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

우장춘 박사(우장춘박사 생애, 합종설, 배수체)

진국 2014. 7. 2. 15:42

우장춘(禹長春) 박사

                                                       김진국

1. 출생과 생장

 우장춘(1898 ~ 1959)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은 조선말 개화파로 신기군의 훈련 2 대대장(參領, 참령, 소령에 해당)으로 근무하던 중 명성황후가 친일파에 의해 장악된 신기군을 해산시키자 이에 불만을 품은 신기군 군사를 이용하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 梧楼)가 주도한 1895년(고종 32)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에 가담했다. 우범선은 시해 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던 날 신기군을 동원하여 일본 경찰과 군 그리고 일본 낭인을 경복궁으로 끌고 갔던 병력 동원의 책임자였으며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워 연못에 버리도록 지시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일본이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조선에서 세력을 잃게 되자 역적이 된 우범선은 조선에서 살 수가 없어 처자식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자객을 일본에 파견하여 도망간 역적들을 처단하고 있었으므로 우범선은 이를 피하기 위해 은신하던 중 은신하던 집의 하녀인 일본인 사카이 나카(酒井仲)와 결혼하였다. 
 우장춘 박사는 1898년 4월 9일에 그들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후 아버지는 고종이 파견한 황국협회 고영근에 의해 1903년 암살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본 정부의 후원도 끊어져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우 박사는 6살 때 고아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후에 가정 형편이 나아지자  히로시마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아버지와 가깝게 지냈던 박영효(朴泳孝, 1861 ~ 1939, 철종의 사위, 급진 개화파)의 영향력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농업 실과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학비를 지원받아 1916년 도쿄 제국 대학 농학부 농업 실과(전문대학과정)의 청강생으로 입학하였다. 본인은 공과를 원하였지만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실과를 지원하였다. 농학부 농업 실과는 실습을 주로 하며 농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이었으며 학술적인 이론과 응용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대학과정은 아니었다.
 191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농림성 산하 연구소에 취직하여 나팔꽃의 유전에 대해 연구하였다. 첫 번째 연구논문은 1926년 〈일본 유전학〉 잡지에 게재된 「종자로서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대하여」이다. 이어서 페튜니아와 나팔꽃의 변이(變異), 돌연변이 등 화훼(花卉, flowering plant)의 유전 연구에 골몰했다.

2. 겹꽃 페튜니아

 농림성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사카다 종묘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겹꽃 페튜니아 씨앗을 개발하게 되었다.
페튜니아(petunia)는 암술(1개), 수술(5개)인 양성화를 가지며 장식이나 정원용 꽃으로 많이 이용되는 화초이다. 홑꽃의 페튜니아는 포기가 작고 꽃이 예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암술(1개), 수술(5개)이 있어 씨앗이 정상으로 생성되었다. 그런데 겹꽃 피튜니아는 암술이 퇴화되어 꽃잎이 되었으므로 꽃잎의 수가 많은 겹꽃이라 크고 색깔이 다양하여 화려하였다. 그렇지만 암술이 없어 종자가 생성되지 않아 꺾꽂이로만 번식이 가능했으므로 대량 번식이 불가능했다. 겹꽃 페튜니아(화분)와 홑꽃 페튜니아(암술)를 교배시키면 홑꽃, 겹꽃이 혼재되어 나타났으므로 겹꽃만 피는, 상품성이 있는 종자를 생산할 수 없었다.  
 우장춘 박사는 겹꽃 유전인자(S)가 홑꽃 유전인자(s)에 대해 우성이며, 단인자(單因子)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알아내고는 특정한 겹꽃 페튜니아(SS 유전자인 수술?)와 홑꽃 페튜니아(ss 유전자인 암술)를 인공 수분시켜 항상 잡종(Ss)인 겹꽃만 나타나는 겹꽃 페튜니아 씨앗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다. 미국 사람들이 겹꽃 페튜니아를 무척 좋아했지만 겹꽃 페튜니아에서는 겹꽃 페튜니아 종자와 홑꽃 페튜니아 종자가 혼합되어 생산되므로 미국은 상업적인 겹꽃 페튜니아 종자를 생산할 수 없어 일본이 만든 잡종 씨앗을 해마다 계속 수입해야 했으므로 연구비를 제공한 사카다 종묘는 많은 돈을 벌여 들였다.
우장춘 박사는 겹꽃 페튜니아에 관한 이 연구로 세계적인 유전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우장춘 박사는 1930년에 나팔꽃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탈고했으나 그가 생활하던 연구소의 농장 본관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그의 논문 자료들이 소실돼 버렸다.

