이다.
사회는 부락 연합 수준이며 지도층 혹은 제사장이 있는 초기 단계의 계층 사회이다.
종교적·제의적 목적의 정교한 옥용(玉龍, 용 모양 곡옥), 옥황(玉璜, 옥구슬), 옥인상(玉人像) 등이 발굴되어 홍산문화의 상징이며 원시 중국 옥문화의 대표가 되었다.
여신상, 옥용, 제단이 발굴됨에 따라 여신을 숭배하는 모계 중심 신앙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토기는 정교하고 얇게 만들어 구운 붉은색 계열이 발굴되었다.
라) 샤자덴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Xiajiadian Lower Layer Culture, BC 2000 ~ BC 1500)
샤자덴 하층문화는 랴오닝성 샤자덴(夏家店)에서 발굴되었으며 청동기 초기 진입 단계로 도구, 무기 등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마을에는 성곽이 있고 부족 연합체를 이룬 초기 국가 단계의 전단계이다.
마) 샤자덴 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 Xiajiadian Upper Layer Culture, BC 1200 ~ BC 600)
샤자덴 상층문화는 샤자덴(夏家店)에서 발굴되었으며 청동검, 청동촉, 청동거울, 청동기 장식 등 청동기 문화가 발달되었다.
정치와 종교가 일체였으며 초기 국가 단계로 발전하였다.
요하문명 쇠퇴기로 북방 유목세력과 교류하였다.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요하문명·홍산문화가 요동·요서 지역의 독립적 문명권으로, 한민족의 고조선 문화와 일정한 연관 가능성을 제시한다.
2) 황하 문명(黃河文明, Yellow River Civilization)
황하 문명(黃河文明, Yellow River Civilization)은 약 기원전 5000년경 ~ 1600년경 중국 북부의 황하강(黃河江, Yellow River) 중·하류 유역인 산시성(陝西省), 허난성(河南省), 산둥성(山東省) 일대에 농경 중심의 정착 사회로 시작된 중국 문명의 요람(搖籃)이다.
황하강(黃河江)은 매년 범람하지만, 비옥한 충적토가 쌓여 농경에 유리하였으며 황하 지역의 기후가 비교적 건조하여 농작물은 조(黍 서, 기장, Foxtail millet), 수수(粟 속, 蜀黍 촉서, sorghum), 콩 등을 재배하였고 가축으로는 돼지·소·양을 사육하는 등 황하는 농업과 목축이 결합된 초기 정착문화의 중심지였다.
BC 7000 ~ BC 5000년경에 허난성 일대에 신석기 문화 단계인 페이리강 문화(裴李崗文化, Peiligang culture)가 일어나 중국 신석기 초창기의 농경 시작과 토기·가옥의 흔적이 있다.
BC 5000 ~ 3000년경 산시·허난 지역에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Yangshao Culture)가 일어나 붉은 채도(彩陶), 원형 마을, 공동체 중심 생활을 영위했다.
BC 3000 ~ 2000년 경 산둥·허난 지역에 청동기 전단계 문화인 룽산 문화(龍山文化, Longshan Culture)가 일어나 흑도(黑陶)를 생산하고 성벽 도시를 건설했으며 사회 계층화가 일어났다.
BC 2000 ~ 1600년경 허난 지역에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Erlitou Culture)가 발생하여 청동기 초기 문화가 나타났다. 하(夏) 왕조와 관련이 있다고 추정한다
황하 문명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로, 중국 문명의 발달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농업, 문자, 제사, 정치체제가 형성된 최초의 문명이다.
조상 숭배, 천명사상, 예(禮) 중심 사회의 뿌리이며 황하의 범람을 극복하기 위한 치수(治水)를 우선으로 하는 전통을 형성하였다.
4) 양쯔강 문명(長江文明, Yangtze River Civilization)
양쯔강 문명(長江文明, Yangtze River Civilization)은 중국의 양쯔강(揚子江, 長江, Yangtze River) 하류 유역에서 발생한 신석기 ~ 청동기 시대의 문명이다.
대표적 유적지로 펑투산(彭頭山), 펑추산(澎楚山), 허무두(河姆渡), 량주 문화(良渚文化, Liangzhu Culture, BC 약 3300 ~ BC 2300년경 중국 양쯔강 하류 지역) 등이 있다.
중국 남부의 양쯔강(長江) 하류 유역인 장쑤(江蘇), 저장(浙江), 중류의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상류의 쓰촨(四川) 일대는 비옥한 충적평야와 온난하고 풍부한 강수량으로 조곡류(기장, 피, 수수류), 어(魚, 어로 漁撈, 물고기잡이), 벼농사 중심의 농경사회가 발달하였다.
후난성의 팽두산(彭頭山) 지역에서 약 BC 7000년경의 중국에서 가장 이른 벼 재배 흔적이 발견되었고 저장성의 허무두(河姆渡) 지역에서 약 BC 5000년경의 목조 건축, 벼농사, 도자기, 토템 신앙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저장성 항저우 근처 량주(良渚)에서 약 BC 3300 ~ 2200년경에 옥기 문화, 청동기 전단계 국가 수준의 사회를 형성했다.
양쯔강 문명은 세계 최초 수준의 습지 벼농사를 했으며 말뚝집(고상가옥, 高床家屋, Raised Floor House, Stilt House)과 돌괭이, 돌칼 등 정교한 석기가 출토되었고 토템 조상 숭배, 옥(玉)을 통한 제의적 신앙(祭儀的 信仰, Ritualistic Religion, 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에게 의식 ritual과 제사 祭祀를 통해 복을 구하거나 질서를 유지하려는 신앙)이 발달했다.
량주 문화(良渚文化, Liangzhu Culture, BC 약 3300 ~ BC 2300년경 중국 양쯔강 하류 지역) 시기에 계층이 분화되었고 정치권력의 중심화가 이루어졌다.
량주 문화는 하(夏) 왕조의 형성과 연계되었다는 견해도 있다(하 왕조의 뿌리가 양쯔강 하류 문화에 닿아 있다는 설).
황하 문명과 양쯔강 문명에 이어 하(夏), 상(商), 주(周) 왕조로 발전하였다.
* 삼황오제(三皇五帝)와 황하 문명, 양쯔강 문명
전설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삼황(三皇)은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이고 삼황(三皇)의 이설로는 복희씨(伏羲氏, Fuxi), 여와씨(女媧氏, Nüwa), 신농씨(神農氏, Shénnóng)라고도 하며 오제(五帝)는 황제 헌원(黃帝軒轅), 전욱(顓頊, Zhuānxū), 제곡(帝嚳, Dì Kù), 요(堯), 순(舜) 임금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삼황(三皇)과 오제(五帝)는 한 지역의 한 왕조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고 별개의 왕조이며 단지 옛 왕조를 합쳐서 부를 뿐이라는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신화와 황하 문명과 양쯔강(장강) 문명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내용상 성격을 관련 지워보면 오제(五帝)는 황하 문명에 가깝고 삼황(三皇)은 양쯔강(장강) 문명에 가깝다.
황하 유역은 조·밀 중심의 건조 농경 및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다.
황제·전욱·요·순의 오제(五帝)는 황하 문명권의 통치 질서의 정립을 강조하는 정치적 통합과 하늘의 뜻에 따른다는 천명사상(天命思想)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단계라 할 수 있으며, 실제의 역사시대(하·상·주 왕조)의 정치 이념과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양쯔강(장강) 유역은 신석기시대부터 벼농사 중심의 습윤 농경문명이 형성되었다.
삼황의 신농씨(神農氏, Shénnóng), 여와씨(女媧氏, Nüwa) 신화는 농경과 생명 창조, 의약과 치유, 혼인과 출산 등 자연과 생명 중심의 남방적 신화를 반영한다.
따라서 삼황(三皇)은 양쯔강(장강) 유역의 생명적 농경문화의 신격화로 볼 수 있다.
5) 서남부 쓰촨 문명, 청두 평원 문명(Chengdu Plain Civilization, 成都平原文明, BC 5000 ~ BC 1200)
청두 평원 문명은 약 BC 5000 ~ BC 1200년경(청동기 시대)에 양쯔강 상류 유역인 쓰촨성(四川省) 청두 평원 지역에 위치하며 대표적 유적지로는 산싱두이(三星堆), 진사(金沙)가 있다.
거대한 청동인상, 청동면구, 금장식, 옥기 등이 주요 유물로 출토되었다.
청두 평원 문명은 청동 제련술 매우 발달되었고 황하 문명과는 다른 양식이며 태양 신앙, 조상 숭배, 신적 인물을 숭배하였다.
후기의 황하 문명과 교류 흔적(옥기·청동기 형태의 유사성)이 있다.
청두 문명은 양쯔강 상류의 독립 청동기 문명으로,
황하 지역의 은(殷)·주(周) 문화와는 양식이 매우 다른 독자적 예술 세계를 가졌다.
청두 문명은 은(殷) 나라와 달리 갑골은 출토되었으나 글자가 없다
양쯔강 문명은 중국 남부의 농경 기반, 청두 문명은 남서부의 청동기 예술 기반을 대표하며 이 두 문명이 함께 중국 고대 문명의 다원적(多元的) 기원을 보여준다.
양쯔강 문명은 중국 남부의 농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청두 문명은 남서부의 청동기 예술을 기반으로 하며, 이 두 문명으로 보아 중국 고대 문명이 다원적(多元的) 기원이라 할 수 있다.
6) 하(夏, 夏王朝, 하왕조, 夏朝, 하조, Xia Dynasty)
하(夏, 하조, 夏朝) 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세습 왕조이다.
하나라(夏, 하조, 夏朝)는 기원전 2070년 ~ 기원전 1600년경에 신화상 중국에 존재했던 최초의 국가로 수도는 안이(安邑, 현 산시성 일대)이며 건국자는 우(禹) (치수의 영웅) 임금이었다.
요(堯)임금은 황제(黃帝)의 후손인 곤(鯀, Gun)에게 명하여 큰 홍수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곤(鯀, Gun)이 “쌓는 방식(堵水法, 두수법)”, 즉 제방을 높여 물을 막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제방이 터져 더 많은 물이 흘러 홍수 방어에 실패하였다.
우(禹)는 아버지 곤(鯀, Gun)이 물을 막는 방식으로 홍수를 방어했으나 실패하자 물길을 트는 방식(疏導法, 소도법)으로 대홍수를 다스린 치수(治水)의 업적을 순(舜) 임금에게 인정받아 후계자가 되었고, 사후 아들 계(啓)에게 왕위를 세습하면서 세습 왕조가 시작되었다.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阳市) 근처의 이얼리터우촌(二里頭村)에서 BC 1900 ~ BC 1500년경(하夏 왕조에서 상商 왕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이얼리터우(二里頭, 얼리터우, Erlitou) 유적을 발굴하였다.
이얼리터우(二里頭, 얼리터우, Erlitou) 유적에서 계획된 도성 구조, 도로망, 궁전터 발견되었으며 청동기와 옥기, 제사 유물 다수가 출토되어 중국 최초의 청동 예기(禮器) 제작 중심지로 유적지가 문헌 속 하(夏) 나라 시대와 연대가 일치하고 국가 체제와 계층 구조가 형성된 흔적 등으로 중국 학계는 하(夏) 왕조가 실존했다는 유력한 증거로 주장하고 있다.
하나라 유적지에서는 점복문이 새겨진 갑골문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얼리터우(二里頭, 얼리터우, Erlitou) 유적지에서 문자가 없는 갑골이 출토되었다. 동물 뼈와 거북이 등껍질이 불에 그슬리거나 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어 이 시기에 이미 갑골을 이용한 점복 행위가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된다.
하(夏) 왕조는 걸(桀, 폭군으로 알려짐) 임금 때 멸망했으며 상(商, 은) 나라로 계승되었다.
* 삼황오제(三皇五帝)
삼황(三皇) :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삼황 이설 : 복희씨(伏羲氏), 여와씨(女媧氏), 신농씨(神農氏),
오제(五帝) : 황제 헌원(黃帝軒轅), 전욱(顓頊, Zhuānxū), 제곡(帝嚳, Dì Kù), 요(堯), 순(舜)
7) 상(商) 왕조(은殷 왕조, BC 약 1600 ~ BC 1046)
상(商) 왕조(BC 약 1600 ~ BC 1046)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확실한 왕조로, 갑골문과 고고학 자료로 실존이 확인된 첫 국가이다.
상(商) 왕조의 건국자는 성탕(成湯, Tang)으로 하(夏) 왕조의 걸(桀)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세웠다. 이를 “탕의 혁명(湯之革命)”이라 부른다.
8대 하단갑(河亶甲)은 상 왕조의 중심세력을 확립하고 제사제도를 정비하였고 11대 남경(南庚)은 농경과 천문 관측 제도를 확립하였다.
12대 판경(盤庚)이 상(商)의 수도를 하탕(河湯)에서 은(殷, 현재의 안양)으로 옮김에 따라 이후 “은(殷) 왕조”라고도 불리고 은허(殷墟)가 시작되었다.
15대 무정(武丁, 재위 BC 1250 ~ BC 1192)은 상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왕비 부호(婦好)와 함께 주변 부족을 정복하고 중앙집권 강화하였으며 갑골문이 발달되었고 청동기의 예술 수준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29대 주(紂)가 상(商)의 마지막 왕이다
주(紂)는 초기에 유능했으나 말기에 폭정과 사치로 민심을 잃었고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패하여 상 왕조가 멸망(기원전 1046)하였다.
상은 청동기 문화의 절정기이자 갑골문을 통한 문자 기록이 시작되었고 왕권 중심의 신권 정치(神權政治)와 조상 제사 중심 문화가 확립되었다.
15대 무정(武丁) 시대가 전성기로 정치·군사·문화 등이 최고 수준이었고 출토된 대부분의 갑골문이 이 시기의 것이다.
* 갑골문자(甲骨文字)
갑골문은 거북 배딱지와 소의 어깻죽지 뼈(용골, 龍骨)에 새긴 글자이다. 그래서 거북 배딱지를 나타내는 갑(甲)과 소뼈의 골(骨)에 새긴 글을 갑골문이라 한다.
1899년 북경국자감 제사(祭酒, 지금의 총장급 관리)로 있던 왕의용(王懿榮, Wang Yirong, 1845 ~ 1900, 금석문 전문가)이 병을 앓게 되어 한약을 지을 때, 약재상으로부터 한약 재료인 ‘용골(龍骨, 거북 껍데기와 동물 뼈)’을 구입했다. 한약 재료인 ‘용골(龍骨)’ 속에서 신비한 문양이 새겨진 뼈를 발견하고, 이것이 고대 문자임을 처음 알아내고 용골문(龍骨文), 은문(殷文)이라 하였다.
그리고 용골의 발굴 장소가 고대 은(殷) 왕조의 마지막 수도, 은허(殷墟)가 있던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阳市) 소둔(小屯) 마을 일대임을 밝혀냈다.
하지만 왕의용은 의화단 사건(1900) 때 청조 관리로서 베이징 방어를 맡았다가 실패하여 자결함으로써 연구를 이어가지 못했다.
유악(劉鶚, 1857~1909, 금석문 연구가, 소설가, 관리)이 왕의용의 수집품을 간접적으로 이어받아 갑골문을 정리·분류하고 본격적으로 학문적 연구를 진행하여 '철운장귀(鐵雲藏龜, 1903)'를 출판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후에 나진옥(羅振玉)과 동작빈(董作賓)으로 학문 연구가 이어졌으며 ‘갑골문(甲骨文)’이라는 이름은 왕국유(王國維, 1877 ~ 1927)가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사용하고 정착시켰다.
갑골문은 점복(占卜) 기록이 새겨진 것이다.
점을 칠 때 신에게 묻는 내용을 큰 소리로 말하면서 거북의 배딱지나 소의 어깻죽지 뼈에 불에 달군 인두로 구멍을 뚫었다. 그러면 갑골이 열에 갈라지면서 소리를 냈다.
점치는 사람은 갑골의 갈라진 금을 보고 점괘를 읽었다.
그러고 나서는 갑골 위에 점칠 때 물은 내용과 점괘를 그 갑골에 칼로 새겨 보관하였다.
