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프, 1822~1895)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프, 1822~1895)
김진국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프, 1822 ~ 1895)는 프랑스 Jura주 돌 지역의 가죽 제조공인 Jean-Joseph Pasteur 가에서 태어났다. Louis Pasteur는 Arbois(Jura) 지역에서 초등교육을 받았고 1840년 브장송대학교에서 문학사학위를 받았으며 1842년에는 브장송대학교 왕립대학에서 이학사학위를 받았다.
파스퇴르는 1843년 파리의 유명한 사범대학교인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에 입학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845년 물리학을 전공하여 이학석사학위를 받았다.
파스퇴르는 1846년부터 발라르(Antoine Jerome Balard, 1802 ~ 1876, 1826년 브롬 발견)의 조수로 화학 연구에 참여하였다.
1847년(25세)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에서 주석산 결정에 대한 선광성을 연구하여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선광은 어떤 물질에 편광을 통과시킬 때 편광의 진동면이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회전하는 현상으로 어떤 물질이 대칭 요소(대칭면·대칭 중심·사영 축)를 가졌을 때, 그 물질이 2개의 광학 대칭체 중, 어느 하나만이 있는 경우 또는 하나가 더 많이 있는 경우에 나타나므로 물질의 구조 연구에 이용된다.
1848년 파스퇴르는 디종 리세(중등학교)의 물리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이어서 스트라스부르대학교의 화학교수로 초빙받아 갔다.
1849년 스트라스부르 대학 총장의 딸인 마리 로랑과 결혼했다.
1854년 파스퇴르는 릴(Lille ) 대학교 과학부의 학장이 되었다.
릴(Lille) 지역은 양조공장 등이 많은 공장지대였다.
1. 발효과정 규명
파스퇴르는 릴(Lille) 대학교 화학교수로 근무하던 1856년에 학부형인 한 양조 업자로부터 사탕무로 만든 술이 쉽게 변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은 다음부터 발효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파스퇴르는 1837년 캉 나르 드라 투르가 양조장의 맥주통에 효모가 없으면 맥주가 되지 않는다는 발표를 떠 올리고 발효 현상을 화학반응으로 설명하는 기존의 이론과는 달리 미생물이 발효와 관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미경을 가지고 양조장으로 가서 조사했다. 발효가 잘 되는 발효통에서는 둥근 효모를 발견했으나 발효가 되지 않는 발효통에서는 효모를 발견할 수 없었다. 알코올 발효는 효모가 일으킨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술이 상한 발효 통에서는 효모와 많은 젖산균(유산균)을 발견하였다.
1857년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과학연구부 학장이 되었다. 발효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서 젖산(lactic acid) 발효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발효는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미생물이 활동한 결과이며 발효에 필요한 미생물이 없거나 적절히 자라지 못하면 발효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상적인 알코올 발효는 효모(곰팡이)의 활동으로 일어나지만 비정상적인 발효는 젖산균(lactic acid bacteria, 유산균, 乳酸菌)과 같은 다른 미생물이 발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860년 발효에 관한 논문으로 상을 받았다.
1857년 12월 앙투안느 베샹(Antoine Bechamp, 프, 1816 ~ 1908)은 공기가 있는 상태에서 곰팡이가 생장되고 효소가 생성되어 발효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발효과정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며 누가 처음 규명했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파스퇴르가 1857년에 우유의 젖산(유산, 乳酸, 락트산, lactic acid, CH3CHCOOH) 발효 및 당(糖)의 알코올 발효를 실험으로 조사해 발효를 ‘산소 없는 미생물의 생활’이라고 발표함에 따라 독일의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와 파스퇴르 사이에 발효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독일의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는 발효란 효소에 의한 화학 반응으로 효모균은 효소의 부산물일 뿐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알부민이 설탕을 분해해서 알코올을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베르틀로(Pierre Eugène Marcelin Berthelot, 1827 ∼ 1907, 프랑스 화학자)는 효모균이 발효를 일으키는 화학 물질을 분비한다고 주장하였고 테오도어 슈반(Theodor Schwann, 1810 ~ 1882, 독일 생리학자)은 생체론적 개념으로 발효는 생물체가 활동하여 생성하는 부산물로 효모균이 물질을 먹고 소화하고 배설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효모는 곰팡이에 속하지만 포자로 번식하지 않고 출아법으로 번식하며 산소가 있는 곳에서는 산소호흡으로 당(단당류와 이당류)을 물과 이산화탄소로 분해하면서 많은 에너지를 획득하여 빠른 속도로 번식하면서 잘 살아가지만 산소가 없는 곳에서는 무산소 호흡(알코올 발효)으로 당(단당류와 이당류)을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발효)하여 적은 에너지를 획득하므로 번식이 느리며 겨우 살아가는 좀 특이한 종이다.