3. 결혼

 1924년에는 가정교사를 한 인연으로 일본인 교사인 와타나베 코하루(渡辺小春)와 결혼을 했는데 코하루 집안에서는 반대하였다. 어렵게 결혼한 코하루 본인은 집안과 의절하고 지냈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후에 우장춘 박사는 망명 조선인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스나가 나가 하루(須永長春)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자녀들도 일본인으로 키우기로 하여 스나가 성을 사용했으나 우장춘 본인은 계속 우 씨 성을 사용했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명문 양반 집안의 후손이었으며 자신도 명문 집안인 우 씨의 후손이라는 것을 긍지로 삼은 것 같다. 단 이름은 일본식을 사용하였다. 그가 쓴 영어 논문에도 저자가 '우 나가 하루(Nagaharu U)'로 나와 있다.

4. 합종설

 우장춘 박사가 이룩한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1935년 '배춧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논문이다.
우장춘 박사는 배춧속(Brassica)에 속하는 동질 이배체(autodiploid)인 브라시카 라파(Brassica rapa, 2n=2x=AA=20, n=A=10, 배추 등), 브라시카 올레라케아(Brassica oleracea, 2n=2x=BB=18, n=B=9, 양배추 등), 브라시카 니그라(Brassica nigra, 2n=2x=CC=16, n=C=8, 흑겨자)의 핵형을 분석하고 이들 세 종류의 게놈(genome)을 기본으로 브라시카 나푸스(Brassica napus, 2n=4x=AABB=38, n=2x=AB=19, 유채 등), 브라시카 윤케아(Brassica juncea, 2n=4x=AACC=36, n=2x=AC=18, 갓 등), 브라시카 카리나타(Brassica carinata, 2n=4x=BBCC=34, n=2x=BC=17, 에티오피아겨자) 등의 이질사배체(allotetraploid) 게놈(genome)과의 관계를 규명하였는데 이를 우장춘의 트라이앵글(U's Triangle)이라 한다.
우장춘 박사의 종의 합성 이론을 우스 트라이앵글(U's triengle)로 간단히 나타낸 것이다.

* 우스 트라이앵글(U's triengle)