갑골문의 내용은 제사와 농사, 전쟁과 수렵에 관한 것이 가장 많고, 그 밖에 왕의 통치나 질병, 재앙에 관한 것도 있다.
이후 20만 개에 가까운 갑골이 더 발견되어 무려 4천 자에 해당하는 글자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갑골문은 중국 문자의 기원을 밝히는 결정적 자료이며 상 왕조의 실재(實在)를 입증한 고고학적 증거이다.
갑골문(甲骨文, BC 13세기 ~ BC 10세기)은 후대의 금문(金文, BC 3세기, 청동기 명문)에서 전서(篆書, BC 3세기)로, 예서(隸書, AD 3세기 초)로, 해서(楷書, AD 2 ~ 7세기)로 이어지는 중국 문자 발전의 출발점이다.
* 부호(婦好)의 무덤
1976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阳市) 은허(殷墟) 서북쪽 샤오툰(小屯, 소둔) 마을 근처에서
상 왕조 15대 왕 무정(武丁)의 왕비(BC 13세기경, 상 왕조 중기)인 부호(婦好, Fu Hao)의 무덤이 도굴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상나라 왕 무정(武丁)의 여러 왕비 중 한 명인 부호(婦好)는 여성 제사장, 군사지도자, 정치가로 활동한 유명한 인물로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주변 부족을 정벌했으며, 풍백·하백 등 신에게 제사를 주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중국 역사상 실명이 기록된 최초의 여성 장군이다.
부호(婦好)의 무덤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지하 약 7.5m 깊이, 길이 5m의 묘실이 있으며 그 속에서 약 1,900점 이상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400여 점의 청동기로 정(鼎, 제사용 솥), 유(卣, 술그릇), 제기(祭器), 무기(武器), 도구 등과 700여 점의 옥기, 갑골문이 새겨진 점복용 뼛조각 등의 출토되었다.
이들 부장품은 상나라의 청동기 제작 기술이 최고 수준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며 도시 건축, 도로, 농업, 천문 관측 등 여러 분야에서 문명 수준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주(周) 나라
상(商, 은, 殷) 나라 말기 주왕(紂王, 재위 약 BC 1075 ~ BC 1046)의 폭정으로 상(商, 은, 殷) 나라가 혼란했다.
이때 상(商, 은, 殷) 나라의 제후국인 주(周) 나라의 문왕(주문왕, 周文王, BC? ~ BC 1050경)은 세력을 확장했다.
서쪽 지방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강력한 기반을 닦아, 상나라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었다.
주문왕(周文王)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무왕(武王, )이 목야(牧野) 전투(牧野之戰, BC 1046년경, B.C. 1027, 뤄양 근처)에서 상(商) 나라 제29대 주왕(紂王, 재위 약 BC 1075 ~ BC 1046)을 격파하여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 왕조(BC 1046 ~ BC 256)를 세웠다.
초기의 수도는 호경(鎬京, 시안 부근)이었고 BC 770년에 동쪽에 있는 낙읍(洛邑, 뤄양)으로 천도하였다.
그래서 수도가 호경(鎬京, 하오징, 시안 부근)인 시기를 서주(西周, BC 1046 ~ BC 771)라 하고 수도가 낙읍(洛邑, 뤄양)인 시기를 동주(東周, BC 770 ~ BC 256)라 하여 구분한다.
가) 서주(西周, BC 1046 ~ BC 771)
서주(西周)는 수도를 호경(鎬京, 하오징, 시안 근처)으로 정하였고 정치 형태는 봉건제(封建制)로 왕이 혈연관계나 귀족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고 제후로 봉하였으며 제후 아래에는 경(卿, 제후국 내의 최고 관리층), 대부(大夫, 경 아래의 중간 귀족 행정·군사 실무 담당), 사(士, 하급 귀족 또는 관리·무사층, 훗날 “선비” 계층의 기원), 평민(庶人, 농민·상인 등 일반 백성 정치적 권리 없음), 천민(奴隸, 노예 신분 노동 제공) 계층이 있었다.
귀족 중심의 신분제 사회로 혈연을 중심으로 질서가 유지되는 종법제(宗法制)였으며 농업 중심의 경제이고 우경(牛耕, 소 이용한 경작)이 시작되었다.
하늘이 덕 있는 왕조를 선택한다는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믿었고 질서와 조화를 중시하는 예악제도(禮樂制度)가 발달하였다.
정교한 청동 제기(祭器)의 제작 기술이 발달하였고 문자는 갑골문에서 금문(청동기에 새긴 글자)으로 발전하였으며 태음태양력과 24 절기의 역법을 사용하였다.
왕은 제후인 귀족과 왕족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왕권과 귀족의 권력이 병존하는 구조였다.
말기에는 봉건 제후들이 점점 강해지고 왕실이 약화되었다.
서주(西周) 마지막 왕 유왕(幽王, 재위 BC 781 ~ BC 771)은 실정(失政)을 하였으며 특히 기원전 771년, 총애하던 포사(褒姒)를 위해 정실부인 신후(申侯)를 내쫓고 왕세자(의구, 宜臼)까지 폐하였으며 포사(褒姒)의 아들을 세자로 삼았다.
이에 정실부인 신후(申侯)가 분노하여 이민족 견융(犬戎, Quǎnróng, 중국 서쪽의 유목민족으로 비(非) 중화 세력)과 손을 잡았다.
견융(犬戎, Quǎnróng, 중국 서쪽의 유목민족으로 비(非) 중화 세력)이 서주(西周)를 침입하여 수도를 함락시켰고 유왕(幽王, 재위 BC 781 ~ BC 771)은 전사하여 서주가 멸망했다.
나) 동주(東周, BC 770 ~ BC 256)
주 유왕(周幽王, 재위 BC 781 ~ BC 771)이 견융(犬戎, Quǎnróng, 중국 서쪽의 유목민족으로 비(非) 중화 세력)의 침입으로 하오징(鎬京)에서 전사하여 주 왕실이 붕괴되자 신후(申侯), 진후(秦侯) 등 제후들이 유왕의 처음 세자였던 의구(宜臼, 희림 姬宜臨)을 주 평왕(周平王, 재위 BC 770~BC 720)으로 옹립하였다.
주평왕(周平王)은 남은 왕족과 신하들과 같이 견융의 세력을 피해 동쪽의 낙읍(洛邑, 뤄양)으로 도망갔다.
낙읍(洛邑, 뤄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이민족(견융 등)의 침입 위험을 줄이고 동쪽에 제후들이 많아 그들의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있어 보다 안전하고 또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동쪽의 낙읍(洛邑, 뤄양)으로 천도하였던 것이다.
동주(東周)의 왕권은 천도 후 제후들의 도움으로만 유지될 수 있게 되어 실질적으로는 힘을 잃고 형식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120여 개의 제후국의 제후들은 각자 세력을 키워 제후국 간 패권 경쟁을 하는 춘추시대(春秋時代, BC 770 ~ BC 403)가 시작되었다.
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 ~ BC 221)
제후국들이 세력을 키워 스스로 왕(王)을 칭하고 제후국 간의 외교, 동맹, 배신이 이어졌으며 끊임없이 전쟁을 하였다.
동주(東周) 왕은 완전히 형식적인 존재였다.
칠웅(七雄)의 제후국들이 등장하여 싸움이 격화되었다.
칠웅(七雄)은 진(秦), 초(楚), 연(燕), 한(韓), 조(趙), 위(魏), 제(齊) 나라이다.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등장하여 사상적 발전을 가져와 중국 사상의 황금기였다.
이들 제후국들의 대표적 패자(覇者)는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 등이었으며 최종적으로 진(秦)이 제후국들과 동주(東周)를 멸망(BC 256)시키고 전국을 통일하였다.
* 실크(Silk), 대마(大麻, Hemp, 삼), 저마(苧麻, Ramie, 모시풀)
뽕잎으로 기른 누에가 만든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 직조한 것이 견직물(絹織物, 비단, 緋緞, 실크, Silk)이다.
중국의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지역에서 기원전 5,000년 ~ 3,000년경에 양잠 흔적이 발견되었다. 중국이 양잠기술의 유출을 막았으나 서서이 실크로드를 따라 아시아와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
대마(大麻, Hemp, 삼)는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이며, 인류가 섬유를 이용하기 위해 재배한 가장 오래된(B.C. 8000 이전) 식물 중 하나이다.
대마(大麻, Hemp, 삼) 줄기의 껍질을 벗겨서 만든 천연 섬유로 짠 천이 삼베(마포, 麻布)이다.
저마(苧麻, Ramie, 모시풀)는 원산지가 동남아시아 및 중국 일대로 추정된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주요 섬유 작물로 저마를 재배하여 줄기의 껍질을 벗겨서 만든 천연 섬유로 모시(저포, 苧布)을 짰으며, 한국에서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모시가 주요 옷감으로 사용되었다.
마. 올멕 문명(Olmec civilization)
올멕 문명(Olmec civilization)은 멕시코 만 연안의 열대 저지대인 베라크루스(Veracruz) 및 타바스코(Tabasco, 멕시코의 남동부, 베라크루즈의 동쪽) 지역에서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전 400년경까지 번성했던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 멕시코 중남부와 중앙아메리카 북서부 지역의 문명권)지역의 최초 문명으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어머니(mother culture)”라고 한다.
'올멕(Olmec)'이라는 명칭은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이 아즈텍어인 ‘올메카틀(olmecatl, 고무나무 사람들, Rubber People)'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며, 본래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주요 유적지로는 멕시코 베라크루즈 주에 있는 산 로렌소(San Lorenzo)는 시기가 기원전 1200 ~ 기원전 900년경으로 가장 이른 지역이고 유적의 중심지이며 멕시코 타바스코주에 있는 라 벤타(La Venta)는 종교·의례 중심지이며 그리고 멕시코 베라크루스 주에 있는 트레스 사포테스(Tres Zapotes)는 올멕 문명의 후기 단계이다.
각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다음과 같다.
엘 마나티(El Manatí) 유적은 올멕 문명의 기원 단계로 위치는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산 로렌소 인근 저습지(샘·습지 지역)이고 시기는 기원전 1600 ~ 기원전 1200년경이며 거주 도시가 아닌 자연 성소(自然聖所, natural shrine, 자연 그데로의 성소)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무공(Rubber Balls, 직경 약 10 ~ 20cm)이 발굴되었고 인간 얼굴 형태의 목제 흉상(Wooden Busts)이 불굴되었으며 옥, 사문석(serpentine, 녹색임) 제물과 옥 도끼(celts), 구슬, 장신구가 발굴되었다.
자연 성소(自然聖所, natural shrine)는 인공 신전(人工神殿, artificial shrine, 인간이 의도적으로 건설한 종교·권력의 상징 건축물) 이전의 자연 숭배 신앙으로 올멕 신앙의 원형이다.
산 로렌소(San Lorenzo)에서 발견된 거대 석상(Colossal Heads, 거석 두상)은 현무암 바위를 깎아 만든 10개의 거대한 인물 두상(높이 1.17m ~ 3.4m)으로 올멕 문명의 상징이며 헬멧을 쓴 인물상은 지배자나 전사로 해석한다.
고무공을 이용한 의식용 경기장(메소아메리카 볼게임, Mesoamerican Ballgame) 흔적이 있다.
산 로렌소(San Lorenzo)에는 제례 중심지 유적이 남아 있다.
석좌·제단형(Altars, Thrones) 석조물은 앞면이 움푹 들어간 ‘동굴형’ 구조이며 인물이 동굴(지하 세계, 신성 공간)에서 나오거나 아이를 안고 있어 통치자가 신적 권한을 부여받는 장면으로 해석한다.
도시에는 현무암 수로(배수로)를 설치하였고 일종의 토루(土壘, mound, 흙·점토·자갈을 쌓아 올린 신성한 인공 기반)인 인공 테라스(Artificial Terrace, 구릉·고지을 깎고 메워 평탄화해 만든 계단식 또는 평평한 대지)를 건설하여 도시 중심부를 평탄화하였다.
산 로렌소(San Lorenzo)는 중심 기능이 왕정이 처음 시작된 정치·행정이고 종교 시설은 비교적 제한적이고 대형 인물 중심의 조각물이 있으며 도시 성격으로 지배자의 공간이었다.
기원전 약 900 ~ 기원전 400년경에 번성한 라벤타(La Venta) 지역에는 인공 대피라마드(Complex C, 높이 약 34m, 밑변 지름 약 128m, 점토와 흙으로 만듬, 본격적인 토루, 土壘, mound)가 있으며 제의(祭儀, ritual)의 중심지였다.
라벤타 지역 발굴의 핵심인 대광장과 의례 복합체(Complex A)는 모자이크 제단과 사문석(serpentine) 블록으로 만든 지하 모자이크, 그리고 재규어·우주 질서 상징(재규어는 자연 최강자로 자연 질서의 절대성을 나타내며 생과 사의 경계자이고 신과 인간의 결합이며 지상과 지하를 잇는 매개자이다.)이 있으며 옥, 사문석, 토기 인형 수백 개를 의례용으로 매장하였다.
거석 두상(Colossal Heads)이 4기 이상 발견되었는데 각기 다르게 인물을 묘사하였고 투구 형태로 보아 통치자·전사로 여겨져 사회 계층화·왕정 체제의 강력한 증거이다.
석비(Stelae)와 제단에는 인간과 신적 존재가 결합된 형상으로 통치자의 의례적 역할 강조하는 신화·시간·왕권의 결합을 나타내고 있다.
트레스 사포테스(Tres Zapotes) 유적은 기원전 400년경 ~ 기원후 300년경의 올멕 문명의 후기 단계이며 흙으로 만든 피라미드 형 신전에 의례용 제단과 조각 양식이 있으며 기원전 1세기에 세워진 트레스 사포테스(Tres Zapotes) 석비 C에 새겨진 장주기력(Long Count) 날짜로 해석되는 숫자 표기가 새겨져 있는데 완전한 문자인지에 대한 논쟁 중이나 초기 문자 체계의 흔적과 장주기력(달력)의 원형이라고 여겨진다.
트레스 사포테스 유물에 거석 두상(Colossal Head A, B)이 2기 이상 발굴되었이며 토루(土壘, mound, 흙·점토·자갈을 쌓아 올린 신성한 인공 기반)와 건축물은 소규모로 분산되어 있고, 장주기력과 석비·구조물의 방향성 등으로 보아 태양·계절을 관측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기 석조 조각으로 인물과 기호로 조합되었으며 초기 문자 체계의 실험 단계로 해석한다.
올멕 문명은 거대 석상, 의식용 제단(피라미드), 계획적 거리 배치, 흑요석, 헬멧 등 장식품 등의 근거로 사회 계층제, 왕정체제의 기틀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올멕 문명은 옥수수, 콩, 호박 등을 재배하여 안정적인 식량을 생산함으로서 도시가 형성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재규어, 뱀, 독수리 등 동물을 신격화하여 재규어 인간 등 동물신, 자연신 중심의 종교였다.
올멕 문명의 쇠퇴 원인은 불확실하지만 환경 변화(홍수·토양 황폐), 내부 사회 갈등, 권력 구조 붕괴 등이라고 추정한다.
올멕 문명은 메소아메리카 복합 문명의 시초로 마야·아즈텍 문명의 문화적 토대가 되었으며 종교·미술·도시 계획의 원류이다.
바. 안데스 문명(Andean civilizations)
콜롬비아 고지대에서 칠레 북쪽의 태평양 연안의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달한 다양한 문화들이다.
안데스 문명이 태평양의 좁은 해안 평야에서 처음으로 발전했다고 믿는다.
안데스의 주요 문명을 보면 차빈 문명((Chavín Civilization, BC 900 ~ BC 200, 페루 안데스 산맥 고원 지역, 우카이알리·란드 마을 중심)은 초기의 종교를 중심으로 거대한 신전의 건축과 조각·도기가 발달했다.
나스카 문명(Nazca, AD 100 ~ AD 800, 페루 남부 해안, 나스카 계곡 중심)은 관개 농업이 발달했다.