젖산균(乳酸菌, 유산균, 종류가 많음)은 세균(박테리아)에 속하며 일부 유산균은 통성혐기성(facultative anaerobe, 通性嫌氣性, 무산소 호흡과 유산소 호흡을 모두 할 수 있는)이며 비피더스 유산균(乳酸菌, lactic acid bacteria, 젖산균)은 산소가 있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고 산소가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혐기성 세균(산소를 싫어하는 세균)이다. 유산균(乳酸菌, lactic acid bacteria, 젖산균)은 무산소 호흡으로 당을 젖산(lactic acid)으로 분해한다. 부분적으로 분해(젖산 발효)하여 소량 발생하는 에너지로 살아가는 세균이다.
그리고 1837년 Friedrich T. kutzing(독)은 에탄올이 미생물에 의해 아세트산( 초산)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어서 1868년 pasteur는 아세트산(초산) 발효에 acetobacter(초산균)가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1897년 부흐너(Eduard Buchner, 1860 ~ 1917, 독일)는 효모를 모래로 으깬 액을 설탕 용액에 첨가하니 이산화탄소 기포가 발생했다. 이것으로 무세포 발효(cell-free fermentation), 즉 생명체가 없어도 효소만 있으면 효소가 작용하여 발효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후 부흐너(Eduard Buchner)는 효모에서 알코올 발효효소를 추출하고 치마아제(zymase, 찌마제)라고 명명하였지만 실제 알코올 발효는 엠덴-마이어호프-파르나스의 경로(Embden-Meyerhof-Parnas pathway, EMP pathway)라고 하는 해당 과정(glycolysis)으로 포도당에서 피루브산(pyruvic acid)이 생성되고 알코올이 생성되며 이에 12종류의 효소가 작용한다.
치마아제(zymase, 찌마제)는 하나의 효소가 아닌 것이다.
영어로 발효는 fermentation이라고 하는데 fervere는 라틴어로 ‘끓어오르는’이란 뜻이다. 효모에 의해 당분이 무산소 상태에서 발효가 일어날 때 이산화탄소가 기포로 괴어오르는 현상을 보고 붙인 것이다.
2. 병원의 멸균 도입 역설
1860년 파스퇴르는 여성들의 출산 위험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에 수많은 파리 여성들이 출산 후 죽었다. 그는 외부에서 세균이 몸에 침입하여 병을 일으킨다는 매균설을 주장하면서 의사들은 손을 씻고 기구들을 살균해야 한다(1843년 의사 논문이 있었음)는 권고를 하였으나 의사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라 생각하여 의학회는 조소를 하였고 나폴레옹 3세는 파스퇴르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하였다.
파스퇴르는 자신의 주장을 수용하여 외과 의학에 멸균과 소독을 적용했던 영국의 무균 수술로 유명한 외과 의사인 조지프 리스터(Joseph Lister, 1827 ~ 1912, 영국, 외과의사)와 우정을 맺기도 했다.
조지프 리스터는 1865년 페놀(phenol, 석탄산)에 의한 무균 수술법을 고안하였으며 연구를 계속하여 1867년에 '외과 임상에서의 소독법의 원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페놀(phenol, 석탄산)로 손을 소독하고 수술에도 분무기로 페놀(phenol, 석탄산)을 뿌리는 방법으로 성공했다.