삼각형의 세 변에 양배추(B. oleracea, n=9), 배추(B. rapa, n=10), 흑겨자(B. nigra, n=8)를 놓고, 세 꼭짓점에 유채(B. napus. n=19), 에티오피아겨자(B. carinata, n=17), 갓(B. juncea, n=18)을 놓는다.
우스 트라이앵글(U's triengle)의 내용은 삼각형의 이웃 두변이 만나 꼭지점을 이루듯이
양배추(n=9)+배추(n=10)→유채(n=19),
배추(n=10)+흑겨자(n=8)→갓(n=18),
양배추(n=9)+흑겨자(n=8)→에티오피아겨자(n=17)가 생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 박사는 실제로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시켜 유채를 합성함으로써 기존에 학설로만 있던 종의 합성 이론을 실험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때까지 종의 합성 이론은 있었지만 실험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박사는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유채를 실험적으로 합성하여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종간 잡종과 종의 합성이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밝혔다. 결국 기존의 종들이 합해져서 새로운 종이 될 수 있다는 하나의 진화론을 확립하게 했던 것이다.
이 실험이 우장춘 박사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말과 당나귀가 결혼하면 노새가 태어나지만 노새들끼리는 결혼할 수 없으므로 다시는 자손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새는 새로운 종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우장춘 박사는 유채 염색체 수(2n=38)는 배추 염색체 수(2n=20)와 양배추 염색체 수(2n=18)를  합한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배추(염색체 수 : 2n=20)와 양배추(염색체 수 : 2n=18)를 교배시켜 유채(염색체 수 : 2n=38)를 탄생시켰다. 이렇게 탄생된 유채는 자손을 계속 이어 나가므로 하나의 종이 된 것이다. 유채라는 종은 우장춘 박사의 실험 전에도 자연에 존재했다. 자연에 존재하는 유채는 그 옛날에 배추와 양배추의 교배로 종이 합성되어 탄생되었다는 것을 우장춘 박사의 실험으로 증명이 된 것이다. 즉 같은 속(屬)의 종들은 서로 간의 교잡이 가능하며 신종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이를 종의 합성이라 한다.
  합종설은 하나의 진화론이다.
 보통 종간 잡종이 형성되면 유전자의 이질성 때문에 그 자손은 불임이 된다. 종간 잡종이 되면 수정된 세포의 염색체는 정자 난자의 염색체가 달라 상동염색체가 아니다. 그래도 체세포 분열은 가능하여 생장하지만 상동염색체가 아니면 생식세포를 생성하는 제1 감수분열 중기에 상동염색체 짝을 이루지 못하여 발생하는 염색체 비분리(chromosome nondisjunction) 현상으로 감수분열(생식세포분열)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생식세포가 생성되지 않아 불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생성된 잡종 생물이 염색체의 이질 배수화(allopolyploidization)를 일으키면 자손을 생성할 수 있다.
배추(염색체 수 : 2n=AA=20)의 생식세포의 염색체 수는 n=A=10개이고  양배추(염색체 수 : 2n=BB=18)의 생식세포 염색체 수는 n=B=9개이다. 그래서 배추 생식세포(n=A=10)와 양배추 생식세포(n=B=9)가 수정하면 염색체가 2n=AB=19개의 개체가 된다. 이들 염색체는 상동 염색체가 하나도 없는 반수체(半數體, haploid, 생식세포)와 같은 이질 이배체(異質二倍體, allodiploid) 즉 2n=2x=AB=19이다. 이질 이배체(2n=2X=AB=19)는 생장은 가능하지만 감수분열이 불가능(염색체 비분리)하여 생식 능력이 없으므로 이질 이배체(2n=2x=AB=19)가 이질사배체(2n=4x=AABB=38)로 되어야 유채(염색체 수 : 2n=4x=AABB=38)가 된다(n는 생식세포인 Haploid, 2n은 체세포, x는 배수성 set, x는 일배체 monoploid, 4x는 사배체 tetraploid, 2n=4x=AABB 이질사배체, 2n=4x=AAAA 동질 사배체).
이질 배수체(Allopolyploid)란 유전적으로 다른 종 사이에서 생성된 잡종의 염색체 수를 2배가 되게 함으로써 형성된 배수체(이질 배수체 : 부모가 다른 종간에 생긴 자손이 배수체 된 것, 동질 배수체 : 부모가 같은 종간에 생긴 자손이 배수체 된 것)를 말하는데 그 구성 지놈(genome) 수에 따라 각각 이질 이배체(allodiploid, 2n=2x), 이질 삼배체 (allotriploid, 2n=3x), 이질 사배체(allotetraploid, 2n=4x), 이질 N배체(allo N Ploid)라고 하며 이들을 이질 배수체(allopolyploid)라고 총칭한다.
근연종 간에 발견되는 자연배수 종의 대부분은 여기에 속한다.
생식 능력이 없는 이질 이배체(allodiploid, 2n=2x=AB)가 이질 사배체(allotetraploid, 2n=4x=AABB)가 되어야 생식능력을 가지게 되는데 그 발생 원인으로는 종간 교잡에 의하여 생긴 배아(embryo)에서 바로 배수 현상이 일어나거나, 또는 잡종의 비환원성(감수분열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생성된) 배우자(생식세포)가 합하여 배수가 되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환원성 배우자는 감수분열이 일어나 생성된 배우자이다).
 일본에서 1952년에 양배추(♀) × 배추(♂)의 교잡 후 유배(幼胚; 교배 후 30일 이내 고사)를 끄집어내어 배 배양(종자가 아직 익기 전의 어릴 때에 그 속에 있는 눈을 따내어 식물로 길러내는 기술)으로 유채 식물의 육성에 성공했다.
단수체에서 핵내유사 분열(endomitosis)로 DNA 양이 2배로 된 다음에 세포질 분열이 일어나지 않아 단수체가 이배체가 된 것이다.
 인위적으로 콜히친을 처리하여 배수체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은 1937년 블레이크슬리(Albert Francis Blakeslee, 1874 ~ 1954, 미국, 식물학자, 콜히친 처리에 의한 배수성의 연구)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우장춘 박사의 이질 배수체는 콜히친 처리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우장춘 박사는 대학도 실과 과정을 졸업하였고 박사과정도 밟지 않았지만 종의 합성 실험 등 여러 논문의 업적이 인정되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종의 합성 실험이 박사학위에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조선 개화 이후 한국인 최초의 박사는 이승만 박사이며 이과 분야의 최초의 박사는 우장춘 박사이다.  
유전 분야 연구에서 한국인의 이름으로 알려진 과학 이론으로는 우장춘 박사가 거의 유일한 존재이다.
 우장춘 박사는 1936년에 도쿄 제국 대학 농학 박사학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종 차별로 농림성 산하 연구소에서 진급이 되지 않아 퇴사하였다. 이후 곧 타키이 종묘에 연구원으로 입사하여 십자화과 식물에 대한 연구에 진력하다가 1945년 전쟁이 끝나고 퇴사, 5년을 실직자로 보낸다.