모체 문명(Moche, AD 100 ~ AD 700, 페루 북부 해안, 모체강 계곡, Moche Valley)은 계급 사회로 토기·청동 기술이 발달했으며 관개·제방을 건설했다.
티와나쿠(Tiwanaku, AD 400 ~ AD 1000, 볼리비아 고원 중심)는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 근처에 있었던 도시국가로 거석 건축, 농업 기술 등이 발달했다.
기원전 1580년에서 서기 1200년까지 약 2700여 년 동안 존속했다. 아카파나(Akapana)와 푸마푼쿠(Pumapunku)는 티와나쿠의 중요한 유적지이다.
와리(Wari, AD 600 ~ AD 1000, 페루 중부 고원 지역, 특히 아야쿠초 Ayacucho 중심)는 중앙집권적 도시 국가로 도로·행정 체계가 발달했다.
페루 해안의 노르테 치코 문명(Norte Chico, BC 3500 ~ BC 1800)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고 이곳에 카랄(Caral, 카랄-수페 문명 Caral-Supe, 페루 북중부 해안)이 있다.
노르테 치코는 건조한 태평양 연안의 계곡에 정착지와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건설하였고 농업과 어업을 기반으로 경제 활동을 하였으며 자원으로 면(cotton)을 사용했다.
강력한 사회 조직이 있었으며, 상호 작용과 협동을 통해 번영했다.
카랄에 있는 피라미드와 같은 대규모 건축물로 보아 기술이 상당하였고 사회 조직이 잘 되어 있었다는 알 수 있다. 이는 고대 아메리카 문명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으며 잉카 제국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잉카 제국권 밖에 있는 베네수엘라의 안데스 지역의 메리다, 트루히요, 타치라 주에 있는 티모토 쿠이카(Timoto Cuica, BC 900 ~ AD 1500)는 티모테(Timote)와 쿠이카(Cuica)라는 두 주요 부족과 여러 소수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농업, 야만적인 산업, 그리고 무역에 집중한 문화적 특징이 있다.
잉카(Inca, AD 1438 ~ AD 1533, 안데스 최대 제국, 쿠스코 중심)는 제국적 중앙집권 체제로 언어, 문화, 민족이 얽혀 있었다
안데스 문명은 기념비적인 건축물, 광범위한 도로망, 직물 직조 등이 발달했다
안데스 문명은 다양한 작물을 재배했으며 그중 감자, 고추, 땅콩, 마니옥, 초콜릿, 코카와 같은 일부 작물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작물이 되었다.
사.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
그리스의 청동기 시대에는 미노스 문명(Minoan Civilization, BC 3650 ~ BC 1170, 크레타 문명, 선형문자 A Linear A 사용), 키클라데스 문명(Cycladic Culture, BC 3300 ~ BC 2000, 에게해 중부의 키클라데스 제도),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 BC 1600 ~ BC 1100, 미케네, 티린스, 피로스 등 그리스 본토 남부, 선형문자 B Linear B 사용, 트로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에게해 문명(Aegean Civilization, BC 3650 ~ BC 1100, 그리스 본토, 크레타 섬, 키클라데스 제도)이 있었다.
호메로스(Homer, BC 8세기)의 작품인 일리아스(Iliad, 트로이 전쟁이 배경)와 오디세이(Odyssey, 트로이 전쟁 후 오디세우스의 귀환 여정)에 청동기인 미케네 시대의 해상무역, 섬과 해안 지역 문화, 군사·무역 체계 등이 묘사되어 있다.
기원전 1100년경은 그리스 암흑기(Greek Dark Age, BC 1100 ~ BC 750, BC 776년 최초의 고대 올림피아 경기 개최, 해외 민족 침입, 도시 붕괴, 인구 급감, 문자 상실, 무역 단절, 철기 사용)가 시작되던 때이다.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그리스 본토(Greece proper)에 있었으나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시대인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BC 510 ~ BC 323)와는 많이 달라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로 보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는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146년 로마에 정복당하기까지이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46년 로마-그리스 전쟁(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BC 146)과 이케아 전쟁(BC 146)에서 고대 로마에게 패하여 정복당하였다.
고대 그리스는 메소포타미아와 지리적 시대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아나톨리아(소아시아) 경유하여 히타이트, 트로이, 미케네 문명과 교류하였으며 에게해 무역을 통해 크레타(미노아)에서 그리스 본토로 문화가 전파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고대 그리스에 간접적으로 폴리스(도시국가), 문자, 법, 천문학, 홍수 신화, 신들의 역할, 점성술, 달력 체계 등 여러 분야에서 기초적 모델을 제공했고 고대 그리스는 이를 참여적·민주적·군사적 구조로 재해석하여 자신들의 문명으로 발전시켰다.
1)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의 시대별 구분
가) 그리스 암흑기(Greek Dark Ages, BC 1100년경 ~ BC 750년경)
이 시대에 철기 사용이 시작되었고 선형문자 B가 사라져 공백기가 되었다.
헤로도토스(Herodotus, BC 484 ~ BC 425)의 '역사(Historiai, 최초의 역사서)'나 파우사니아스(Pausanias, AD 110 ~ AD 180)의 '그리스 안내기 (Description of Greece)', 디오도로스 시켈리오테스(Diodorus Siculus, BC 90 ~ BC 30)의 '역사집(Bibliotheca historica)', 카르디아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of Cardia, BC 354 ~ BC 250)의 '크로니콘(Chronicon, 연대기 年代表, chronicle)' 등 2차 3차 사료에 단지 짤막한 연대기와 임금의 목록을 담고 있을 뿐 이 시대에 관하여 확실하게 알려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암흑기라고 한다.
미케네 문명 붕괴 후 대규모 인구 이동(도리아인 침입 등)이 있었다.
농촌 중심의 작은 촌락(코메, kome) 사회가 생겨나고 족장 중심의 혈연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나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였다.
특이하게 도기에 기하학적 문양을 넣었다.
암흑기(BC 1100 ~ BC 750)의 후반부인 기원전 9세기경(약 BC 900 ~ BC 800)에 고대 그리스 본토 및 에게해 지역에서 페니키아 문자(Phoenician script)를 도입하고 모음을 추가하여 그리스 알파벳(Greek Alphabet)을 만들었다.
그리스 알파벳(Greek Alphabet)을 사용한 가장 오래된 예로는 약 BC 740년경 디피론 항아리 비문(Dipylon inscription)이다.
그리스 알파벳(Greek Alphabet)은 현대 알파벳(라틴문자, 키릴문자 등)의 기초가 되었다.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 문명 (Sumer, Mesopotamia)에서 태음력을 최초로 사용하였으며 이어서 수메르에서 BC 3000 ~ BC 2000년경에 태양년과의 오차를 보정하기 위해 윤달을 도입한 태음태양력(lunisolar calendar)을 만들었다.
BC 2000년경에 바빌로니아는 수메르의 태음태양력을 계승하였다.
BC 800년경부터 그리스의 태음태양력(lunisolar calendar)은 바빌로니아 달력(Babylonian calendar, 태음태양력)을 받아들여 형성되었다.
나) 그리스 상고기(고식기, Archaic Greece, BC 750년경 ~ BC 480년경)
그리스 상고기는 폴리스(polis, 도시국가, city-state)의 형성기로 촌락을 통합(synoikismos, 시노이키스모스)하여 도시국가를 형성(예: 테세우스가 아티카 지역의 마을을 통합하여 아테네 형성)하였다.
이 시기에 공동의 신전, 성벽, 아고라((Agora, 폴리스의 공공광장)를 건설하였고 BC 8세기경 문자(페니키아 문자를 도입하여 그리스 알파벳화)를 부활하였으며 정치는 귀족정(Aristocracy) 중심으로 왕권은 약화되었다.
렐란토스 전쟁(Lelantine War, BC 710년경 ~ BC 650년경)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기록에 남은 전쟁으로 폴리스인 칼키스(Chalcis)와 에레트리아(Eretria) 사이에 에우보이아(Euboea) 섬의 비옥한 렐란토스 평야(Lelantine Plain)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칼키스가 승리했으나 오랜 전쟁으로 두 도시 모두 쇠퇴하였다.
이때에 형식적이고 경직된 양식의 입상 조각이 만들어졌으며 이 작품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고기 미소(archaic smile)'를 보인다. 상고기의 종식 연대는 종종 아테나이(Athenai, Athens, 아테네)의 마지막 참주 정권(僭主政權, Tyranny, 비합법적으로 집권한 권위주의적인 지배자)이 전복되고 아테나이 민주주의가 시작된 기원전 510년으로 잡기도 한다.
다)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BC 500년경 ~ BC 323년)
그리스 고전기를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시대로 본다.
그리스의 폴리스(polis, 도시국가, city-state)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시민 공동체(citizen community)”의 정치, 종교, 경제, 문화 중심지였다.
폴리스는 본토에만 200개가 넘었고, 소아시아에서 에게 해와 지중해 일대에 건설된 식민시까지 합치면 1000개가 넘었으나 각 도시의 넓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폴리스의 중심을 이루는 공간은 다음과 같다.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높은 도시’를 의미하며 방어와 신전이 있는 종교 중심지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Parthenon, BC 447 ~ BC 432, 아테나 여신)이 고전기의 대표이다.
에렉테이온 신전(Erechtheion)은 기이한 구조, 카리아티드 기둥(Caryatid, 여성 인체 조각상이 기둥 역할) 등으로 고전기의 종교적 상징성과 건축미의 절정을 보여준다.
프롭라이아(Propylaea)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Akropolis)의 ‘정문(正門)이고 니케 신전(Temple of Athena Nike)은 승리의 여신 아테나 니케(Athena Nike)를 모신 신전이며 아고라(Agora)는 ‘광장’으로 정치, 상업, 토론의 중심지(민회와 재판, 시장이 열림)였다.
작은 촌락인 코메(Kome)가 주변 농촌 지역에 형성되어 폴리스(Polis)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으며 주거 지역으로 시민들의 생활공간이었다.
BC 499년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그리스 도시들(Ionian Greek Cities)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Achaemenid Persia, BC 550 ~ BC 330)의 지배에 반발하여 이오니아 반란(Ionian Revolt, BC 499 ~ BC 494)을 일으키자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등이 원조하여 싸웠으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이 라데 해전(Battle of Lade, BC 494)에서 승리하여 밀레토스(Miletus)를 함락(BC 494)시키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I, 재위 BC 522 ~ BC 486)는 이오니아 반란에 협력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제1차 페르시아 전쟁(First Persian War, BC 492 ~ BC 490)을 일으켜 에레트리아를 함락시켰으나 최종적으로 아테네의 밀티아데스(Miltiades, BC 550 ~ BC 489)가 지휘한 그리스 군이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에서 페르시아 군에 승리하여 물리쳤다.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Miltiades)가 전장으로 선택한 마라톤 평야 주변은 습지대와 산지가 있어 페르시아 기병대가 제 역할을 하기 어려운 지역이었고 중장 보병 중심의 그리스 군은 경장 보병의 페르시아 군에게 유리하였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재위 BC 486 ~ Bc 465)는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제2차 페르시아 전쟁(Second Persian War, BC 480 ~ BC 479)을 감행하였다.
이에 그리스 폴리스들은 아테네·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헬레네스 연합군(Hellenic League)을 결성하였다.
테르모필라이 전투(Battle of Thermopylae, BC 480)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1세(Leonidas I, 재위 BC 490 ~ BC 480) 등의 연합군은 협곡에서 며칠간 저지하였으나 배신자 트리키스의 에피알테스(Ephialtes)가 안내한 우회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다.
아르테미시온 해전(Battle of Artemisium, BC 480)에서 그리스 연합함대는 버티며 방어하였고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에서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 ~ BC 459)가 지휘한 그리스함대가 좁은 해협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배가 크고 수도 많은 대함대를 유인하여 기동력을 제한시켜 놓고 작고 뻐른 삼단노선(三段櫓船, 트리레메, Trireme)을 투입하여 충각(ram, 돌진하여 충돌) 전술로 격파하였다.
스파르타 장군 파우사니아스(Pausanias)가 지휘한 그리스 연합 보병이 플라타이아이 전투(Battle of Plataea, BC 479)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육군을 결정적으로 격퇴하였다.
이어서 이오니아 근처에서 벌어진 미카레 전투(Battle of Mycale, BC 479, 해상·육상 병행)에서 페르시아 선단을 파괴하는 등 전쟁이 이어지다가 아테네와 페르시아가 칼리아스의 평화 조약(Caligian Peace, BC 449 ±1)을 맺어 종전이 되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잔존 세력을 축출하고 재침을 대비하기 위해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 BC 478 ~ BC 404)을 결성하였다.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올림피아에 위치한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Temple of Zeus at Olympia)은 고대 그리스 도리스식(Doric order) 건축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로 올림픽 경기의 발상지로 범그리스에 속하는 올림피아(Olympia)에 BC 470 ~ BC 456에 세워진 제우스 중심의 범그리스적(Panhellenic) 신전이다.
BC 499년에서 BC 449년까지 약 50년 동안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Greco Persian Wars, BC 499 ~ BC 449)에서 승리한 이후 그리스인의 자신감이 고조된 시기에 세워졌다.
정면 기둥 6개, 측면 기둥 13개이고 석비(石碑, stele stone, 돌로 만든 기념, 기록용 비석) 및 기둥은 대부분 석회암이며 외부는 스투코(Stucco) 도장으로 대리석처럼 보이게 처리하였다.
지붕과 조각 장식은 대리석이다.
신전 내부에 피디아스(Pheidias, BC 480 ~ BC 430)가 제작한 높이 12m 이상의 거대한 제우스 좌상이 있다.
제우스상은 금과 상아(chryselephantine)로 제작되었으며 옥좌에 앉아 있는 형태로 좌대는 흑단, 상아,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왼손에는 왕홀(Scepter, 길고 곧은 막대 모양, 왕권과 신권을 상징), 오른손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 여신상’을 올려놓은 구조였다.
제우스의 손 위에 승리의 여신 니케(Nike)가 있다는 것은 제우스가 승리의 주재자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Temple of Zeus at Olympia)의 내부는 고대 그리스 조각의 균형미에서 최고 수준이다.
고대 그리스 사상은 자연 사상(자연철학)에서 인본 사상(인간 중심 철학)으로 발전했다.
자연 사상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들은 자연 현상을 신화가 아닌 이성(logos)으로 설명하려 했다.
탈레스(Thalēs, BC 626/623년경 ~ BC 548/545년경, 만물의 근원 물),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s, BC 535 ~ BC 475, 만물의 근원 불),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BC 460년경 ~ BC 380년경, 원자론) 등은 만물의 근원인 '아르케(arche)'를 탐구하며 우주의 기원과 자연 세계의 작동 원리를 밝히는 데 주력했다.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르러 자연에서 인간과 사회 문제로 이동하여 인본주의적 사고가 시작되었다.
아테네 출생의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 ~ BC 399)는 서양 철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 ~ BC 404) 기간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조각·석공 가문 출신이었으나 철학·윤리 탐구에 평생을 헌신했다.
소크라테스는 윤리·인간 탐구 중심의 철학을 전개하였으며, “참된 지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했다.
소크라테스의 명제는“너 자신을 알라”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인식해야 한다.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지혜의 출발은 무지의 인정이며 “지덕합일(知德合一)”은 참된 앎(지)이 반드시 선한 행동·덕(德)의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사상이다.
즉, 알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방법은 산파술(産婆術, Maieutic, Socratic Maieutics, 변증법, 대화법)이며 산파술(변증법)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a. 질문을 던진다
b. 상대의 대답 속 모순을 발견
c. 새로운 정의를 찾아 나간다( 진리에 접근).
이 과정은 나중에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또는 변증법이라 한다.
소크라테스는 직접 저술한 책을 한 권도 남기지 않았으며 그의 사상은 제자들을 통해 전해졌다.
플라톤(Plato)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대화편 형태로 기록(가장 주요한 전승 경로)하였으며 크세노폰(Xenophon, BC 430 ~ BC 354, 역사가, 철학자, 군인, 작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등에서 실용적·윤리적 모습으로 묘사하였고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BC 446 ~ BC 386, 풍자극 작가)는 희극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조롱적으로 묘사하였다(당시 사회의 인식 반영).