조지프 리스터(1827 ~ 1912)는 소독법을 개발하여 외과 치료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1897년 의사로서는 영국 최초의 남작(男爵, baron, 5 작위 중에서 다섯 번째)이 되었다.
3. 생물 속생설(생명 속생설, Biogenesis) 확립
그는 생물이 자연에서 우연히 발생한다는 ‘자연 발생설’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알코올 발효 과정에서 공기 중에 노출시키면 발효가 빨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미생물들이 공기 중에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공기를 여과하는 방법을 개발해 공기 중에 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발효되지 않은 식품을 높은 알프스 산의 공기 중에 노출해 보는(산소부족으로 세균 죽음) 등의 여러 방법으로 실험을 하였다.
1861년에는 백조 목처럼 생긴 긴 플라스크를 실험에 사용하여 자연 발생설이 잘못된 이론임을 증명하였다.
그때 자연 발생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공기 중에 생명을 일으키는 물질이 있으므로 공기가 들어가야 자연발생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공기가 들어가도 생명이 발생하지 않는 장치로 고안한 것이 백 조목 플라스크이다.
백조의 목처럼 플라스크의 목을 S자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고깃국을 넣고 플라스크를 가열하여 멸균하였다. 플라스크의 구부러진 목 부분에는 고깃국을 끓일 때 나온 수증기가 맺혀 물이 고이게 되고 이 물방울이 공기는 통과시키지만 미생물이 밖에서 고깃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주었다. 그 결과 오래 동안 지나도 고깃국이 부패하지 않았다. 미생물은 플라스크의 고기 국에서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 중에 존재하는 미생물이 플라스크 속의 고기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자연 발생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에 따라 생물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어버이 생물로부터 발생한다는 생물 속생설(생명 속생설, 생명 연속설)이 확립된 것이다.
그런데 160℃에도 살아있는 세균이 있어 실험으로 완전한 결판이 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연 발생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철회하지는 않았지만 힘을 잃었다.
파스퇴르는 자기 학문으로도 확신했지만 창조론을 신봉하는 기독교인으로서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생명이 생성된다는 자연 발생설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4. 저온살균법 개발
1863년 파스퇴르는 미생물이 식품 발효와 부패의 원인임을 증명하고, 부패를 예방하기 위한 저온살균법을 개발하였다.
식품을 60 ~ 65℃ 에서 30분가량 가열하여 무균상태에 가깝게 하는 살균법이다. 저온 살균법은 저온으로 살균하여 대부분의 균은 살균되지만 식품의 맛과 향기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 상품성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이론을 식초와 포도주(65℃)에 적용시켰다. 이 두 상품은 프랑스 경제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열에 의해 해로운 세균과 효소를 파괴시키는 저온살균법은 이들 식품들을 부패 없이 생산, 보관, 운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파스퇴르는 발효를 산업과 연계하여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국가적인 경제에 큰 성과를 거두어 큰 명성을 얻었다.
우유에 저온처리는 단백질 변성 문제로 논란이 있었지만 1895년 족살레이트(Franz Ritter von Soxhlet, 1848 ~ 1926, 독일, 농화학자)는 이 방법을 우유에 적용하여 63 ~ 65℃로 30분 동안 가열(Low temperature long time, LTLT)하면 비타민, 당류, 단백질 등을 손상없이 살균할 수 있게 되었다(저온 가열, 低溫加熱, Par-boiling, underboiling, Pasteurization).
그런데 건강한 우유에는 저온살균법으로 살균되지 않는 균이 별로 없으므로 저온살균법으로 오랜 기간 저장이 가능하지만 병든 소의 우유에 있는 병균은 저온처리로는 살균이 되지 않으므로 1960년대에 고온 처리 방법(Ultra-high temperature processing, UHT, 135 ℃에서 2 ~ 3초 가열)이 나오게 된 것이다.
5. 누에 전염병 퇴치
1865년 프랑스 남부지방에 누에 전염병이 발생했다. 누에 전염병에 대한 연구를 하라는 은사인 J. A. 뒤마의 요청을 받고 양잠업의 중심지이던 남부 프랑스로 이사했다.
