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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캐나다의 성립과 영토 확장

진국 2022. 10. 15. 14:29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Infante Dom Henrique)가 대항해 시대를 시작한 이후로 유럽은 세계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개척했다.
대항해로 식민지 개척을 처음 시작한 포르투갈은 주로 아프리카, 인도, 브라질, 아시아, 중동 등에 무역소(貿易所, 商館, 상관)를 세우고 무력으로 보호하여 향신료, 금, 은 등을 수입하여 부를 창출하여 대제국이 되었으며 돈이 많이 필요로 하는 정착민을 대거 보내지는 않았다.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개척한 서인도제도와 쿠바를 기점으로 하여 남미의 멕시코, 페루, 북미의 플로리다, 태평양 동쪽 해안의 캘리포니아, 미국의 서부, 미국 중앙 미시시피 강 양쪽의 루이지애나까지 진출하여 탐사하였지만 미국 동부와 서해안 북쪽의 오리건, 워싱턴 지역 및 캐나다 지역은 너무 멀고 날씨가 추워 북위 42도까지만 진출했다.
더욱이 북미에서 금과 은을 얻기 위해 광산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으며 정착촌을 별로 건설하지 않았으므로 실효적인 지배력이 약했다.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에서도 북쪽의 기아나(가이아나, Guyana, 콜럼버스가 1498년 세 번째 항해에서 발견) 지역은 경제성이 없다고 경영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후추 같은 향신료를 찾지는 못하였지만 금광이 주로 중 남미에 많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북미보다는 중 남미 위주로 탐험하고 정복하여 식민지(뉴 스페인, New Spain, 누에바 에스파냐, Nueva España, 오늘날의 멕시코, 서인도제도, 플로리다, 미시시피 강 유역 등 스페인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이들 식민지에서 많은 금, 은 등을 획득하여 본국으로 가져와 부를 축적하였다.
스페인은 페루, 멕시코, 미국, 필리핀 등 넓은 식민지를 개척하여 대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이슬람의 지배에서 겨우 벋어나 국력이 빈약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대양으로 먼저 나가서 원주민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부를 약탈했으며 그리고 식민지를 건설하여 대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스페인보다 군사적으로 약했던 영국은 조선과 철강 산업을 발달시켜 날렵한 배와 수많은 대포를 생산하여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긴 하였지만 아직 국력이 약하였다. 영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같이 원주민의 부를 약탈할 수 있는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으므로 기존 국가의 부를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민을 이주 정착시켜 부를 생산하는 식민지를 건설해야 했다. 이런 식민지 건설에 처음에는 개인이 소규모로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국가가 대규모로 정착민을 보내기에는 재정이 많이 필요하였으므로 바로 실행할 수 없어 식민지를 건설하지 못했으며 더군다나 바로 내전으로 돌입했다.
스페인은 영국과의 전쟁에 패하였지만 남미의 식민지로부터 부는 계속 유입되어 오랫동안 강국으로 유지되었다. 스페인은 가톨릭을 신봉하고 이교도인 유대인, 이슬람인, 신교(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파의 총칭)인을 배척하여 축출하거나 종교재판에 넘겼다.
그래서 스페인에 거주하던 유대인과 이슬람인들은 그들의 기술과 스페인에서 축적한 재산을 가지고 종교가 보다 자유로운 네덜란드로 가서 조선업, 해운업, 금융업 등을 크게 발전시켜 네덜란드를 세계열강이 되게 하였다.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쳤지만 그때 네덜란드는 벌써 경제력과 군사력이 막강한 대국이 되어 있었으며 세계 무역의 주역이 되어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영국은 내전을 치르고 강한 군대를 양성하여 네덜란드를 제압하고 대영제국을 건설하였다.
프랑스는 유럽의 강국이었으므로 해외로 진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으나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 종교전쟁, 1562 ~ 1598)을 치른 후 뒤늦게 진출하여 미국의 루이지애나(Louisiana)와 캐나다의 몬트리올, 퀘벡 등에 뉴 프랑스(New France, Nouvelle France, 누벨 프랑스)를 건설하였으며 독일은 수많은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어 해외로 눈 돌릴 수 없었다.
러시아는 동부 유럽의 일부와 시베리아, 알래스카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등은 그들 나라와 가깝고 스페인이 개척을 거의 포기하였던 북미를 탐험하여 17세기부터 개척을 시작하였다.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에는 영국(뉴잉글랜드)이, 캐나다의 몬트리올, 퀘벡은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는 스페인과 프랑스(프랑스령 루이지애나)가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뉴욕과 뉴저지에는 네덜란드(뉴 네덜란드, New Netherland, Nieuw-Nederland, 지금의 코네티컷,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 주 지역)가, 델라웨어에는 스웨덴(뉴 스웨덴, New Sweden, Nya Sverige, 뉘아 스베리예, 현재의 델라웨어주 윌밍턴 지역)이,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 텍사스, 루이지애나 등 남부와 서부에는 스페인이 오늘의 미국 영토에서 식민지(뉴 스페인, New Spain, 누에바 에스파냐, Nueva España, 오늘날의 멕시코, 서인도제도, 플로리다, 미시시피 강 유역 등 스페인 식민지)를 개척했던 것이다.