5. 환국

 1945년 패망한 일본은 조선인에게 일본에 귀화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일본에서 나가라고 했지만 우장춘 박사는 귀화를 하지 않았으며 성도 바꾸지 않았다.
 그때 한국에서 우장춘 박사 귀국 운동이 벌어졌으며 환국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어 우 박사를 초청하였다. 1950년 3월 우장춘 박사는 가족을 모두 일본에 놓아두고 혼자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한국에서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기를 바란 이유는 해방 이후 한국의 식량사정이 극도로 나빠서 우량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우장춘 박사도 한국에 귀국해서 연구하기를 원했는데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에서 그동안 봉사했으므로 나머지 기간은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서 연구하고 봉사하여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환국 추진 위원회와 국민들이 모금운동으로 모운 돈을 우장춘 박사에게 건넸으나, 우장춘 박사는 가족들에게 이 돈을 주지 않고 한국에서 연구에 필요한 우량종자를 구입하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살았으므로 한국어를 몰랐다. 귀국 후 이승만 박사를 예방했는데 일본을 극도로 싫어했던 이승만 박사는 한국어를 못하고 일본어를 하는 우장춘 박사를 환대하지 않았다.
경상남도에서 모셔가 경상남도 농촌진흥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한국농업연구소장, 중앙 원예기술원 원장, 농사원 원예시험장장을 역임하면서 해방 후의 한국 농업과 원예 분야를 선도했다.
 한국 정부는 우장춘 박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우 박사의 일본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돌아올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출국하면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우 박사는 그와 같이 살면서 도와주었던 한국 여성이 있었지만 어렵게 생활했으며 특히 어머니를 그리워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장춘 박사가 어머니 장례의 부조로 받은 돈으로 연구소와 주민들을 위해 만든 우물의 명칭을 자유천(慈乳泉,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라고 새긴 것으로 보아 어머니를 그리워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장춘 박사는 이후 한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9년간 경상남도가 운영하는 농촌진흥원에서 지내며 한국의 육종학과 농업 발전에 기틀을 다졌다.
 제주도에 감귤농업을 제안하였고, 일본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한국 토양에 맞는 결구배추(結球, 김치 배추)를 개발(그때까지 반결구 배추밖에 없었음) 하였고, 피폐해진 한국 국토에 원예와 농업, 특히 채소 육종에 힘썼으며 그 외에도 당시 열악했던 한국 농학 분야에 선구적인 일들을 많이 했다.
 그 공로로 사망하기 며칠 전에 국가로부터 문화포장을 수여받으시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포장이라면 훈장 중에 가장 낮은 급이지만 우장춘 박사에게 수여한 문화포장은 정부 수립 후 문화 분야에 수여한 모든 훈포장 중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안익태 박사에게 포장 수여)로 수여한 것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우장춘 박사 자신은 역적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멍에에다가 한국어를 못한다고 무시하며, 믿지 못하여 모친의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으면서 보상으로 훈장을 수여하였으니 심정이 착잡하였지만 조국에 봉사한 것을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농가에 수익이 큰 벼와 감자 연구에 몰두하다 1959년 서울 메디컬 센터에 입원하여 십이지궤양 수술 후 병이 악화되어 8월 10일 타계했다.
 그가 근무한 농촌진흥원이 있던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그 앞길의 도로명도 우장춘로(禹長春路)이다.
 그리고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에 있는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인 원예시험장 한가운데에 우장춘 박사의 흉상이 있으며 무덤은 농촌 진흥청 내에 위치하고 있는 여기산에 있다.