소크라테스는 청년과 귀족층인 알키비아데스(Alcibiades, BC 450 ~ BC 404, 아테네의 정치가, 장군, 연설가) 등과는 교류하고 민주정 하에서 기성의 가치(既成의 価値, 전통적·기존의 가치와 관습)를 비판하였으므로 당시 아테네 사회·정치 분위기 속에서 불신과 반감을 샀으며 전쟁에 패배한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기원전 399년,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새로운 신을 도입했다는 죄명으로 아테네 법정에 서게 되었다.
재판에서 그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도피 대신 법을 존중하여 독배(헴록, hemlock)를 마셨다.
에게해 섬 지역의 도시국가(polis)인 코스(Kos) 출신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 ~ BC 370, 의학의 아버지)는 히포크라테스 선서(Hippocratic Oath)의 주인공으로 현대 의학 윤리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질병을 신의 벌이 아닌 자연적 원인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하였으며 4체액설(四體液說, Four Humors Theory)을 주장하여 혈액, 담즙, 흑담즙, 점액의 균형이 건강에 영향을 준다고 하였다.
환자 관찰과 기록을 중요시했으며, 치료보다 예방에 중점을 두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중심축을 이루는 핵심 사상가인 플라톤(Plato, BC 428/427 ~ BC 348/347)은 서양 철학의 기초를 만든 아테네 귀족 출신의 인물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다.
플라톤은 BC 387년경 아테네에 서양 최초의 고등 교육기관인 아카데메이아(Academy)를 설립하였다.
그의 철학 핵심은 이데아론(Theory of Forms), 영혼의 삼분설, 철인정치(철인왕), 교육론 등이며 저서로는 국가(Republic), 파이돈(Phaidon), 향연(Symposium), 소피스트, 티마이오스, 파르메니데스, 정치가(Statesman) 등이 있다.
폴리스(Polis)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Hellenistic Greece, BC 323 ~ BC 146,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부터 그리스가 로마에 정복된 시기까지)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라)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Hellenistic Greece, BC 323 ~ BC 146)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로마의 그리스 코린토스의 함락(The Fall of Corinth, BC 146)과 마케도니아 멸망으로 끝났으며 헬레니즘은 로마의 이집트의 정복(Ptolemaic Egypt가 Roman Egypt가 됨, BC 30)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그리스의 문화와 패권이 중동까지 뻗어갔으며 오리엔트 문화와 융합이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는 왕정 중심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c Dynasty, BC 305 ~ BC 30, 이집트),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Empire, 바빌로니아 시리아 페르시아, BC 312 ~ BC 64), 안티고노스 왕조(Antigonid Dynasty, BC 306 ~ BC 168, 마케도니아)의 3대 왕국으로 나뉘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서양 철학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는 BC 384, 마케도니아 왕국의 도시 스타게이로스(Stagira)에서 출생했으며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자연학, 형이상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아테네 플라톤 학원(아카데메이아)에서 20년 수학하였고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으로 활동한 후 아테네로 돌아와 페리파토스학파(Peripatetic School, 산보 학파, 리케이온 Lyceum에서 산책하며 제자들과 토론한 데서 유래)를 창설하였으며 업적으로는 논리학의 삼단논법(연역 논리)을 확립하였고 오르가논(Organon,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들을 묶은 총칭)을 통해 형식 논리학을 체계화하였으며 형이상학의 질료(hyle)·형상(eidos) 이원론, 자연학의 생물 분류·관찰 중심 연구, 실천 철학을 강조하여 윤리학의 행복(eudaimonia), 정치학의 중간계급 중심의 국가 그리고 시학(Poetics)에서는 비극론으로 비극의 본질은 ‘카타르시스(catharsis, 정화)’이며 플롯(plot, 사건의 구성, 미토스 mythos,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는 세계주의, 개인주의, 혼합 문화였으며 학문은 알렉산드리아 중심으로 수학, 과학, 천문학 등이 발전하였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자기 나라를 "헬라스(Hellas)”, 자기 민족을 “헬레네스(Hellenes)”라고 부르고 자신들을 문명인(homo politicus)으로 인식하여 이민족인 '오랑캐(barbaroi)'와 구별하였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동족 의식을 가지고 부분적으로는 결합을 하였으나 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성이 강하여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필요시 여러 폴리스들 간에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는 그리스 본토뿐만이 아니라 키프로스, 터키의 에게해 연안(Ionia, 이오니아, 그리스 식민지),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지), 알바니아(고대 그리스 식민지), 불가리아(고대 그리스 식민지), 이집트, 리비아, 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남부(Southern Spain, 스페인 남부), 카탈루냐(Catalonia, 스페인 북동부), 사카르트벨로(Sakartvelo, 조지아 Georgia),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등에 그리스 식민지나 정착지가 있어 영향을 미쳤다.
* 알렉산드로스 사후 주요 헬레니즘 국가들
A. 마케도니아 왕국(Antigonid Kingdom, BC 306 ~ BC 168)
수도 : 펠라(Pella)
지역 :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Aleksandros IV, BC 323 ~ BC 309)가 본국 계승, 로마에 의해 멸망 (BC 168)
B.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c Kingdom, BC 305 ~ BC 30)
수도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지역 : 이집트, 키레나이카, 팔레스타인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재위 BC 305~282 )가 건국, 과학·문화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설
C. 셀레우코스 제국(Seleucid Empire, BC 312 ~ BC 63)
수도 : 니카토르 셀레우키아 → 안티오키아
지역 :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박트리아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Seleucus I Nicator)가 건국,
가장 광대한 헬레니즘 제국, 로마·파르티아와 대립
D. 페르가몬 왕국(Attalid Kingdom, BC 282 ~ BC 133)
수도 : 페르가몬(Pergamon)
지역 :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서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 리시마코스(Lysimachus)의 통치지역인 트라키아 소속 페르가몬 요새(Pergamon Fortress, 소아시아)의 재정 담당관이었던 필레타이로스(Philetaerus)가 건국,
예술·학문 중심, 로마와 동맹, 로마에 영토를 넘김, 로마의 아시아 속주(Provincia Asia)가 됨
E. 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 BC 250 ~ BC 125)
수도 : 박트라(Bactra)
지역 : 중앙아시아(현 아프가니스탄,
셀레우코스 제국(Seleucid Empire)의 박트리아 지역 총독(satrap)이었던 디오도토스 1세 (Diodotus I, 재위 약 BC 250~230년)가 건귝,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분리 독립, 인도-그리스 문화 형성
F. 인도-그리스 왕국(Indo-Greek Kingdom, BC 180 ~ BC 10경 )
수도 : 탁실라(Taxila) 등
지역 : 북인도, 간다라 지역
박트리아 왕 데메트리오스 1세(Demetrius I)가 건국
헬레니즘과 불교 문화 융합 (예: 간다라 미술)
2)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Polis, 도시국가, city-state)
그리스에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각 골짜기나 평지가 하나의 지리적 단위를 이룬다. 이러한 지리 조건이 그리스에서 폴리스(Polis)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형성된 주된 요인이다. 이러한 지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로 진출하게 되었고 해외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포도주, 올리브와 공산품은 매우 중요한 교역 물자였다.
기원전 6세기에 아테나이(Athens), 스파르타, 코린토스, 테바이 등 여러 도시들이 지배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각 폴리스(Polis)는 주변 농촌 지역과 소읍을 장악하였으며, 또 아테나이와 코린토스는 주요 해운ㆍ상업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가) 스파르타(Sparta)
스파르타(Sparta) 폴리스(Polis)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 라코니아(Laconia) 평야 중심으로 건설되었으며 지형이 천연 요새이었으므로 외적의 침입이 드물었다.
BC 1100경 ~ BC 800년경 이후 도리스인(Dorians)이 남하하여 스파르타를 건설했으며 이때, 원주민 중에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아들인 자는 운신은 자유롭되 시민권이 없는 페리오이코이(Perioikoi, 스파르타 시민 Homoioi, 호모이오이와 농노 헬로트(Helots)와의 중간 지위, 자유민으로 상업·공예·농업 담당, 군사 지원과 세금 의무)가 되고 처음부터 예속신분이었거나 끝끝내 저항한 자는 헬로트(Helots)라는 노예신분이 되었다.
기원전 9세기경 리쿠르고스(Lycurgus, BC 9세기 ~ BC 8세기경, 고대 스파르타의 전설적 입법자, 개혁가)가 스파르타(Sparta)를 창시하고 스파르타 헌법(그레트라, Great Rhetra) 제정하는 등 정치·사회 체제의 기초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 육상 패권과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을 유지했다.
스파르타(Sparta)는 단순한 도시국가가 아니고 전쟁 중심 사회였으며 정복을 통해 성장하였다.
스파르타의 전쟁은 정치, 경제, 사회 구조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특징은 육상강국(Land Power) 중심, 중장보병(Hoplite)의 밀집대형(Phalanx) 전술, 장기적 헬로트(Helots, 농노)의 억압이었다.
기원전 8세기 중후반 스파르타는 가깝고 비옥한 영토를 가진 메세니아((Messenia)를 점령하기 위해 메세니아 전쟁(Messenian Wars, BC 8세기 ~ BC 7세기) 을 일으켜 정복하고 주민을 농노(헬로트, Helots)로 삼았다. 스파르타 시민보다 훨씬 수가 많던 이들 농노는 농사를 짓고 스파르타 시민과 함께 국가를 위해 전쟁에 대비하였다. 상류층도 병사로 훈육받으며 살아야 했으므로, 부자와 빈민이 모두 평등하여 시민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의 국가 체제는 두 사람의 왕이 있었으나 실권은 없고 두 왕을 포함하여 30명의 유명 가문 출신으로 구성되는 장로회(Gerousia, 28명 장로 + 2명 왕)가 국정의 중요 안건을 제안, 심의하여 20세 이상의 성년남자 시민전체로 구성되는 민회(시민회의, Apella)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국정운영의 실권은 임기 1년의 집정관 5명으로 구성된 에포로스( Ephors)가 가졌으며 집정관은 또 왕을 포함한 여러 관직자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스파르타 특유의 생활양식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였다.
스파르타에서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시민은 전 주민의 5% ~ 10%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농노(헬로트, Helots)였으므로 항상 헬로트(Helots)의 반란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스파르타는 군국주의를 채택하였으며, 시민 생활을 전시체제처럼 조직하였던 것이다.
시민은 평생 군사 훈련에 전념해 정예 시민군(Spartiates, 스파르티아테)이 되어야 했으며 청소년도 아고게(Agoge)라는 청소년 군사 교육 제도에 의해 군사 훈련을 했다.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 아테네 중심)과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 스파르타 중심) 사이에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 ~ BC 404)에서 BC 404년 승리한 후 아테네 제국(델로스 동맹)을 이어받아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에 해군 사령관 리스안드로스(Lysander)의 외교 활동으로 페르시아 왕자 키루스(Cyrus the Younger)와 동맹(BC 408 ~ BC 407)을 맺고 부족한 해군력 강화에 필요한 지원을 받았고, 전후에는 외교관 안탈키다스(Antalcidas)가 협상하여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를 페르시아에게 넘기는 안탈키다스 평화 조약(BC 387)을 체결하며 폴리스의 반감을 샀다.
스파르타는 점령한 대도시마다 하르모스토스(harmost, 총독)라는 관리와 스파르타군을 주둔시켜 통제했으므로 자유로운 폴리스의 반발을 불렀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04)에서 아테네를 꺾고 그리스 패권을 장악했으나 패권 유지 능력이 부족하였다.
BC 371년 테베(Thebes, 테바이, 보이오티아 지방의 도시 국가, 아테네·스파르타와 더불어 고전기 그리스의 3대 강국)의 장군 에파메이논다스(Epaminondas, BC 420 ~ BC 362)가 레욱트라 전투(Battle of Leuctra, BC 371)에서 스파르타 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함으로서 스파르타 지배체제는 붕괴되었으며 이어서 테베(Thebes, 테바이)는 스파르타가 회복하지 못하도록 본토 메세니아 지역을 독립시켜 스파르타의 경제 기반(헬로트, Helots, 농노 노동력)을 박탈하였다.
왕권 강화와 군사력을 증대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재위 BC 359 ~ BC 336)는 남부 그리스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스파르타는 마케도니아의 패권에 굴복하지 않았으나 BC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Battle of Chaeronea)에서 아테네·테베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스파르타는 불참)이 마케도니아에 패배함에 따라 스파르타는 마케도니아 주도로 형성된 코린토스 동맹(Corinthian League, BC 337~)의 도시국가들에 영향력을 상실하고 고립되었다.
BC 227년경 클레오메네스 3세(Cleomenes III, 재위 BC 235 ~ BC 222)가 실시한 개혁(부채 탕감, 토지재분배, 청소년 군사 교육 제도인 아고게 부활, 최고감독관 5명으로 구성된 강력한 정치기관인 에포로스 제거)으로 스파르타의 군사력이 강화되자 아카이아 동맹(Achaean League)은 스파르타의 급격한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마케도니아가 대군을 참전시킨 셀라시아 전투(Battle of Sellasia, BC 222)에서 스파르타는 아카이아 동맹(Achaean League)과 마케도니아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완전이 몰락했다.
BC 146년 로마에 흡수되기 전까지 명목상 독립은 유지했으나 “더 이상 군사 강국이 아닌 지방 도시국가” 수준이었다.
나) 아테네(Athens, 아테나이, Athenai)
아테네(Athens) 폴리스(Polis)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폴리스이며 서양 문명과 민주주의의 발상지이다.
아테네(Athens)는 그리스 아티카(Attica) 지방의 중심에 있었다.
테세우스(Theseus,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영웅, 아테네를 통합한 건국 영웅, 영웅에서 비극적 왕으로 변한 인물 )가 아티카(Attica) 지역의 여러 작은 마을과 부족(데메, demes)을 통합(시노이키스모스, Synoikismos, 함께 살기)하여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 만들었다.
테세우스는 그리스 민주주의와 아테네 정체성의 상징적 창시자가 되었다.
인근에 사로닉 만(Saronic Gulf)이 있어 무역에 유리했으며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가 용이했다.
기원전 8세기경 귀족 가문들이 귀족정(貴族政, Aristocracy) 통치를 하였으며 귀족정치의 중심은 집정관(Archon, 아르콘, 군사, 종교, 민사의 3명, 후에 9명, 임기 후 아레이오파고스의 의원)과 아레이오파고스(Areios Pagos, Areopagus, 귀족 평의회, 법정)였다.
기원전 7세기에는 솔론(Solon, BC 638 ~ BC 558, 집정관 Archon, BC 594년경)의 개혁으로 재산 기준에 따른 4계급제를 실시하고 부채를 탕감(Seisachtheia)하였다.
4계급은 펜타코시오메디무노이(가장 부유층), 허페이스(hippeis, 기병 계층) 제우기타이(zeugitai, 중농 계층), 테테스(thetai, 빈민층)이었다.
이 중에서 상위 계층만이 고위직을 맡을 수 있었지만, 모든 시민이 민회(Ekklesia)에 참여할 수 있어 민주정의 기초가 되었다.
기원전 6세기 후반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BC 약 600 ~ BC 527년경)가 평의회의 지지로 집권하여 참주정(僭主政, Tyrannis, 정당한 군주가 아님에도 왕이나 황제의 칭호와 권력을 함부로 차지한 자의 정치)을 실시하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중산층, 농민층을 기반으로 메가클레스(Megacles 알크메온 가문, Alcmaeonidae), 리쿠르고스(Lycurgus) 계열 등 귀족 가문이 대립하던 아테네 정치에서 제3세력으로 기원전 561년경에 집권한 후 집권과 추방을 거쳐 외부에서 용병을 모으고 재정적 후원(트라키아 Thrace 지역 등)을 확보하여 힘으로 3차 집권(BC 546 ~ BC 527)하여 참주정을 행하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권을 이어받은 그의 아들 히피아스(Hippias, 통치 BC 527 ~ BC 510)가 점점 전제적으로 변하자 기원전 510년 아테나이의 귀족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 BC 570 ~ BC 508) 등이 델피 신전(Delphi, 아폴론 신의 신탁, Oracle of Apollo)과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BC 510년에 히피아스를 축출하였으나 클레이스테네스와 이사고라스(Isagoras, 활동 BC 508년경, 귀족 정권 oligarchy 유지) 사이에 권력투쟁이 발생하여 이사고라스가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1세(Cleomenes I, 재위 BC 520 ~ BC 490)의 도움을 받아 親스파르타파의 집정관이 되자 두 나라는 충돌하였다.