1. 미국의 개척과 독립 및 영토확장

가. 북아메리카 탐험

오스만 제국(Ottoman, 1299 ~ 1922, 623년간 존속)이 비잔틴 제국을 멸망(1453년)시킴에 따라 비잔틴제국의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넘어가 로마의 문화를 다시 꽃 피우는 르네상스(Renaissance, 서유럽의 문화운동)가 14∼16세기에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이때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슬람을 물리치고 새로 독립하여 무력은 강력했지만 경제적으로 나라가 어려워 특별한 활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슬람과 교역할 수 있는 교역로를 찾고 더 나아가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였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같이 동방의 물자를 중계 무역하여 부(富)를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육로를 가로막고 오스만과 이탈리아가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어 그들보다 힘이 약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기존의 육로와 해로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원양 항해 기술을 익혀 서지중해와 대서양으로 나가는 대항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이탈리아(제노바) 사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 ~ 1506)는 스페인 이사벨 여왕(이사벨 1세, Isabella Ⅰ, Isabel la Católica, 재위 1479 ~ 1504)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을 건너 인도를 발견하러 나섰다가 1492년에 서인도 제도(산살바도르, San Salvador)를 발견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탐험대는 69일간(카나리아 제도 출항 후 36일)의 항해 끝에 10월 12일 핀타호의 선원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Rodrigo de Triana, 1469 ~?)가 처음으로 육지를 찾았다.
처음 상륙한 섬은 원주민들이 ‘과니하니(바하마 군도의 한섬)’라고 부르는 섬으로 콜럼버스는 그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성스러운 구세주)’라 이름 붙였다
두 번째로 발견한 섬이 오늘날의 쿠바였으며, 세 번째로 발견한 섬이 히스파니올라섬(Hispaniola, Hispaniola 이스파니올라 섬, La Española 에스파뇰라 섬,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이들 지역을 인도라 믿었다.
아메리카 대륙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스페인 페란도 2세( Ferrando II , 아라곤 왕 재위 1479 ~ 1516, 카스티야 후아나 1세 섭정) 때인 1513년에 발보아(Balboa, 1475 ~1519, 스페인)가 파나마 지협을 도보로 횡단한 끝에 태평양을 발견한 것이다.
총독으로 임명된 콜럼버스는 가톨릭 포교, 무역 전진 기지 건설, 금광 발굴과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1493년에 제2차(1493 ~ 1495) 서인도 항해를 하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종자를 가지고 갔다. 그중에 카나리아 제도(아랍인에 의해 사탕수수 재배)에서 가져간 사탕수수 종자도 있었다.
1498년 제3차 탐험(1498 ~ 1500)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남아메리카 쪽으로 탐험을 하여 1498년 8월 4일~12일 사이에 트리나드 섬(Trinidad)의 맞은편에 있는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강(Orinoco River)을 탐험함으로써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하였고 최초로 상륙한 유럽인이 되었다.