6. 씨 없는 수박의 개발은 우장춘 박사와 관련이 없다.

 우리에게는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처음 개발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씨 없는 수박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교토대학의 기하라 히토시(木原 均, きはらひとし, Hitoshi Kihara, 1893 ~ 1986, 유전학자) 박사이다. 기하라 히토시 박사팀은 1943년 경에 콜히친을 처리하여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하여 1947년에 발표하였다.
씨 없는 수박은 콜히친을 처리하여 생성한 4 배체(4n) 수박과 정상적인 이배체(2n) 수박을 인공 교배시켜 만든 3 배체(3n) 수박을 심으면 3 배체(3n) 수박은 체세포 분열은 가능하여 생장하지만 꽃이 피어 생식세포를 생성하는 제1 감수분열 중기에 상동염색체가 짝을 이루지 못하여 발생하는 염색체 비분리(chromosome nondisjunction) 현상으로 감수분열(생식세포분열)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생식세포가 생성되지 않아 수분을 시키면 씨는 생성되지 않고 열매만 생성되는 것이다.
 콜히친 처리로 4 배체를 형성할 때 일어나는 염색체 비분리(Nondisjunction) 현상은 염색체를 끌고 가는 염색사를 이루는 미세소관(microtubule, 튜불린 단백질로 구성)이 콜히친에 의해 신장(伸張, elongation)이 저해되기 때문이다.
우장춘 박사는 귀국 후 한국에서 일반 농민들을 비롯한 대중들에게 육종학과 농업기술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1953년에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씨 없는 수박을 국내에서 최초로 시연한 사람이 우장춘 박사였는데, 그것을 그때 기자들이 우장춘 박사가 처음 개발한 것이라고 잘못 알고 기사화를 했기 때문이다.

* 4 배체(tetraploid)와 이질사배체(allotetraploid) 생성

인공의 4 배체(tetraploid)는 2 배체(diploid)의 종자나 생장점(growing point)에 식물 종에 맞는 저농도의 콜히친 수용액( 0.05% 정도)을 적정시간(12시간 정도) 처리하여 만들며 이질사배체(allotetraploid, 2n=4x=AABB)는 다른 종의 사배체(2n=4x=AAAA, 2n=4x=BBBB)를 교배하여 생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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