파스퇴르는 3년간의 연구로 병을 일으키는 간균(세균)을 분리했으며, 이 병들의 예방방법을 발표했다. 누에의 미립자병(微粒子病)과 연화병(軟化病)은 누에에서만 발생하고 알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병든 누에를 모두 폐기하여 병의 전염을 막을 수 있었다.
1865년 파스퇴르는 장티푸스로 딸을 잃고 자신도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그래서 파스퇴르는 감염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866년에 포도주의 발효(Etude sur le Vin)란 책을 출간하여 발효의 종류와 미생물과의 관련성을 밝히고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였다.
6. 파스퇴르의 권력화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 재위 1852 ~ 1870)는 그를 위해 새로운 실험실을 만들어 주었다. 발효로 나라 경제에 큰 기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민족 간 경쟁관계에 있는 독일이 학문적으로 우위를 점함에 따라 프랑스에서는 파스퇴르가 큰 희망이었다. 파스퇴르는 발효가 무산소 상태에서 효모와 세균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밝혀 효소에 의한 화학반응으로 발효가 일어난다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Liebig, Justus Freiherr von Liebig, 1803 ~ 1873, 유기화학의 아버지, 최소량의 법칙, 1857년 파스퇴르가 발표한 발효의 미생물 이론에 대해 논쟁함, 독)계의 논리보다 우위를 점하였으며 또 세균학자 코흐와 대립하여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런데 파스퇴르가 죽은 후인 1897년 독일의 생화학자인 에두아르트 부흐너(Eduard Buchner)는 효모 대신에 효모를 갈아서 추출한 용액을 넣어도 알코올 발효가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하여 발효가 효모가 분비한 효소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였다.
부흐너(Eduard Buchner)는 효모로부터 알코올 발효효소를 추출하고는 치마아제(zymase, 찌마제)라고 명명하였지만 실제 알코롤 발효는 엠덴-마이어호프-파르나스의 경로(Embden-Meyerhof-Parnas pathway, EMP pathway)라고 하는 여러 효소가 관여하는 복잡한 경로로 일어난다.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Franco-Prussian War, 1780 ~ 1781, 보불전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에서 패하여 독일에 알자스로렌 지방을 넘겨주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므로 프랑스 국민들은 크게 상처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파스퇴르는 1865년에 미생물학 업적으로 독일의 본 대학에서 명예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었다.
그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명언을 남기며 학위를 돌려주었다. 이는 프랑스 국민들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지켜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교회는 창조주가 생물을 창조한 이래 그 자손들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생물 속생설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를 증명한 파스퇴르는 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국민과 나폴레옹 3세, 교회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학문 세계에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영향력이 강해짐에 따라 그와 경쟁했던 베샹, 앙리 투생 등 프랑스 과학자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것이다.
어쨌든 지금도 파스퇴르는 프랑스에서 나폴레옹보다도 더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7. 맥주 저온살균 처리
1870년 파스퇴르는 맥주에 대한 연구를 했다. 프랑스와 런던의 양조업자들이 맥주가 시간이 지나면서 품질이 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파스퇴르는 식초와 포도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저온살균법으로 해결했다. 맥주를 오랜 기간 보관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당시에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서 인도로 항해해야만 했던 영국의 수출업자들은 맥주를 인도까지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1873년 그는 의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74년 프랑스 의회는 그에게 연구하는 동안 물질적인 안정을 보장해 주었다.
맥주의 저장 문제가 해결되자 맥주 맛에 대한 연구가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었고 특히 독일에서 효모 중에서도 순수 종을 분리 배양하여 이용함으로써 먼저 맛의 발전을 가져왔다.