그리고 콜럼버스의 제1, 2차 항해에 동행했던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Rodrigo de Bastidas, 1465 ~ 1527)가 황실의 허가를 얻어 후안 데 라 코사(Juan de la Cosa, 1450 ~ 1510, 산타마리아 호 선장, 지도 제작자), 발보아 등과 함께 1500년 독자로 원정하여 1501년에 파나마를 발견하였다. 이어서 콜럼버스가 1502년 파나마 지협(地峽)을 탐험(제4차 항해, 1502 ~ 1504)하였으며 1513년 발보아(Vasco Nunez de Balboa, 1475 ~ 1519)가 지협(地峽)을 횡단하여 태평양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때 아메리코 베스푸치(Américo Vespucci, 1451~1512)는 1499년 5월부터 1500년 6월 사이에 알론소 데 오제다(Alonso de Ojeda, 1466 ~ 1515, 스페인 탐험가) 탐험대에 승선하여 가이아나(기아나, Guyana) 해안 탐험과 남쪽으로 내려가 아마존 강의 하구 탐험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콜럼버스는 제4차 항해(1502 ∼ 1504)에서 1502년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였다.
콜럼버스에 의해 신 대륙이 발견됨에 따라 원주민은 유럽인들로 인해 말로 할 수 없는 피해를 당하였고 천연두 등 질병이 전해져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스페인은 금은보화 등을 약탈하여 부를 누렸으며 유럽은 그 뒤를 이어 많은 탐험가, 정복자, 개척자들의 노력으로 신세계를 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옥수수, 감자, 고구마, 땅콩, 고추, 토마토, 호박, 코코아, 아보카도, 담배, 고무나무, 칠면조, 밍크, 알파카 등 남미의 수많은 동식물이 유럽으로 유입되었으며 아메리카에는 소, 돼지, 밀, 목화, 사탕수수, 포도, 커피, 오렌지, 레몬 등 많은 동식물이 전해져 생산됨에 따라 두 대륙에서는 식량 증산과 식품이 풍요해졌다. 이외에 수많은 야생동식물이 연구되고 수입되었다.
이들 두 대륙간의 동식물 전파를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이라고 한다.
이어서 1497년 존 캐벗(John Cabot, Giovanni Caboto, 조반니 카보토, 1450 ~ 1499, 이탈리아 탐험가)이 영국 헨리 7세(Henry VII, 재위 1485 ~ 1509)의 지원을 받아 최초로 북미 대륙의 동해안을 탐사하였고, 그래서 1600년대에 영국은 북미 동해안 지방 전체를 영국령이라 주장했다.
스페인 페란도 2세( Ferrando II , 아라곤 왕 재위 1479 ~ 1516, 카스티야 후아나 1세 섭정) 때인 1513년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Juan Ponce de León, 1474 ~ 1521)이 플로리다 지역에 백인으로서는 처음 도착하여 탐사를 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Carlos I, 스페인 왕 재위 1516 ~ 1556) 때인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ś, 1485 ~ 1547)는 멕시코를 정복하여 식민지로 개척했다. 그 후 텍사스(콜로라도 등 인근의 모든 주), 캘리포니아 등도 스페인 영역이 되었다.
1524년 이탈리아의 탐험가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Giovanni da Verrazzano, 1485 ~ 1528)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Francis I, 재위 1515 ~ 1547)의 지원을 받아 뉴욕 지방을 탐험한 첫 유럽인이 되었다. 베라자노는 캐롤라이나에서 뉴 펀들 랜드까지 탐험했으며 뉴욕만 안으로 진입하면서 허드슨 강에 도달하였다.
프랑스의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 ~ 1610) 때인 1609년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 ~ 1635, 프랑스)이 퀘벡에서 뉴욕의 북쪽으로 탐험하여 들어왔다.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65 ~ 1611, 영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북극항로를 찾기 위해 영국 탐험대로 제임스 1세(James I, 1603 ~ 1625) 때 3차례(1607, 1608, 1610 ~ 1611), 네덜란드 2대 총독 오라네 공작 마우리츠(Maurits van Oranje, Maurits van Nassau 마우리츠 판 나사우, 모리스, 1567 ~ 1625, 총독 재위 1585 ~ 1625) 때인 1609년 1차례 네덜란드 탐험대로 참가하였다.
1609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65 ~ 1611, 영국)이 현재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허드슨 강으로 올라갔다. 그는 동방으로 향하는 서북 항로를 찾고 있었다. 허드슨의 항해는 현재의 뉴욕(뉴암스테르담, New Amsterdam, Nieuw Amsterdam, 니우 암스테르담), 맨해튼, 뉴저지, 델라웨어와 코네티컷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을 네덜란드의 영토로 만들어 주었다. 이 지역은 후에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 니우 네덜란드, Nieuw Netherland)로 명명되었다.