이에 시민이 아테나이가 스파르타의 괴뢰 국가(傀儡國家, Puppet State)가 되지 않도록 봉기하였으며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나이 시민에게 모든 시민이 지위에 상관없이 정치적 권력을 공유하는 혁신을 제안하여, 아테나이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508년경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 BC 570 ~ BC 508경)는 정치 참여 자격에서 재산 기준을 폐지했고, 독재자의 출현을 막는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 Ostracism, 국가에 위험을 초래한다고 판단될 경우 도자기 파편에 이름을 써서 투표하여 10년간 아테네에서 추방시킴)를 실시했으며 행정을 개혁하여 아테네 시민을 10개의 부족(Phylai)으로 나누고, 다시 각 부족은 3개의 구역(트리튀스, trittyes, 도시·내륙·해안 지역)으로 구획하였으며 시민평의회(500인회)를 제도화하는 등 민주정(民主政, Democracy)을 실시하여 “아테네 민주주의의 창시자(Father of Athenian Democracy)”로 불였다.
아테네는 수백 척의 삼단노(트리레메, trireme)를 보유하여 당시 에게 해(Aegean Sea) 최강의 해상력을 유지했으며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BC 524 ~ BC 459,정치가, 전략가, 살라미스 해전 승리의 영웅)는 해군을 중시하는 정책을 펴 기원전 483년 라우리온(Laurion) 지역에서 대단한 은광맥을 발견한 후 막대한 수익을 200척의 삼단노(트리레메, trireme) 건조에 투입할 것을 주장하여 실행했다.
시민층 중 테테스(가난한 시민층)가 노수(Rowers)로 참여하면서 민주정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아테네(Athens)는 페르시아 전쟁(BC 490 ~ BC 479,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페르시아 제국 간의 충돌)에서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에서 승리하였고, 수백 척의 삼단노(트리레메, trireme)로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 등에서 승리하였다.
아테네(Athens)는 강력한 해군력으로 미카레 전투(Battle of Mycale, BC 479) 이후 반(反)페르시아의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을 결성하여 아테네 중심의 해상 패권 체제로 발전시켜 해상 제국이 되었다.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Miltiades)의 아들인 키몬(Cimon, BC 510 ~ BC 450, 귀족·정치가, 장군, 해상 제국 성장의 주역) 장군이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의 함대를 이끌고 카리온 강 전투(BC 466)에서 페르시아 군대에 대승함으로써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실질적 패권자가 되었던 것이다.
키몬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 ~ BC 459, 혁신가, 전략가, 정치가, 장군, 해양강국으로 만든 인물,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의 부패와 권력 과잉을 공격했고 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에서 도편 추방(陶片追放, Ostracism, 국가에 위험을 초래한다고 판단될 경우 도자기 파편에 이름을 써서 투표하여 10년간 아테네에서 추방시킴)되자 BC 475 ~ BC 470년경 키몬은 아테네 보수파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BC 464년 스파르타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해로트(Helots, 국가 소유 농노)가 반란을 일으키자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키몬은 대규모 아테네 군대를 이끌고 스파르타로 출정하였다.
그 동안 아테네에서는 “키몬이 스파르타 편만 든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키몬이 귀국하자 BC 461년 도편추방(陶片追放, Ostracism, 국가에 위험을 초래한다고 판단될 경우 도자기 파편에 이름을 써서 투표하여 10년간 아테네에서 추방시킴)되었다.
귀족출신의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 ~ 429)는 어릴 때 부터 ‘철학적 정치가’로 불릴 정도의 지적 훈련을 받았으며 전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정치 준비하다가 BC 472년 청년기에 아테네 비극 경연(Athenian Tragic Competitions)에서 아이스킬로스(Aeschylus, BC 525 ~ BC 456, 그리스 비극의 아버지)를 후원하여 시민에게 이름이 알려졌고 그 후 아테네의 실질적 지도자 귀족파의 키몬(Cimon, BC 510 ~ BC 450)을 민주파를 대변해 탄핵하여 민주정 파벌에서 정치적 리더로 인정받았다.
키몬이 스파르타에 반란 진압을 위한 원정으로 도편추방(BC 461)되자 에피알테스(Ephialtes, BC 480 ~ BC 461, 급진민주파)가 아테네의 지도자가 되어 민주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귀족들의 극심한 반발을 받고 암살당하자 제자인 페리클레스는 지도자로 부상하여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페리클레스 시대(Periclean Age, BC 461 ~ BC 429)는 고대 아테네 민주정이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 가장 찬란한 황금기로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 ~ BC 429)는 민회, 배심제, 공직자 급여제 등을 도입하였다.
아테네(Athens)에는 민회(Ekklesia), 500인 평의회(Boule), 법정(Dikasteria)이 설치되었다.
민회(Ekklesia)는 모든 시민이 참여해 법 제정과 외교를 결정하였고 500인 평의회(Boule)는 행정사전심의 기관이며 법정(Dikasteria)은 재판소로 배심원제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공직은 추첨제로 선택하였고, 장군(전략가)은 선거로 선출하였다.
철학자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고 체육과 문예를 중시하였으며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아름다움과 선의 조화)’라는 이상을 추구하였다.
기원전 6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 )를 기리기 위해 디오니소스 극장(인류 최초의 극장), 에피다우로스 극장 등 자연 지형을 활용한 반원형 구조의 원형극장(Amphitheater)을 건설하여 연극 공연과 종교 의식에 사용하였다.
원형극장(Amphitheater)은 부채꼴 모양의 관객석(theatron, 테아트론)과 원형의 공연 공간(orchestra, 오케스트라)으로 구성되어 뛰어난 음향 효과로 배우의 목소리를 멀리까지 전달했고, 이는 민주주의 발달과 함께 시민들의 문화 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와 합창단의 춤과 노래는 종교적 뿌리를 반영하고, 극의 서사를 전달하며, 관객과 소통하는 기능을 하였다. 원형극장에서 배우들과 합창단(코러스)이 춤추고 노래하며 연기했던 무대 앞쪽의 넓은 공간을 오케스트라(orchestra)라고 하였는데 이후 현대에는 이 공간에 악사들이 모여 연주하는 관현악단을 오케스트라(orchestra)라고 하게 되었다.
건축으로는 파르테논 신전(Athena Parthenos 여신에게 헌정)이 있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정상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Parthenon)은 BC 447 ~ BC 438년에 건축되었으며 장식은 BC 432년에 완성되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여신 아테나(Athena, 지혜, 전쟁 전략, 수공예, 도시 보호를 관장하는 여신, 아테네 Athens 도시의 수호신)에게 헌정된 신전으로 내부에는 황금과 상아 조각(크리제레판틴, chryselephantine)의 거대한 아테나 조각상(아테나 파르테노스, Athena Parthenos)이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페리클레스 시대(Periclean Age, BC 461~ BC 429, 고전 그리스 문명의 정점기)의 아테네 부(富), 민주정, 해상제국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특징은 외부에는 엔타시스(entasis)을 적용한 도리스식 기둥(Doric Order)이 있고 내부에는 이오니아식 프리즈(Frieze, 내벽 띠부조)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교한 비례 조정과 착시 교정(optical refinements) 구조이다.
전체 크기는 약 30.9m × 69.5m이며 펜텔리콘(Pentelic) 대리석을 소재로 사용했다.
프리즈를 구성하는 메토프(Metopes, 부조 패널)에는 라피타이(Lapiths, 인간족)와 켄타우로스(Centaur,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말인 반인반마)의 전투(Centauromachy, 켄타우로마키), 트로이 전쟁, 아마존 전투, 올림포스 신들과 거인(Giants) 간의 전쟁(Gigantomachy, 기가노마키) 등의 장면이 있다.
페리클레스(Perikles)가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 BC 478년경, 페르시아의 재침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결성한 아테네 중심의 해상 군사 동맹)의 군자금 등을 이용하여 신전을 건축하고 아테네 제국주의를 추진하였으며 지나친 확장 정책을 폄으로서 스파르타와의 긴장을 고조시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아테네가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코린토스(Corinth)와 분쟁 중이던 코르키라(Corcyra,오늘의 코르푸, 해양 도시국가)와 동맹을 맺음으로서 코린토스와 충돌이 일어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 ~ BC 404)에서 패배로 강력한 민주정, 해상제국의 기반이 붕괴되어 문화, 철학 중심 도시로는 번영했지만 정치, 군사력은 약화되었다.
아테네(Athens)라는 폴리스 이름은 여신 아테나(Athena)에서 유래하였는데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도시의 수호신 자리를 두고 시민들의 선택을 겨룬 끝에, 아테나가 올리브 나무를 시민들에게 선물하여 승리했다는 전설이 있다.
BC 338년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 전투(Battle of Chaeronea, BC 338)에서 마케도니아(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에게 패배하여 그리스 전체가 마케도니아에 종속 상태로 전환되었으며 아테네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재위 BC 359 ~ BC 336)와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 ~ BC 323)의 지배를 받았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헬레니즘 시대에 아테네는 정치적 독립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경제력, 군사력 없는 철학, 교육, 예술 중심의 문화도시가 되었다.
로마는 아테네를 문화적 중심지로 존중하여 여러 차례 내정 간섭을 하면서도 형식적 자치권을 유지하게 하였다.
BC 146년 로마는 아테네를 흡수하였다.
다) 코린토스(Corinth)
코린토스(Corinth)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부, 이오니아 해와 아르고스만 사이에 있었던 폴리스(Polis)이며 이스마이아 해협(Isthmus of Corinth)으로 펠로폰네소스와 그리스 본토 연결되어 있어 해상 무역의 요충지였으며 상업과 경제 중심지였다.
초기에는 귀족정(oligarchy)이었으나 후에 참주정(僭主政, tyrannis, 페이사스트라토스와 유사)이었다.
폴리스에는 시민 평의회(Boule)와 법정(Dikasteria)이 있었으며 경제적 강세로 정치적 독립성이 유지되었다.
코린토스(Corinth)는 시라쿠사(Syracuse, 시칠리아)를 식민지로 두어 상업 네트워크로 활용하여 부유한 상업 도시를 이루었다.
아프로디테 신전, 코린토스 신전 등 신앙의 발달과 건축, 도자기, 예술 등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스파르타 동맹에 참여하였다.
라) 테바이(Thebes, 테베)
테바이(Thebes, 테베)는 그리스 본토 중앙부에 있는 보이오티아(Boeotia) 지방의 폴리스(Polis)이며 비옥한 평야와 산지로 농업이 발달되었다.
지리적으로 아테네, 델포이, 펠로폰네소스와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귀족 중심의 폴리스 정치였으나 간헐적으로 참주(僭主, Tyrannis, 정당한 군주가 아님에도 왕이나 황제의 칭호와 권력을 함부로 차지함)가 발생하였으며 귀족 중심의 민회 및 법정이라 시민 참여가 제한적이었다.
BC 4세기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 BC 418 ~ BC 362) 시대에 정치와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민주적·군사적 혼합 체계를 만들었다.
군사는 보이오티아 평야 지역이라 중장보병 중심 군대를 양성하였다.
테바이(Thebes)는 비대칭 팔랑크스(Phalanx, 방패를 맞대어 벽처럼 선 보병대, 밀집 보병 전술 대형) 전술로 BC 371년 레우크트라 전투(Battle of Leuctra, BC 371)에서 스파르타 군을 격파하여 스파르타 패권을 붕괴시켰다.
카드모스(Cadmus, 테바이 Thebes의 건국자,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딸 하르모니아 Harmonia와 결혼, 페니키아 문자를 그리스에 전하여 그리스 문자로 변형)와 세미라미스(Semiramis, 신화적 아시리아 여왕, 바빌론 건국) 등의 신화가 있고 제우스, 아폴론, 디오니소스 등의 신을 섬겼다.
마) 마케도니아 왕국(Macedonian Kingdom, BC 808 ~ BC 146)
마케도니아(Macedonia)는 북부 그리스 및 일부 북쪽 발칸 반도 지역에 기원전 7 ~ 6세기경 부족 연합 형태로 왕과 귀족 중심의 초기 왕국(BC 808 ~ BC 359)이 건설되었다.
자연 지형은 산악과 평야가 혼합된 곳으로 북쪽은 산악, 남쪽은 테살리아 평야와 접하고 있으며 주요 도시로는 페라, 테베, 테살로니카 등이 있다.
마케도니아가 팽창하고 황금기를 이룬 왕은 필리포스 2세(Philip II of Macedon, 재위 BC 359 ~ BC 336)이다.
필리포스 2세는 군사와 정치 체제를 혁신하였는데 파란케스(Phalanx, 촘촘한 창 전열 보병)를 개선하여 왕족 및 귀족이 주도하는 기병과 보병을 연계하는 전술을 계발하고 중앙집권적 명령체계로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필리포스 2세는 BC 346년 포키아(Phokida)를 병합하여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었다.
필리포스 2세는 팽창 정책을 펴 영토 확장과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의 팽창 정책에 대항하여 독립성 유지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의 간섭과 정복 시도를 방어하는 노력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테살리아, 테베, 아테네 등은 전략적 위치가 뛰어나고 풍부한 자원을 가졌으므로 마케도니아가 이 지역을 통제하면 동·서 지중해로의 진출 가능하고 경제적인 이득도 얻을 수 있었다.
필리포스 2세는 테살리아, 아카이아 연맹(Achaean League, 코린토스, 아르고스, 파트라, 델포이 주변 도시 등 도시국 연합체) 등과의 전쟁에 승리하여 그리스 북부와 중앙부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BC 338년 케로니아 전투(Battle of Chaeronea)에서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테베 연합군에 승리하여 그리스 도시국가 대부분을 마케도니아의 통제하에 두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III Magnus, BC 356 ~ BC 323, 재위 336 ~ BC 323)는 필리포스 2세(Philip II, BC 382 ~ BC 336)의 왕자로 태어나 16세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되어 교육받았다.
BC 338년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 2세와 같이 아테네, 테베, 그리고 코린토스 등 도시국가들의 연합군을 상대로 케로니아 전투(Battle of Chaeronea, BC 338)에서 승리하였으며 BC 337년 마케도니아 왕국은 스파르타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가 포함된 코린토스 동맹(League of Corinth, BC 337, 군사 동맹)을 수립하여 맹주가 되었다.