8. 닭 콜레라 면역법 개발
1877년부터 인간과 고등동물에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으로 관심을 돌린 그는 1880년 프랑스에 닭 콜레라가 창궐하자 닭 콜레라의 원인균을 찾아내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병에 걸린 닭의 피를 뽑아 세균을 분리 배양한 다음, 다시 건강한 닭에게 주사하자 닭들에서 닭 콜레라 증세가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파스퇴르는 닭 콜레라균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해 파스퇴르는 조수에게 닭 콜레라균을 배양하도록 지시하고 휴가를 갔으며 조수도 균을 배지에 접종하여 선반에 놓아둔 채 휴가를 떠났다. 한 달 뒤에 돌아와 보니 영양분이 떨어진 배양액에서 자란 세균들은 약해져 있었다.
약해진 배양균을 닭에게 접종했더니 닭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
이 잘못된 배양균에 실망한 이들은 다시 강한 닭 콜레라균을 배양하여 닭들에게 접종했다. 그런데 다시 배양한 강한 균으로 접종한 일부 닭들은 병에 걸렸고 일부 닭들은 조금 앓다가 금방 나았다. 이 원인을 조사하던 중 강한 균으로 접종했다고 생각한 닭들에는 새로 배양한 강한 균으로 접종한 닭들과 전에 배양하여 약해졌던 균을 접종한 닭들이 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일반적인 강한 콜레라균을 접종한 닭들은 닭 콜레라에 걸렸고, 약해진 균을 접종했던 닭들은 닭 콜레라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이 우연한 결과에 제너의 우두를 떠 올리며 약해진 세균에 의해 병을 가볍게 앓고 나면 그 병에 대한 면역력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닭 콜레라균의 독성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찾던 중 세균을 42 ~ 43℃의 고온에 배양하면 된다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닭 콜레라 면역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파스퇴르는 약하게 만든 세균을 백신(vaccine , Vakzin, 왁친)이라 하고 백신을 접종하는 것을 '예방접종(vaccination)'이라 불렀다. 1796년에 영국의 의사인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에 우두(vaccinia)로 만든 백신을 접종한 예를 따라 백신(Vaccines [vækˈsiːn] , 독일어 Vakzin [ vaktsɪ́:n ] 박친, 왁찐 ; 일본식 표기)이란 용어를 붙인 것이다.
9. 탄저병 면역법 개발
1881년 양을 대상으로 탄저병(코흐, Robert Koch, 1843 ~ 1910, 탄저균 발견)에 대한 백신을 개발하는 연구를 시작하였다. 탄저균을 산화와 숙성 등의 방법으로 약화시켜 백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탄저균 백신을 접종한 양에 탄저균을 주입하여 백신이 성공하였다는 공개실험을 하고 특허를 신청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 파스퇴르는 산소로 산화시키는 백신 생산방법으로 탄저균 백신을 개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탄저균 백신 개발에 경쟁 관계에 있던 앙리 투생(Henry Toussaint, 1847 ~ 1890)은 화학적 방법(중탄산칼륨)으로 약백독신 개발을 완성하였다. 그래서 파스퇴르는 백신을 공개 실험할 때 앙리 투생이 개발한 약백독신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특허권은 파스퇴르에 돌아갔다. 그 후 파스퇴르는 산화와 숙성 등의 방법으로 백신을 대량 생산하여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일로 앙리 투생은 정신적 붕괴로 죽었다고 한다. 1998년이 되어서야 탄저병 백신의 최초 개발자는 앙리 투생(Henry Toussaint)이라고 인정되었다. 탄저병 백신의 최초 개발자가 앙리 투생으로 최근에 와서 밝혀진 것은 파스퇴르의 실험 노트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파스퇴르는 매일 연구한 내용을 실험 노트 140권에 기록해 놓았으며 공개하지 말라 고 해서 그동안 묻혀 있었다. 이 실험노트가 유엔 기록 문화유산에 등재됨에 따라 공개된 것이다.
탄저병은 가축 질병이지만 사람도 전염될 수 있으므로 사람의 감염성 질병을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1882년 4월 27일 파스퇴르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0. 광견병 면역법 개발
1882년 파스퇴르 팀은 광견병(공수병, 바이러스에 의한 병)의 백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바이러스의 배양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광견병에 걸린 개에서 얻은 혈액, 침 등의 추출물을 이용하여 실험실의 배지에 배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토끼의 척수에 혈액의 추출물을 주입하여 토끼에게 광견병을 발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살아있는 토끼에서 광견병균을 배양하게 된 것이다.