나. 각 국의 미국 내 식민지 개척

1) 스페인의 폴로리다와 캘리포니아 개척

가) 스페인과 프랑스의 폴로리다 개척

스페인의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Juan Ponce de León, 1474 ~ 1521, 푸에토리코 총독, 스페인)은 1513년 플로리다를 탐험하여 그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1528년 스페인의 판 필로 데 나르바에스(Panfilo de Narvaez, 147? ~ 1528, 1520년 반란자 코르테스를 정벌하러 갔다가 포로가 되기도 했음)는 플로리다에 몇 백 명으로 원정대를 조직하여 들어갔으나 병, 굶주림, 인디언들에 의해 죽고 또 바다에서 만난 폭풍으로 거의 모두 죽고 부하 4명만 돌아왔다.
스페인의 에르난도 데소토(Hernando De Soto, 1496? ~ 1542, 쿠바 총독,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잉카 원정 때 기병 대장)는 1539년 금을 찾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플로리다에 상륙하여 지금의 미국 동남부에 해당하는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앨라배마, 미시시피, 플로리다 등을 탐험하였다.
1564년 프랑스의 르네 구레네 드 로도니에르(Rene Goulaine de Laudonniere, 1529 ~ 1574)가 폴로리다의 잭슨빌(Jacksonville)에 위그노(Huguenot,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칼뱅파 교도)들을 위한 안식처로 캐롤라인 요새(Fort Caroline)를 건설했다.
1565년에 스페인인 페드로 메네데즈 데 아빌레스(Pedro Menendez de Aviles, 1519 ~ 1574, 스페인 인도 함대 사령관)는 폴로리다의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프랑스의 캐롤라인 요새를 파괴하였으며 잭슨빌에 산 오거스틴(San Agustin, 세인트 오거스틴)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산 오거스틴(San Agustin, 세인트 오거스틴)은 다음 해에 허리케인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다.
그리고 1586년 영국의 해적 왕인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 ~ 1596, 영국 해군 제독, 세계일주 항해자)가 습격을 가해 세인트 오거스틴을 불태웠다
폴로리다의 잭슨빌(Jacksonville)이 미국에서 유럽인들이 거주한 가장 오래된 곳이다.
그 후 스페인(프랑스 편)은 7년 전쟁(1756 ~ 1763) 중에 쿠바 아바나, 필리핀 마닐라 등을 영국에 점령당했으며 영국에 7년 전쟁에 패하고 끝난 다음 스페인은 쿠바 아바나와 필리핀 마닐라 등 점령지를 돌려받는 대가로 플로리다 전체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스페인은 미국 독립전쟁 중인 1781년 영국에 승리하여 서부 플로리다를 되찾았으며 1783년 전 플로리다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나) 스페인의 걸프 해안과 캘리포니아 탐험