BC 336년 알렉산드로스는 20세에 아르게아스 왕조(Argeadai, 마케도니아 왕국의 첫번째 왕조, BC 808 ~ B.C. 310)의 제26대 마케도니아 국왕(재위 BC 336 ~ BC 323)이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제정이 궁핍하였으며 알렉산드로스는 금이 쌓여있다는 이집트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먼저 이소수 전투(Battle of Issus, BC 333)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고 소아시아(아나톨리아, 튀르키예)를 정복한 다음 331년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며 이집트를 떠나 다시 가우가멜라 전투(Battle Of Gaugamela, BC 331) 등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에게 승리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을 정복했으며 인도 북부까지 침략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정복한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재위 BC 332 ~ BC 323)에 등극하였으며 페르시아에서도 페르시아 국왕(재위 BC 330 ~ BC 323)으로 즉위하였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지명은 자기 이름을 따서 스스로 붙인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세우고 우수한 그리스 문명과 문화를 미개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전파하고자 했으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문명과 문화가 더 우수하여 두 국가의 우수한 것을 융합하여 헬레니즘(Hellenism, 19C 요한 구스타프 드로 이젠 Johann Gustav Droysen 이 명명, 그리스 문화를 동양 식민지에 전파) 문화를 열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BC 323년 31세에 바빌론에서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준비 중에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은 와인의 과음인지 독살인지 불분명하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하자 그의 부하 장군들은 대왕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i, 후계자 전쟁 Wars of Alexander's Successors, BC 323 ~ BC 281)을 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급사했을 때 후계자는 없었으나 록사네(Roxana, ? ~ BC 309) 왕비가 임신 중이었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의 체제를 결정하기 위해 개최된 바빌론 회의에서 임신 중인 아이의 성별을 알 수 없어 대왕의 배다른 형인 아리다이오스를 명목상 필리포스 3세(Philip III, 재위 BC 323 ~ BC 317)로 세우고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i, 후계자 전쟁 Wars of Alexander's Successors, BC 323 ~ BC 281)의 장군 중의 한명으로 제국의 총사령관이 된 페르디카스(Perdiccas, ? ~ BC 321)가 섭정(실권을 가짐)을 하며 왕비가 임신 중인 아이가 남자로 태어날 경우 공동 왕으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BC 323년 8월 임신 중인 아이가 남아로 태어나 알렉산드로스 4세(Aleksandros IV, 재위 BC 323 ~ B.C. 309, 암살됨)로 즉위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섭정인 페르디카스가 암살된 뒤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i, 후계자 전쟁 Wars of Alexander's Successors, B.C. 323 ~ B.C. 281)의 장군 중의 한명인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Antigonus I Monophthalmos, ‘외눈박이’)가 섭정(실권을 가짐)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4세(Aleksandros IV, B.C. 재위 323 ~ B.C. 309)가 암살되고 혼란 틈을 타 여러 장군들이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디아도코이 출신 장군 카산드로스(Cassander, 재위 BC 305 ~ BC 294)도 BC 305년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안티고노스 1세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Demetrios I Poliorketes, 재위 BC 294 ~ BC 277)가 카산드로스의 아들들을 제압하고 BC 294년 마케도니아 왕에 등극하여 안티고노스 왕조(Antigonid Dynasty)를 열었다.
그의 아들인 안티고노스 2세 곤타토르(Antigonos II Gonatas, 재위 BC 277 ~ BC 239)에 이어 데메트리오스 2세 (Demetrios II, 재위 BC 239 ~ BC 229), 필리포스 5세가 어려 안티고노스 3세 도손(Antigonos III Doson, 재위 BC 229~221, 데메트리오스 2세의 친척 장군)이 왕위를 이었으며, 필리포스 5세(Philip V of Macedon, 재위 BC 221 ~ BC 179,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들), 퍼세우스(Perseus, 재위 BC 179 ~ BC 168, Philip V의 아들)로 이어졌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BC 168년 퍼세우스 재위 때 로마공화정과의 마케도니아 전쟁에 패하여 멸망했다.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조(Antigonid Dynasty)의 필리포스 5세(Philip V of Macedon, 재위 BC 221 ~ BC 179,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들)가 로마가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BC 247 ~ BC 183)와 제2차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 BC 218 ~ BC 201) 중에 틈을 노려 서지중해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한니발과 동맹을 모색하자 로마는 두 강대국 연합을 경계하여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First Macedonian War, BC 214 ~ BC 205)을 일으켜 결정적 승부는 얻지 못했지만 그리스 지역에 로마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동지중해 진출을 확대하여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압력을 가하자 페르가몬, 로도스, 아테네 등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로마는 그리스 도시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Second Macedonian War, BC 200 ~ BC 197)을 일으켜 키노스케팔라이 전투(Battle of Cynoscephalae, BC 197)에서 마케도니아에 승리하였다. 로마 군단은 마니풀루스(maniple)라는 유연한 소부대 단위로 구성되어 있어, 복잡한 지형에서도 기동성이 뛰어났고, 대형이 무너져도 빠르게 재정비하거나 독립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으나 마케도니아 군은 6미터에 달하는 긴 창인 사리사(sarissa)를 사용하는 16열의 밀집 대형인 팔랑크스는 대형이 흐트러지거나 후면에서 공격을 받으면 취약했다.
이때 아테네, 스파르타 등 여러 도시국가는 로마에 협력하였다.
패배한 마케도니아는 독립 도시국가 체제는 유지하였으나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은 상실하고 로마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마케도니아의 퍼세우스(Perseus, 재위 BC 179 ~ BC 168, Philip V의 아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경제적·정치적 동맹을 맺어 반(反)로마 세력을 강화하자 로마는 위협으로 인식하고 안티고노스 왕조(Antigonid Dynasty)의 퍼세우스(Perseus, 재위 BC 179 ~ BC 168)에게 선전포고을 하여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Third Macedonian War, BC 171 ~ BC 168)을 일으켜 피드나 전투(Battle of Pydna, BC 168)에서 결정적 승리를 하였다.
전쟁에 패한 마케도니아 왕국은 완전이 붕괴되어 4개의 로마 관리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3) 로마시대의 그리스
로마 공화정(Roman Republic, BC 509~BC 27)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e, 페니키아 식민 도시, 튀니지)와의 포에니 전쟁(Punic Wars, BC 264 ~ BC 146) 후 동지중해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조(Antigonid Dynasty)의 필리포스 5세(Philip V of Macedon, 재위 BC 221 ~ BC 179)가 로마가 한니발과 제2차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 BC 218 ~ BC 201)하는 중에 틈을 노려 서지중해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한니발과 동맹을 모색하자 로마공화정은 두 강대국 연합을 경계하여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First Macedonian War, BC 214 ~ BC 205)을 일으켜 결정적 승부는 얻지 못했지만 로마의 영향력이 도시국가들에 확대되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동지중해 진출을 확대하여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압력을 가하자 페르가몬, 로도스, 아테네 등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가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로마공화정은 그리스 도시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Second Macedonian War, BC 200 ~ BC 197)을 일으켜 키노스케팔라이 전투(Battle of Cynoscephalae, BC 197)에서 마케도니아에 승리하였다.
패배한 마케도니아는 독립 도시국가 체제는 유지하였으나 로마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도시국가들은 전쟁 중에 로마에 협력하였고 전쟁 후 로마는 도시국가들에게도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의 퍼세우스(Perseus, 재위 BC 179 ~ BC 168, Philip V의 아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경제적·정치적 동맹을 맺어 반(反)로마 세력을 강화하자 로마는 위협으로 인식하고 안티고노스 왕조(Antigonid Dynasty)의 퍼세우스(Perseus, 재위 BC 179 ~ BC 168)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Third Macedonian War, BC 171 ~ BC 168)을 일으켜 피드나 전투(Battle of Pydna, BC 168)에서 결정적 승리를 하였다.
전쟁에 패한 마케도니아 왕국은 완전이 붕괴되어 4개의 로마 관리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도시국가들은 로마의 그리스 전체 패권 장악에 직면했다.
그리스 아카이아 동맹(Achaean League, BC 280 ~ BC 146, 펠로폰네소스 도시국가 연합, 공동방위·공동정책)이 로마공화정의 지배에 저항하자 로마는 이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아카이아 동맹과 아카이아 전쟁(Achaean War, BC 146)을 일으켜 BC 146년 로마는 코린토스에 승리하여 아카이아 동맹(Achaean League)을 패배시키고 그리스를 완전이 정복하였다.
BC 27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시대 에 그리스는 로마 제국의 아카이아 속주(Achaea)가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로마에 종속되었지만 완전한 파괴는 없었고 그리스의 많은 도시가 자치권을 어느 정도 가졌으며 도서관, 극장 등도 유지되었다.
그리스 상류층은 로마 귀족 사회와 교류하고 혼인하였으며 그리스의 철학·과학·예술을 로마 엘리트가 적극 수용하였다.
그 결과 군사와 행정은 로마식이고 문화와 지성은 그리스를 이어 받았다.
“그리스를 정복한 것은 로마이지만, 로마를 지배한 것은 그리스 문화이다.” 라는 고대의 유명한 표현이 있었다.
로마는 정복지 중 유일하게 그리스의 완성된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서양 문명의 핵심인 그레코로만(Greco-Roman) 문화를 형성하였다.
로마는 스토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재해석하였고 그리스어가 학문의 언어로 쓰였고 로마 신화와 그리스 신화를 동일시(제우스 = 유피테르 등)하였고 건축에는 그리스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을 채택하였으며 학문에서는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이론을 계승하였던 것이다.
서기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이후에는 “그리스의 부활”이 일어났다.
그리스는 동로마 제국(비잔티움)의 핵심 중심지가 되었고 로마 제국의 동부 공용어는 그리스어가 되었으며 그리스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스는 정치적으로는 로마 국가에 속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로마를 압도하며 동지중해 문명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아. 고대 이란 문명(Ancient Iranian Civilization)
고대 이란 문명은 오늘날의 이란 고원(Iranian Plateau)을 중심으로, 기원전 3000년경부터 형성된 엘람(Elam)에서 시작해 메디아, 아케메네스, 파르티아, 사산 왕조로 이어진다.
이 지역은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 사이의 교량 지역으로, 동서 교류의 핵심이었다.
1) 엘람 문명(Elam Civilization, BC 3000 ~ BC 640)
약 기원전 2700년경 이란 문명의 출발점인 엘람 문명(Elam Civilization, Elam은 성경에서 높은 곳, 동방의 나라)은 이란 고원(Iranian Plateau)의 파르스(Fars)에서 일어났다.
이란 고원은 서아시아와 남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광대한 고지대로, 자그로스 산맥과 엘브르즈 산맥 사이에 펼쳐진 지역이다.
파르스(Fars)는 북동쪽에 엘브르즈 산맥(Alborz Mountains)과 서쪽의 자그로스 산맥(Zagros Mountains) 사이의 중앙 이란 고원 남서부 지역이며 헬만드강(Helmand River)이 이란 고원의 동남부, 파르스의 동쪽을 흐른다.
파르스(Fars) 지역은 초기 엘람 문명과 초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발상지이고 고대 문명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파르스(Fars) 지역은 산악 지형으로 외부 침략에 대한 방어가 유리하여 초기 국가형성이 용이했고, 군대는 기습과 돌출 전략이 펼 수 있어 군사 요충지였다.
이런 산악에서 길러진 군사들은 강력하였고 엠람은 중앙 집권 체제에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유지하는 정책을 폈다. 파르스(Fars) 지역은 건조한 사막과 산악지대에 오아시스와 초원이 있어 유목과 정착의 혼합 사회를 형성했다.
파르스(Fars) 지역에 있는 안샨(Anshan)이 엘람 문명 초기에 중심지였으며 엘람 후기에도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키루스 2세(Cyrus II, 키루스 대왕)가 BC 546년에 건설한 도시인 파사르가다이(Pasargadae)가 있고 이후 다리우스 1세가 즉위하면서 건설한 아케메네스 제국의 첫 수도인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메디아 왕국의 수도인 에크바타나(Ecbatana)가 있었다.
엘람은 중심지를 초기 엘람 왕국(Proto-Elamite, BC 3200 ~ BC 1600)시기인 기원전 약 2500년경 ~ BC 2000년경에 파르스(Fars) 지역의 안샨(Anshan)에서 수사(Susa)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수사(Susa)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동쪽, 이란 남서부의 후제스탄(Khuzestan)과 이람(Ilam) 지역에 있다.
수사(Susa)는 샤투르크강(Choaspes)과 카룬강 Karun)이 흐르고 자그로스 산맥(Zagros Mountains)이 동쪽을 막아주는 이란 남서부에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까운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저지대로 평야 지역이다.
수사(Susa) 지역은 비옥한 평야이고 카룬강물과 샤투르크강물의 관개가 가능하여 농업 생산량을 높일 수 있어 경제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파르스(Fars) 지역의 연결 통로로 메소포타미아 침입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하였다.
엘람은 인류 최초의 문명 중 하나로 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 등과 동시대에 존재하여 교류했던 이란의 역사와 문화의 기원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는 별개의 고유한 문명으로 분류되며, 독자적인 언어인 엘람어를 사용했다. 이 언어는 페르시아어나 셈어파 계통 언어와는 다른 어족에 속한다.
엘람 왕들은 그들이 보유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하여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니푸르(Nippur), 우르, 라가시 등의 신전과 도시에 많이 있는 금·은·귀중품 등을 약탈하고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를 공격해 왕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과 정당성을 강화하려고 했으며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인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하여 엘람과 주변 지역 간의 교역과 방어를 쉽게할려고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하는 전쟁을 자주 벌렸다.
엘람과 메소포타미아 간의 전쟁은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들의 남부 진출을 저지하거나 약탈하거나 단기간의 정복이었다.
엘람 문명의 발전 이행 단계를 시기 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가) 프로토 엘람(Proto-Elamite, BC 약 3200년경 ~ BC 2700년경)
프로토 엘람(Proto-Elamite)은 기원전 약 3200년경부터 BC 2700년경까지 이란 고원 지역에서 사용된 문명이자 문자 체계이다. 이 시기는 엘람 제국 이전의 시대이며 수메르 문명과 거의 동시대로 청동기 시대 초기에 해당하고 문명의 시작 시기이다.
엘람의 중심지가 기원전 약 2500년경 ~ BC 2000년경에 파르스(Fars) 지역의 안샨(Anshan)에서 수사(Susa) 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이란 고원 문화가 고대 도시 수사(Susa)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문자는 메소포타미아 우루크 시대의 원시 쐐기 문자(proto-cuneiform)와 유사한 '원시 엘람 문자(프로토 엘람 문자, Proto-Elamite Script)'를 사용했다.
프로토 엘람 문자(Proto-Elamite Script)는 수메르 문자의 영향을 받았으며 우루크 시대의 원시 쐐기 문자(proto-cuneiform, 설형문자)보다 조금 늦게 생성되었다.
프로토 엘람 문자(Proto-Elamite Script)는 주로 점토판(clay tablet)에 기록했으며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으나 숫자나 경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엘람은 수사(Susa)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인접한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문명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수사(Susa), 안샨(Anshan) 등의 도시가 발달하였으며 신전 중심의 사회 구조를 형성하였고 사제와 관료의 계층이 있었다.
점토판에 행정을 기록하여 조직적으로 행정을 관리하였다.
보리, 밀, 가축 사육 등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였으며 관개 시설과 곡물 저장 제도가 발달했다.
초기 청동기 예술품, 도자기, 인장(seal) 등이 출토되었으며 아것들은 수메르 미술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란 고유의 양식이 존재한다.
기원전 2700년경 프로토 엘람 문화가 쇠퇴하고 구 엘람(Old Elamite) 시대로 이행되었다.
나) 구 엘람(Old Elamite, 기원전 약 2700년경 ~ 기원전 1600년경)
구 엘람(Old Elamite) 시대는 이란 남서부의 고대 문명인 엘람의 역사에서 기원전 약 2700년경부터 기원전 1600년경까지의 시기이다. 이시기에 문자는 프로토 엘람 문자 (Proto-Elamite script)의 한계로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기록하는 엘람어(Elamite language)가 사용되고 도시행정 단계에서 정치적 통합 왕국 형태로 발전되어 엘람 문명의 기틀이 다져지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성장하였다.
주요 도시로는 정치·행정 중심지인 수사(Susa)와 내륙 중심 도시인 안샨(Anshan, 파르스 지방)이 있었다.
아완(Awan)과 시마시(Simashki), 그리고 수칼마(Sukkalmah) 등 세 개의 주요 왕조가 이 시기를 지배했다.
아완(Awan) 왕조(약 BC 2700 ~ 2200)가 엘람 최초의 왕조로 추정된다.
엘람의 아완(Awan) 왕조는 사르곤 대왕(Sargon of Akkad, 재위 약 BC 2334 ~ 2279)의 아카드 제국에 의해 일시 정복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세력(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 등)과 경쟁 및 교류 관계를 유지했다.
엘람은 수메르 초기 왕조 시대 말기(Early Dynastic III, 약 BC 2500 ~ BC 2330년경)에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지배권과 무역로를 놓고 수메르와 충돌했다.
수메르의 키시(Kish) 왕 엔메바라게시(Enmebaragesi)에 의해 정복되기도 했으며, 반대로 엘람 왕조가 수메르 일부 지역을 장악하기도 했으며 라가시(Lagash)와도 반복적인 충돌을 하였다.
엘람의 왕 쿠틱-인수시낙(Kutik-Inshushinak, 재위 BC 2240 ~ BC 2220)이 우르(Ur) 및 남부 메소포타미아 일부를 단기간 점령하였다.