광견병으로 죽은 토끼의 척수를 수 센티미터 길이로 잘라 공기 중에서 건조하면 독성이 서서히 약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들은 토끼의 척수를 일정한 크기로 자른 다음 공기 중에 1일부터 14일까지 보관한 각각의 척수를 차례로 개에게 투여하여 시간 경과에 따른 광견병 원인 바이러스의 독성을 측정하였다. 그 결과 죽은 균의 독성을 약화시켜 사용할 수 있는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었다.
이 실험은 파스퇴르의 조수이며 의사인 에밀 루(emile roux, 1853 ~ 1933, 알렉상드르 예르생과 공동으로 디프테리아균 발견)의 박사학위 논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광견병은 잠복기가 아주 긴 질환이므로 개에 물린 후에도 백신을 빠른 시간에 주사하기만 하면 그 효과를 나타낸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1885년 7월 6일, 광견병 개에 물린 당시 9세의 메스테르(Joseph Meister)라는 소년이 엄마와 함께 파스퇴르를 찾아왔다. 의사들이 접종을 한 결과 광견병에 걸리지 않았다. 여러 환자에게 접종하여 성공하여 1885년에 광견병 예방주사가 개발된 것이다. 그런데 처음 이 소년에게 사용한 것은 이때 개발했다는 백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1. 질병에 대한 세균론의 확립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프, 1822 ~ 1895)와 코흐(Robert Koch, 1843 ~ 1910)에 의해 세균론(germ theory)이 확립되었다. 세균론이란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세균이므로 세균을 약으로 죽이거나 백신으로 면역시켜야 한다는 이론으로 현재에도 서양의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때 프랑스에서는 질병에 대항하는 이론으로 Pasteur와 코흐의 세균론(germ theory) 뿐만 아니라 앙투안느 베샹(Antoine Bechamp, 1816 ~ 1908)의 세포론(cellular theory),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 ~ 1878)의 생체 환경론(terrain theory) 등이 있었다.
베샹은 세포론(cellular theory)에서 미생물은 건강에 무해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지만 마이크로자임(Microbiome, 미생물들로 이루어진 생태환경, 미생물 Microbe와 생태계 Biome의 합성어)이 우리 체내의 pH 등의 환경 조건이 잘못되면 유해환경에 반응하여 병원성을 가진다고 하였다.
베샹의 세포론(cellular theory)은 자기 몸을 건강하게 하여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나 중국 의학의 근본과 비슷하다. 베르나르의 생체 환경론(terrain theory)도 몸의 방어 능력을 기르고 면역력을 높여 병균에 대항해야 된다는 것으로 베샹의 세포론(cellular theory)과 베르나르의 생체 환경론(terrain theory)은 거의 일치한다.
코흐는 세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주위 환경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했다.
12. 수상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죽은 후에 유명해진 분들이 많지만 파스퇴르는 젊었을 때부터 유명하여 명예, 권력, 부를 함께 누렸으며 많은 수상을 하였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파스퇴르의 연구로 발효산업의 발전을 이룩한 영국,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까지 상을 수여했다.
노벨은 노벨상을 가장 먼저 주어야 할 사람으로 파스퇴르를 꼽았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노벨상이 제정되기 6년 전인 그리고 노벨이 죽기 1년 전인 1895년에 죽었다.
13. 파스퇴르 연구소 설립 및 추모
그를 기념하고자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에서는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해 1888년에 준공하였다.
파스퇴르는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했다. 이 연구소는 현재 프랑스는 물론 세계 의학 연구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Pasteur 연구소는 파리뿐만 아니라 세계에 여러 지역에 분소가 개설되어 연구를 이어가고 있으며, 인류에게 큰 업적을 남긴 그를 추모하고 있다.
파스퇴르는 1895년 9월 28일 파리 근교 Villeneuve l'Etang(Seine-et-Oise 주)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연구소 지하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