1519년 자메이카의 스페인 총독은 플로리다에서부터 멕시코까지 걸프 해안을 탐험하는 데 알론소 알바레스 데 피네다(Alonso Alvarez de Pineda, 1494 ~ 1520)를 보냈다. 피네다의 부하들이 텍사스에 처음 도착하였다. 피네다는 원주민과의 전투 중에 죽었다.
1536년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1485 ~ 1547)는 멕시코 북서부를 탐사하여 바흐 캘리포니아 반도(Baja California Peninsula)를 발견했다.
1540년 코로나도(Francisco Vasquez de Coronado,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1510 ~ 1554)는 멕시코 북부로부터 출발하여 애리조나 주의 도스카베사스와 치리카우아 산을 넘어 1541년 뉴멕시코, 텍사스를 지나 서쪽으로 그랜드 케년과 콜로라도 강을 발견하고 동쪽으로 탐험을 계속해서 리오그란데 강, 오클라호마, 캔자스 지역까지 탐색했다.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 1496 ~ 1542, 에스파냐)가 이끈 탐험대는 1539년부터 조지아, 캐롤라이나, 테네시, 앨라배마, 미시시피 등을 탐험하였다.
1539년 플로리다 반도 서쪽 탬파 베이(Tampa Bay)에 상륙하여 미시시피 강을 따라 이동하여 조지아까지 탐사하였으며 소토가 사망한 후에도 텍사스를 탐사하였다.
스페인은 후안 로드리게스 카브릴로(Juan Rodriguez Cabri'llo,? ~ 1543, 포르투갈의 탐험가)를 고용하여 현재 캘리포니아 해안을 처음 탐험하였다. 1542년 카브릴로(Juan Rodriguez Cabri'llo, ? ~ 1543, 포르투갈 출생)는 태평양 해안을 따라 뉴 스페인(New Spain, 누에바 에스파냐, Nueva España, 오늘날의 멕시코 등 스페인 식민지)에서 캘리포니아 해안, 오리건까지 항해한 것으로 생각한다.
카브릴로는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얻을 것이 거의 없고, 무역과 탐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탐사를 중지하였다. 그래서 캘리포니아는 234년 동안이나 탐사되지 않았고 정착 활동도 하지 않았지만 스페인의 개척지였던 것이다.
1598년 스페인 왕 필립 2세의 명에 의해서 오냐테(Don Juan de Oñate Salazar, 돈 후안 데 오냐테 살라자, 1550 ~ 1626)의 원정팀은 콜로라도 동부,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북부지역과 콜로라도강 하류지역을 탐험했다.
1685년 프랑스의 르네-로베르 카블리에 드 라 살(Rene-Robert Cavelier de La Salle, 1643 ~ 1687, 프랑스 탐험가)이 텍사스 탐험을 하였다.
이에 1689년 스페인의 알론소 데 레온(Alonso de León, 1639 ~ 1691) 원정대는 폐허 된 프랑스의 세인트루이스 요새를 발견하였다. 1690년 데 레온의 원정대와 함께 한 프란시스코 수도사는 텍사스의 동부에서 첫 선교사 양성소 산 프란시스코 데 로스 테자스(San Francisco De Los Tejas)를 설립하였다.
스페인은 이들의 원정과 스페인 수도사들이 지은 선교사 양성소들에 기초하여 텍사스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렇게 스페인은 북미를 탐험했지만 금, 은 등이 발견되지 않았고 거리가 멀었으며 기후 등 환경도 좋지 않았으므로 북위 42도까지만 주로 개척하였던 것이다.