이 시기 엘람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를 차용하여 엘람어를 표기했다. 엘람어는 다른 근동 언어와 관련이 없는 고립어로 여겨진다.
메소포타미아의 영향 속에서도 엘람은 독자적인 건축 양식과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초가잔빌(Chogha Zanbil)에 인슈시낙(Inshushinak, 엘람의 수호신, 수사의 수호신)을 주신(主神)으로 모신 지구라트(ziggurat, 신전형 탑, 신에게 바치는 계단형 건축물) 등이 있다.
아카드 제국(BC 2334 ~ BC 2154) 붕괴 후 엘람에서는 시마시 왕조 (Simashki, 약 BC 2100 ~ BC 1970)가 세워져 엘람이 다시 독립하고 세력을 강화하여 우르 제3왕조(우르-남무, 슐기 등)와의 전쟁(BC 2112 ~ BC 2004)에서 승리하여 우르 제3왕조의 멸망(BC 2004)에 큰 역할을 하였다.
시마시 왕조는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체제를 파괴했던 것이다.
시마시(Simashki) 왕조 후에 수클마흐 왕조(Sukkalmah Dynasty, 약 BC 1970 ~ BC 1500, 중기 왕조로 보는 학자도 있음)가 세워졌다.
수클마흐 왕조는 3명의 지방 왕들이 병렬적으로 통치하는 “3중 왕권 체제(triadic kingship)”였다.
수클마흐 왕조에서는 왕을 ‘수클마흐(Sukkalmah, 대왕, ‘위대한 섭정)'라 하였다.
왕권이 강화되었으나 지방 자치도 유지되고 신전 중심의 신정적 요소로 수사(Susa)에 신전 및 제의 중심지가 있었고 주신(主神)은 인수시아낙(Inshushinak, 수사의 신, 수사를 지키는 자)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활발히 했으며 바빌로니아와의 동맹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에 영향력 행사했으며 조약 기록과 왕실 문서 등이 설형문자로 남아 있다.
보리, 밀을 중심으로 한 곡물, 가축 사육, 관개 시설 등 농업과 금속공예, 직물, 토기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청동 조각상, 석조 부조, 인장(seal) 등 발달된 예술품이 발굴되었다.
기원전 1600년경, 내부 분열과 바빌로니아의 침입으로 약화되었으며 이후 중 엘람(Middle Elamite) 시기로 전환되었다.
다) 중 엘람(Middle Elamite, BC 1500 ~ BC 약 1100년경)
안샨(Anshan)을 중심으로 한 중 엘람을 지배한 전체 왕조를 안샨 왕조(Anshan Dynasty, 이게할루 Eparti), BC 1400 ~ BC 1100)라 한다.
키데누(Kidinuid) 왕조(약 BC 1500~1400)가 중 엘람 시대를 열었으며 지방 분권화 체제를 통합하며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하였다.
수사(Susa)를 정치 중심지로 하고 안샨(Anshan, 파르스 지역)을 왕권의 근거지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왕이 종교 지도자 역할을 겸했다.
이글리드(Igihalkid) 왕조(약 BC 1400 ~ BC 1200)에서는 바빌로니아와 교류를 활발히 하여 카시트 왕조와 결혼 동맹을 체결하는 등 외교적으로 안정기였다.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엘람어로 공식 문서를 작성하였다.
슈트루키드(Shutrukid) 왕조(약 BC 1200 ~ BC 1100)는 강력한 군사력을 길러 국제 강국으로 부상하였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적극적으로 전쟁과 문화적 교류를 병행했다.
우타슈-나피리샤 왕(Untash-Napirisha,BC 1275 ~ BC 1240경)은 엘람의 위대한 왕으로 초가 잔빌(Chogha Zanbil)에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훔반(Humban, 왕권수호신으로 엘람의 최고의 신)에게 봉헌하는 훔반 신전(Humban Temple, Ziggurat, 지구라트)을 건설했다.
엘람에서는 인수시아낙(Inshushinak, 수사의 신, 수사를 지키는 자)을 널리 숭배했으며 수사(Susa)에는 인수시아낙(Inshushinak, 수사의 신, 수사를 지키는 자)을 숭배하는 지구라트(Ziggurat)가 있었다.
슈트룩-나훈테 I세(Shutruk-Nahhunte I, BC 1185 ~ BC 1155)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함무라비 법전 석비, 나람신 부조를 엘람으로 가져왔다.
중 엘람은 엘람 왕국의 황금기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유사하게 문화가 발전했으며 광물질과 지하자원을 수출하는 등 메소포타미아, 이란 내륙, 인더스 지역과의 교역이 활발했으며 종교적으로 특이하게 뱀을 숭배하였다.
중 엘람 시대는 정치·군사적으로 강력하였고, 문화가 절정을 이룬 안정된 시기였다.
이 시대에 조로아스터교 전단계(pre-Zoroastrian religion)의 종교인 빛, 물, 바람, 전쟁 등 자연현상 중심의 신들을 섬기는 다신교적 신앙 체계가 형성되었다.
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인 이란계 아리아인(Iranian Aryans)이 북쪽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우랄산맥 남쪽–카스피해 북쪽 지역)에서 BC 2,000년경부터 시작하여 약 BC 1500 ~ BC 1000년경에 대거 이란 고원으로 이주, 정착하여 서부에 메디아(Media), 남서부에 파르스(Fars, 고대 파르사, 페르시아)족 등을 형성하였다
아리아인(Aryans)들은 엘람 문명과 교류 및 충돌하며서 이후 메디아와 페르시아 제국의 주류 민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리아(Arya, 고귀하다)는 이란(Iran, 아리안의 땅,Land of the Aryans)의 어원이 되었다.
기원전 1100년경 엘람의 내부 정치 가 혼란해지고 중 아시리아 세력의 팽창으로 압박이 가해졌으며 경제 교역망이 붕괴로 인해 쇠퇴하여 신 엘람(Neo-Elamite) 시대가 시작되었다.
라) 신 엘람(Neo-Elamite, BC 1100 ~ BC 539)
이웃한 신아시리아 제국 및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강력해짐에 따라 신엘람(Neo-Elamite)은 이들과 경쟁하거나 협력하며 명맥을 유지했던 시기이다.
신엘람 I기(BC 1100 ~ BC 770경)에는 신 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 ~ BC 609)의 부흥으로 신엘람은 압박을 받았으며 수사(Susa)를 중심으로 왕조가 존속했다.
신엘람 II기(BC 770 ~ BC 646경)에는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 ~ BC 609)과의 충돌로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 BC 626 ~ BC 539, 칼데아, Chaldea)과 동맹을 맺고 신아시리아에 대항하는 등 군사적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신엘람 III기(BC 646 ~ BC 539경)에는 신흥 강국인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 ~ BC 609)의 마지막 위대한 왕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의 공격으로 수도 수사(Susa)가 완전히 파괴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엘람 왕국은 기원전 539년 이란 지역의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 BC 550 ~ BC 330)의 창건자인 키루스 2세(Cyrus II, Cyrus the Great, 재위 BC 559 ~ BC 530)에 의해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엘람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란 고원 문명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여 이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 메디아 왕국(Median Kingdom, BC 850 ~ BC 550)
이란계 아리아인(Iranian Aryans)이 북쪽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우랄산맥 남쪽–카스피해 북쪽 지역)에서 약 BC 1500 ~ BC 1200년경(중 엘람 시대)에 남하하여 이란 고원(서북부에 메디아, 남서부에 파르스, 북동부에 파르티아)에 정착하였다.
이란 고원 서북부 메디아 지역(이란의 하마단, 에크바타나 지역)에 정착한 여러 부족들은 아시리아 제국의 영향권 아래 분산되어 살았으며, 각각의 족장이 지배하는 부족 연맹체였다.
데이오케스(Deioces, 재위 BC 728 ~ BC 675)는 메디아인(Medes) 부족 중 한 부족의 재판관(judge)으로 이름을 떨친 지방 지도자였다.
여러 부족들이 서로 싸워 혼란에 빠지자 그를 추대하여 BC 728년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데이오케스(Deioces, 재위 BC 728 ~ BC 675)는 엑바타나(Ecbatana, 하마단 Hamadan)를 수도로 정하고 일곱 겹의 성벽을 둘러 요새 도시로 만들었다.
왕권을 강화하고 각 지방에 총독(주지사)를 임명하는 등 통치 체제를 구축하여 부족 중심 사회에서 국가 중심으로 전환하였다.
그의 아들 프라오르테스(Phraortes, 프라바르타, 재위 BC 675 ~ BC 653)는 메디아 지역 내의 각 부족(마기, 파르타, 파르스 등)을 완전히 통합하여 중앙 집권 체제의 실질적 국가를 만들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있는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의 정복을 시도했다.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은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였고 왕은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이었다.
프라오르테스는 메디아, 만다, 키메르인, 그리고 페르시아 병력을 이끌고 신아시리아를 침공했지만 기원전 약 653년경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했다.
메디아 왕국이 형성되던 시기에 신엘람 왕국(Neo-Elamite Kingdom, BC 1100 ~ BC 539)은 이란 남서부 지역(후제스탄 Khuzestan 지방)에서 약해진 세력이지만 여전히 수사(Susa)를 중심으로 강력한 지역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메디아는 서이란 지역, 신엘람은 남서이란 지역으로 서로 지역이 달라 충돌 없이 병존하였다.
기원전 612 ~ BC 609년에 메디아 왕국의 후바크샤트라 왕(Cyaxares, 재위 BC 625 ~ BC 585)은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나보폴라사르 왕(Nabopolassar, BC 626 ~ BC 605, 신바빌로니아 제국 창건자)과 동맹을 맺고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 ~ BC 609)의 수도 니네베(Nineveh)을 공격하여 멸망(BC 612)시키고 영토를 신바빌로니아 왕국과 메디아 왕국이 분할하여 점령하였다.
소아시아(튀르키예) 서부의 리디아 왕국(Lydia kingdom, BC 12세기경 ~ BC 546)은 세계 최초로 주화(금화, 은화)를 사용한 부유한 상업 왕국이었다.
BC 585년 메디아 왕국은 리디아 왕국과 소아시아 동부의 국경 지역(카파도키아 지역)에 대한 영토 분쟁으로 리디아–메디아 전쟁(BC 590 ~ BC 585, 일식 전투 Battle of the Eclipse, 할리스 전투 Battle of Halys)을 하였다.
전투 도중 일식 현상이 발생하자 양측이 싸움을 중단하고 평화 조약 맺어 국경을 할리스강(키질르르마크 강)으로 정하였다. 고대에서 일식이 전쟁을 멈추게 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란 남서부(후제스탄 지방)에 존재했던 고대 문명국인 엘람 왕국(Elam Kingdom, BC 2700 ~ BC 539)은 기원전 539년 이란 지역의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 BC 550 ~ BC 330)의 창건자인 키루스 2세(Cyrus II,Cyrus the Great, 재위 BC 559 ~ BC 530)에 의해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메디아 왕국은 왕권 중심의 군주제를 데이오케스 이후 확립하였고 귀족층과 제사장층(마기, Magi)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으며 행정 조직이 발달하였다.
초기에는 미트라(Mithra, 진실, 계약, 정의, 태양, 빛 의 신), 아후라(Ahura, 신성한 존재, 빛과 진리의 신), 아나히타(Anahita, 순수하고 강력한 여신) 등을 숭배하는 다신교였으나 후대로 갈수록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전단계 신앙이 확산되었다..
메디아 왕국은 엘람, 바빌로니아 문명과 교류하여 이란-메소포타미아 복합문화권 형성하였다.
메디아 최후의 왕 아스티아게스(Astyages, 재위 BC 585 ~ BC 550)의 외손자인 키루스 2세(Cyrus II, 아케메네스 제국 창건자)가 BC 550년에 반란을 일으켜 메디아 왕국(Media Kingdom, 약 BC 678 ~ BC 550)을 멸망시켰다.
3)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왕조(Hakhāmanišiya)
메디아 왕국(Median Kingdom, BC 850 ~ BC 550)의 종속국인 안샨왕국(Anshan Kingdom)의 왕이었던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Cyrus II 키루스 2세, BC 600 ~ BC 530, 재위 BC 559 ~ BC 530)이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왕조(Hakhāmanišiya, B.C. 550 ~ B.C. 330)를 세웠다. 키루스 2세는 메디아(BC 550), 리디아((Lydia, 튀르키예 서부, BC 2천년기 후반 ~ BC 6세기까지 번영, 세계 최초의 주화, BC 546)와 바빌로니아를 정복(BC 539)하는 등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 전반기까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일부, 이란, 이라크, 지중해 동쪽의 마케도니아, 트라키아와 흑해 서부 해안(오늘날 불가리아 남동부와 동부), 이집트, 아나톨리아, 페니키아, 레반트 등을 지배하는 대제국이었고 정치체제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다.
수도는 이란 남부 파르스(Fars) 지방에 있는 파사르가다이(Pasargadae)이다.
키루스 2세는 바빌로니아를 정복(BC 539)하고 유대인 귀환령(바빌론 포로 해방령, The Edict of Cyrus)을 공포하였다(BC 538).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 재위 BC 605 ~ BC 562)가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끌고갔다.
기원전 539년 키루스 2세가 바빌론 제국을 정복하고 기원전 538년 바빌론 포로 해방령(The Edict of Cyrus)을 공포하여 포로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신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허락했던 것이다.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재위 BC 530 ~ BC 522)는 BC 525년 이집트를 정복(파라오 시대의 종말)하였으나 폭정으로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왕족의 방계인 다리우스 1세(Darius I, 재위 BC 522 ~ BC 486)가 반란을 일으켜 BC 522년에 왕위에 오르고 각 지역의 반란을 진압했다.
다리우스 1세(Darius I,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는 여러 지역의 반란을 진압한 뒤 반란을 진압한 정당성과 왕권의 정통성을 선포하는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 Bisotun Inscription)을 절벽에 새겼다.
높은 암벽 절벽에 3개 언어(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로 다리우스가 왕위에 오른 과정과 각지에서 발생한 반란의 세부 상황과 반란을 진압한 정당성 등을 기록하고 반란 지도자들이 포로로 묶여 있는 장면을 부조로 새겨 놓았다.
다리우스 1세(Darius I)는 행정·도로·화폐 제도를 정비하고 사트라프(Satrap, 지방 총독) 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사트라프를 감시하는 체제를 만들어 왕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왕의 길(Royal Road, 길이 약 2,700 km, 엘람의 수사 Susa ~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Sardis)을 건설하였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는 그리스를 3차례 원정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했다.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First Persian invasion of Greece, BC 492)은 다리우스 1세(Darius I, 재위 BC ~ BC 486)가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 BC 492년 원정하였으나 그의 함대가 아토스(Athos, 그리스 북부 할키디키 Halkidiki 반도) 곶(串)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되었다.
다리우스 1세는 BC 490년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Second Persian invasion of Greece)을 일으켰으나 아테네군에게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에서 패하였다.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Xerxes I, 재위 BC 485 ~ BC 465)가 BC 480년 제3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Third Persian invasion of Greece, BC 480 ~ BC 479)을 일으켰다.
그리스는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30개 그리스 도시국가가 참여한 동맹을 결성하여 육군은 스파르타가, 해군은 아테네가 지휘권을 맡았다.
페르시아군은 육지에서 승리하였으나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9.)에서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 ~ BC 459)에게 패하였던 것이다.