2)  스페인과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개척

루이지애나는 스페인 탐험가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Pánfilo de Narváez, 1478~ 1528)가 1528년에 루이지애나 지역을 항해하여 지났으며 스페인의 에르난도 데소토(Hernando De Soto, 1496 ~ 1542, 쿠바 총독,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잉카 원정 때 기병 대장)는 1539년 금을 찾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플로리다에 상륙하여 1541년 미시시피강 하류를 탐험했으며 지금의 미국 동남부에 해당하는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앨라배마, 미시시피, 플로리다 등을 탐험하였다.
스페인은 루이지애나(Louisiana) 지역을 스페인의 에르난도 데소토가 먼저 탐험하였으므로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 de Tordesillas, 1494)을 근거로 하여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나 정착한 스페인 사람이 별로 없었으므로 명목상으만 스페인 영역이었다.
1534년 프랑스의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 149 ~ 1557)가 가스페(Gaspé) 만과 세인트로렌스강을 탐사하여 프랑스의 식민지인 누벨 프랑스(Nouvelle France, 1534 ~ 1763, 초대 부왕 자크 카르티에)를 개척하였다.
1562년에 프랑스는 군 소부대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패리스 섬에 주둔시켜 샤를 포트(Charlesfort, 찰스 포트)을 만들었지만 샤를 9세(Charles IX, 재위 1560 ~ 1574) 때 일어난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 1562 ~ 1598, 프랑스 종교전쟁)으로 보급이 되지 않아 일년 후에 포기하였다.
캐나다 식민지 개척자로 뉴프랑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 ~ 1635, 지리학자, 탐험가, 지도 제작자)은 1604년에 프랑스 앙리 4세의 명을 받아 캐나다의 세인트로렌스강과 포트로열항(Port Royal habour)을 탐험하였으며 1608년 퀘벡을 탐험하여 건설하고 초대 총독이 되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국왕이 직접 지배하였으며 모피 무역과 가톨릭의 포교를 주로 하였다.
르네 로베르 카벨리에 드 라 살(Rene-Robert Cavelier de La Salle, 1643 ~ 1687, 탐험가)이 1669년 오하이오 강을 발견하고 오대호(五大湖) 부근을 탐험했으며, 미시간 호숫가를 따라 내려오던 중 1682년 일리노이 강에서 출발하여 미시시피 강을 거쳐 멕시코만에 도달하였다.
1682년 4월 9일 라 살은 미시시피 강 유역의 모든 땅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식민지라는 의미로 루이지앵(Louisiane)이라고 이름붙였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피에르 르 무안 드 이베르빌(Pierre Le Moyne d'Iberville, Ardillières, 1661 ~ 1706, 항해사 , 상인 , 군인 , 사략선 및 탐험가)은 1686년에 그는 허드슨 만(Hudson Bay)에 들어온 영국 초소를 정벌하였고 1696년에는 세인트 존스를 점령 하고 뉴펀들랜드에 있는 36개 이상의 어업 시설을 약탈하였으며 1699년 미시시피 강 하구를 탐험하고 루이지애나 지역을 프랑스령으로 재주장하였다.
이 지역에서 이익이 별로 창출되지 않았고 정착민도 별로 없었다.
이렇게 프랑스는 명목상 스페인 영역이던 루이지애나를 모두 차지하였다.
1712년경의 누벨 프랑스는 동쪽으로는 뉴펀들랜드, 서쪽으로는 로키 산맥, 남쪽으로는 멕시코 만, 북쪽으로는 허드슨만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 ~ 1714) 중 앤 여왕 전쟁(Queen Anne's War, 1702~1713) 결과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Vrede van Utrecht, 1713)으로 프랑스는 허드슨 만과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를 영국에 넘겨 주었다.
프랑스는 캐나다의 퀘벡(Quebec)과 미국의 뉴올리언스(New Orleans)를 비릇한 루이지애나를 겨우 6만여명의 이주민이 정착착하고 있었으며 영국이 개척한 미국 동부의 13개 식민지는 이주민이 200만명이 넘어 영토가 부족하여 서쪽으로 진출함에 따라 프랑스와 영국이 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1754년부터 1763년까지 프랑스(루이 16세, Louis XVI, 1754. ~ 1793)와 영국(조지 2세 1727 ~ 1760, 조지 3세 1760 ~ 1820)이 양국의 정규군뿐만 아니라 이주민, 인디언까지 참가하여 북아메리카를 무대로 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 7년 전쟁 1756 ~ 1763의 일부분, 푸로이센 영국 대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인디언 부족이 영국과 프랑스 양쪽에 가담했으나 프랑스 쪽에 더 많이 가담함, 영국이 프랑스보다 땅에 대한 욕심이 심했기 때문임)에서 영국이 캐나다 퀘벡까지 점령하자 프랑스는 항복하였으며 파리 조약(Treaty of Paris, 1763)을 맺어 영국에게 퀘벡, 아카디아, 미시시피 강 동쪽의 루이지애나를, 루이지애나를 먼저 탐험하여 영유권이 있다고 주장해 온 스페인(프랑스 동맹국)에게는 1762년 은밀히 퐁테인블로 조약(Treaty of Fontainebleau)을 맺고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넘겨주었다.
그 뒤 프랑스는 1800년 나폴레옹이 스페인과 산 일데폰소 조약(Tratado de San Ildefonso, 1800)을 맺어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돌려받았으나 1803년에 미국에 매도하였다.