이란 서남부의 '파르스(Fars)' 지방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최초 발상지며 이 '파르스'의 그리스 명칭인 페르시스(Persis)가 '페르시아(Persia)'로 변화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Hakhāmanišiya, B.C. 550 ~ B.C. 330)는 고대 세계의 금 생산지역을 지배하였으므로 많은 양의 금이 페르시아로 집합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왕이 금으로 만든 판에 써넣은 선언문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란 파르스(Pars) 지방의 마르브다슈트(Marvdasht)에 위치한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궁정도시라고 불리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는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석조 궁전 건축으로 다리우스 1세(Darius I, 재위 BC 522 ~ BC 486) 때에 건설을 시작하여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2세 등이 확장하였다.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의 특징은 길이 450m, 너비 300m, 높이 약 15m의 거대한 인공 테라스에 장대한 계단식 입구인 북서쪽의 이중계단(Double Stairway), 만국문(萬國門, 천국의 문, Gate of All Nations, 크세르크세스 1세 건축)이 있으며 중요 궁전으로는 아파다나 궁전(Apadana Palace), 타차라(Tachara, 다리우스의 개인 궁전), 하디쉬(Hadish, 크세르크세스의 궁전), 백주 궁전(백인궁전, Hundred-Column Hall) 등이 있으며 그 외에 보물고(Treasury)가 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종교는 자라투스트라(Zarathushtra, 조로아스터)가 BC1500 ~ BC 1000년 사이에 창시한 유일신교(唯一神敎)인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 Mazdaism, 배화교, 拜火敎)이며 정복한 지역에 조로아스터교를 강제하지는 않았다.
조로아스터교의 중심 개념은 아샤(Asha)이며 아샤의 의미는 진리(Truth), 우주적 질서(Cosmic Order), 정의(올바름, Righteousness), 자연법칙(Natural Law), 도덕적 질서(Moral Law), 빛의 길(규칙, 조화, Harmony) 등으로 “우주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아샤의 정의이고 아샤는 우주와 윤리를 하나의 체계로 묶는 개념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아샤(Asha, 진리·질서)와 드루즈(Druj, 거짓, 속임, 혼돈, 무질서를 의미하는 악의 원리)의 대립이며 이를 우주 전체의 시간적 구조로 설명한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우주 시간을 12,000년의 4단계로 설명한다.
a. 1차 3,000년 : 드루즈 없는 아샤의 완전한 창조
b. 2차 3,000년 : 드루즈의 침입으로 우주는 결투 상태에 돌입
c. 3차 3,000년 : 인간 역사가 시작되어 선·악의 싸움이 인간 선택에 의해 전개
d. 4차 3,000년 : 구세주인 사오샨트 (Saoshyant)가 정화하여 최종 구원(프라쇼케레티, Frashokereti)
그래서 조로아스터교는 우주(천체), 시간, 빛을 핵심으로 삼는 천문 중심적 종교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숭배하는 불은 빛·진실·질서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가시적·물리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불은 단순한 자연의 불이 아니라 신의 본질인 아샤(Asha, 진리, 정의, 우주질서)를 세상에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조로아스터교에서 불을 숭배하는 것은 자연의 불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불 속에 깃든 신적 질서’를 공경하는 것이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BC 336년 즉위하여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였다.
BC 334년 알렉산드로스가 소아시아(튀르키예)의 그라니코스 전투(Battle of the Granicus, BC 334, 튀르키예 북서부 빌레지크·발리케시르)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진격을 시작하였다.
BC 333년 아케메네스의 다리우스 3세(Darius III)가 친히 이수스 전투(Battle of Issus, BC 333, 튀르키예 남부)에 출정했으나 패배하였고 왕비와 가족이 포로로 잡혔다.
BC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Battle of Gaugamela, BC 331, 이라크 북부 모술 Mosul 근처)에 페르시아군이 총동원되었으나 대패하여 사실상 제국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BC 330 년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이란 남부 파르스 Fars 지방)를 점령하여 불태웠다(복수 상징).
BC 330 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가 자신의 부하 바수스(Bessus, 박트리아 총독)에게 살해당함에 따라 아케메네스 제국은 멸망하였다.
4) 알렉산드로스 제국(헬레니즘 제국, Hellenistic Empire, BC 332 ~ BC 309)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III Magnus, BC 356 ~ BC 323)는 고대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왕국(Μακεδονία, BC 808 ~ BC 148) 필리포스 2세(Philip II, BC 382 ~ BC 336)의 왕자로 태어나 16세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되어 교육받았다.
필리포스 2세는 BC 346년 포키아(Phokida)를 병합하여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었다.
BC 338년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 2세와 같이 아테네, 테베, 그리고 코린토스 등 도시국가들의 연합군을 상대로 카이로네이아 전투(Battle of Chaeronea, BC 338)에서 승리하였으며 BC 337년 마케도니아 왕국은 스파르타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가 포함된 코린토스 동맹(League of Corinth, BC 337, 군사 동맹)을 수립하여 맹주가 되었다.
BC 336년 알렉산드로스는 20세에 아르게아스 왕조(Argeadai, 마케도니아 왕국의 첫번째 왕조, BC 808 ~ BC 310)의 제26대 마케도니아 국왕(재위 BC 336 ~ BC 323)이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제정이 궁핍하였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금이 쌓여있다는 이집트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먼저 이소수 전투(Battle of Issus, BC 333)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고 소아시아(아나톨리아, 튀르키예)를 정복한 다음 331년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며 이집트를 떠나 다시 가우가멜라 전투(Battle Of Gaugamela, BC 331) 등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에게 승리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을 정복했으며 인도 북부까지 침략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정복한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재위 BC 332 ~ BC 323)에 등극하였으며 페르시아에서도 페르시아 국왕(재위 BC 330 ~ BC 323)으로 즉위하였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지명은 자기 이름을 따서 스스로 붙인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세우고 우수한 그리스 문명과 문화를 미개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전파하고자 했으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문명과 문화가 더 우수하여 두 국가의 우수한 것을 융합하여 헬레니즘(Hellēnismos, 19C 요한 구스타프 드로 이젠 Johann Gustav Droysen 이 명명, 그리스 문화를 동양 식민지에 전파) 문화를 열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BC 323년 31세에 바빌론에서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준비 중에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은 와인의 과음인지 독살인지 불분명하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하자 그의 부하 장군들은 대왕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i, 후계자 전쟁 Wars of Alexander's Successors, BC 323 ~ BC 281)을 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급사했을 때 후계자는 없었으나 록사네(Roxana, ? ~ BC 309) 왕비가 임신 중이었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의 체제를 결정하기 위해 개최된 바빌론 회의에서 임신 중인 아이의 성별을 알 수 없어 대왕의 배다른 형인 아리다이오스를 명목상 필리포스 3세(Philip III, 재위 BC 323 ~ BC 317)로 세우고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i, 후계자 전쟁 Wars of Alexander's Successors, BC 323 ~ BC 281)의 장군 중의 한명으로 제국의 총사령관이 된 페르디카스(Perdiccas, ? ~ BC 321)가 섭정을 하며 왕비가 임신 중인 아이가 남자로 태어날 경우 공동 왕으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BC 323년 8월 임신 중인 아이가 남아로 태어나 알렉산드로스 4세(Aleksandros IV, BC 323 ~ BC 309)로 즉위하여 필리포스 3세(Philip III, 재위 BC 323 ~ BC 317)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BC 808 ~ BC 168, BC 150 ~ BC 148)은 BC 148년 로마와의 전쟁(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Fourth Macedonian War)에 패배하여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 알렉산드로스 사후 주요 헬레니즘 국가들
A. 마케도니아 왕국(Antigonid Kingdom, BC 306 ~ BC 168)
수도 : 펠라(Pella)
지역 :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Aleksandros IV, BC 323 ~ BC 309)가 본국 계승, 로마에 의해 멸망 (BC 168)
B.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c Kingdom, BC 305 ~ BC 30)
수도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지역 : 이집트, 키레나이카, 팔레스타인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재위 BC 305~282 )가 건국, 과학·문화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설
C. 셀레우코스 제국(Seleucid Empire, BC 312 ~ BC 63)
수도 : 니카토르 셀레우키아 → 안티오키아
지역 :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박트리아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Seleucus I Nicator)가 건국,
가장 광대한 헬레니즘 제국, 로마·파르티아와 대립
D. 페르가몬 왕국(Attalid Kingdom, BC 282 ~ BC 133)
수도 : 페르가몬(Pergamon)
지역 :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서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 리시마코스(Lysimachus)의 통치지역인 트라키아 소속 페르가몬 요새(Pergamon Fortress, 소아시아)의 재정 담당관이었던 필레타이로스(Philetaerus)가 건국,
예술·학문 중심, 로마와 동맹, 로마에 영토를 넘김, 로마의 아시아 속주(Provincia Asia)가 됨
E. 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 BC 250 ~ BC 125)
수도 : 박트라(Bactra)
지역 : 중앙아시아(현 아프가니스탄,
셀레우코스 제국(Seleucid Empire)의 박트리아 지역 총독(satrap)이었던 디오도토스 1세 (Diodotus I, 재위 약 BC 250~230년)가 건귝,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분리 독립, 인도-그리스 문화 형성
F. 인도-그리스 왕국(Indo-Greek Kingdom, BC 180 ~ BC 10경 )
수도 : 탁실라(Taxila) 등
지역 : 북인도, 간다라 지역
박트리아 왕 데메트리오스 1세(Demetrius I)가 건국
헬레니즘과 불교 문화 융합 (예: 간다라 미술)
5) 셀레우코스 제국(Seleucid Empire, BC 312 ~ BC 63)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그의 부하 장군들이 대왕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i, 후계자 전쟁 Wars of Alexander's Successors, BC 323 ~ BC 281)을 치렀는데 디아도코이 전쟁의 최종 전투인 코로페디온 전투(Battle of Corupedium, BC 281, 소아시아 서부 리디아 지역)에서 승리한 시리아의 바빌로니아 총독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Seleucus I Nicator, BC. 358 ~ BC 281)가 아케메네스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여 셀레우코스 제국(Seleucid Empire, BC 312 ~ BC 63)을 BC 312년에 세웠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절대왕정으로 폴리스를 유지하였고 왕은 “왕의 친구들(Philoi)”과 귀족들로 행정을 운영하였다.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지배층인 소수의 그리스인이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였다.
동방(박트리아·인도)과 서방(그리스·이집트)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무역의 중심지 역활을 하였다.
그동안 지방에서 세력을 키워온 파르티아(Parthia, 이란 북동부)와 박트리아(Bactria,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의 남쪽과 아프가니스탄의 북쪽) 지방의 사트라프(satrap, 총독)들이 BC 250년경 반란을 일으켜 왕국을 세웠다.
로마-셀레우코스 전쟁(BC 192 ~ BC 188) 중 마그네시아 전투(BC 190) 에서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군에 대패하여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유대 지역에서 셀레우코스의 헬레니즘 정책에 대한 반발로 BC 167~ BC 160년에 마카베오 반란이 일어났다.
BC 141~ BC 129년에 셀레우코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패함에 따라 파르티아, 박트리아가 셀레우코스의 영토를 분리하여 독립하였다.
그리고 그레코-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 BC 256 ~ BC 125)은 기원전 약 130년경 월지족(Yuezhi, 月氏)이 침범하여 쿠샨 제국(Kushan Empire, 30 ~ 375,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북부,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일부)의 기초를 세웁에 따라 멸망했다.
BC 63 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Pompey, BC 106 ~ BC 48)가 시리아를 정복함에 따라 셀레우코스 제국(Seleucid Empire, BC 312 ~ BC 63)은 완전이 멸망하였다.
6)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2세(재위 BC 261~ BC 246) 때 파르티아(Parthia) 지방의 총독 안드라고라스(Andragoras)의 반란으로 혼란해지자 기원전 247년 북동부 파르티아 지역(이란 호라산 지방)에서 다하에(Dahae)라는 이란계 스키타이계 유목민 연맹에 속한 파르니(Parni) 부족의 지도자였던 아르사케스 1세(Arsaces I)가 셀레우코스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켜 이란계 아리아인(이란 고원 북부의 파르니족, Parni)의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 공식명은 아르사케스 왕조 Arsacid Dynasty)을 세웠다(나머지 이란은 알랙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
파르티아(Parthia)는 이란 북동부에 해당하는 고대의 지역으로 전성기에는 이란, 아르메니아, 이라크, 조지아, 터키 동부, 시리아 동부,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의 페르시아만 해안 지역,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까지를 영토로 가진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 아르사케스 제국, Arsaces, Arshak, B.C. 247 ~ A.D. 224)이 되었다.
파르티아 제국은 지방에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아르사케스 가문은 유력한 가문으로 명목상 군주였으며 제국 전체를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BC 53년 로마의 크라수스(Marcus Crassus)가 파르티아를 침공하여 파르티아 수레나(Surena) 장군과 카라이 전투(Battle of Carrhae, BC 53)가 벌어져 파르티아 장군 수레나(Surena)가 기병 중심의 전술로 대승하였다.
BC 36년 로마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가 침범하였으나 파르티아 왕 프라아테스 4세(Phraates IV)에게 대패하였다.
파르티아 제국은 군대를 기마궁수(Parthian cavalry)와 중장기병(cataphracts)을 중심으로 조직하였으며 말 달리며 뒤돌아 활을 쏘는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 전법이 유명하였다.
실크로드(Silk Road) 중간 통로로 이용되어 번영하였다.
초기에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가 주류였으나 지방별로 그리스·메소포타미아·이란 전통신앙이 혼재했다.
문화는 헬레니즘 문화와 이란 전통 문화가 융합되었고 공식 언어는 아람어(Aramaic)였으나 민중 언어는 파르티아어(Parthian, 중이란어파 Middle Iranian languages)였다.
2세기 이후 내부 귀족 반란과 왕위 다툼이 심하였고 로마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AD 224년 사산 가문(Sasan family)의 파르티아 제국의 지방 지배자 출신인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I)가 반란을 일으켜 마지막 왕 아르타바누스 4세(Artabanus IV)를 격파하고 사산 왕조(Sasanian Empire)을 세웠다.
7) 사산 제국(사산 왕조, Sassanids, Sassanid Empire, Eranshahr 에런샤흐르, 사산조 페르시아, 224 ~ 651)
사산 가문의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I, 재위 226 ~ 241)는 파르티아 제국의 지방 지배자 출신으로 사산 제국(224 ~ 651)을 건국한 직후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를 멸망시켜 서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사산 왕조는 강력한 중앙정부 체제를 갖추어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를 구축하였으며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서 국가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인구와 경제력에서 사산 왕조를 압도했던 동로마를 상대로 효과적인 전쟁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샤푸르 1세(Shapur I, 241 ~ 272)는 로마 제국과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았고 나르세(Narseh, 293 ~ 302)는 로마와의 평화조약 체결하얐으며 호스로 1세(Khosrow I, Anushirvan 아누시르반, 531 ~ 579)는 행정과 세금제도를 개혁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고 학문을 보호하였으며 비잔티움과 균형 유지하는 등으로 전성기였다.
호스로 2세 (Khosrow II, 590 ~ 628)는 비잔티움과 전쟁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나 결국에는 패배하였다.
세계 최초의 종합 대학, 의학센터, 병원, 번역국, 과학 연구소 기능을 모두 갖춘 곤디샤푸르(Gundēshāpūr)는 사산조(Sassanian Empire)에서 가장 중요한 학술·의학·철학 중심지로 꼽히는 도시이자 교육·연구 기관이다.
곤디샤푸르는 페르시아 남서부 후제스탄(Khuzestan) 지방에 위치하였으며 명칭은 샤푸르 1세(Shapur I)의 부인 “곤디스”에서 유래하였다.
곤디샤푸르는 시리아어 기독교 학자, 그리스 의학 전통(갈레노스 의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인도 의학(Ayurveda), 조로아스터교 학자 등 다양한 문화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융합적 과학 체계를 만들었다.
자라투스트라(Zoroaster 조로아스터)가 BC 6 ~ BC 7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창시한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Mazdaism 마즈다교, 배화교 拜火敎)가 국교이며, 조로아스터에서 분파된 마니교와 마즈다크교도 같이 유행했다.
7세기 초 아라비아에서 발흥한 이슬람의 라시둔 칼리프조(Rashidun Caliphate, 정통 칼리파 시대)의 제2대 정통 칼리프(caliph, 무함마드의 대리, 이슬람 제국의 주권자의 칭호) 우마르 이븐 알 하탑(Umar ibn al-Khattab, 586 ~ 644, 칼리프 재위 634 ~ 644) 때인 636년 총사령관 사아드(Sa‘d Ibn Abī Waqqās)가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을 하여 까디시야 전투(Battle of al-Qādisiyyah, 636)에서 야즈데게르드 3세(Yazdegerd III, 632 ~ 651)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며 페르시아는 651년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