3) 영국의 미국 식민지 개척

영국은 아메리카를 발견한 스페인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북미를 탐험하여 개척하고자 했다.
영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먼저 정착한 인도와 남미, 그리고 북미의 멕시코의 텍사스, 플로리다와 루이지애나 등에는 스페인이 여전히 강국이었으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스페인 세력이 미치지 못한 북미의 동쪽을 먼저 탐험하여 식민지 건설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은 자국민을 이주시켜 정착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현지 주민과 아프리카 노예를 이용하여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금광이 많은 중남미나 사탕수수 등 열대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열대지방을 원했으므로 플로리다 등 따뜻한 미국 남쪽 지방까지만 진출했던 것이다.
헨리 7세(Henry VII, 1457 ~ 1509, 재위 1485 ~ 1509)는 1497년 존 캐벗(John Cabot, Giovanni Caboto, 조반니 카보토, 1450 ~ 1499, 이탈리아 출신)을 지원하여 뉴펀들랜드(Newfoundland) 등 북미 북동부 연안을 탐험시켰다. 그래서 1600년대에 영국은 북미 동해안 지방 전체를 영국령이라 주장했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재위 1558 ~ 1603) 때인 1583년 험프리 길버트(Humphrey Gilbert, 1539 ~ 1583)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뉴펀들랜드에 상륙하여 이를 영국령으로 선포했다.

가) 월터 롤리 경의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 개척

1570년에 스페인 예수회 단체가 버지니아에 처음 정착하여 요여크 강에 선교지를 세웠으나 몇달 후에 인디언들에 의해 전멸되었다.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는 유럽 최초의 식민지 개척지이다.
1584년 엘리자베스 1세는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552 ~ 1618, 정치인, 탐험가, 작가, 여왕의 총신)에게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다.
1584년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552 ~ 1618, Humphrey Gilbert의 아버지 다른  異父 동생)은 탐험대를 보내어 사비를 주어 식민지를 개척하게 했다.
탐험대는 플로리다 북부를 탐험하였으며 1585년 랠프 레인(Ralph Lane, 1532 ~ 1603, 탐험가) 주지사가 이 지역에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를 건설하였으나 보급품 부족과 인디언 부족과의 좋지 않은 관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귀국하였으며 1587년 존 화이트(John White, 1539 ~ 1593, 식민지 총독, 탐험가, 아티스트, 지도 제작자)가 다시 로어노크 섬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후 곧 보급품을 싣고 다시 갈 예정이었으나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쟁으로 늦어져 1590년에 보급품을 싣고 갔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식민지 개척은 실패했다.
월터 롤리는 이 지역을 영국의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린 엘리자베스 1세 여왕(Elizabeth I, 재위 1558 ~ 1603)의 명예를 기려  ‘버지니아(Virginia)’로 명명하였다.
식민지 개척은 실패했으나 민간인이 출자하여 식민지를 개척하는 선례를 남겨 17세기에 개인이 자본을 출자하여 회사를 만들어 식민지를 개척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는 국제관계와 당파 간의 세력 균형에 결혼이 문제가 되었으므로 애인으로 레스터 백작인 로버트 더들리 경 Lord Robert Dudley(1532? ~ 1588) 등이 있었지만 결혼을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싫어하여 권력을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단속하였고, 애인 중에서 권력욕이 지나친 사람은 런던탑에 유폐하거나 단두대로 보냈다.
영국은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20년이 지난 다음 미국 식민지 개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영국 정부가 식민지 개척에 지원을 하였으나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들어 영국 정부가 주도하여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귀족, 지주나 상인들이 자본을 출자하여 런던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of London, London Company)나 플리머스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of Plymouth, Plymouth Company) 같은 유한회사(Joint stock company, 주주들이 투자)가 생겨났으며 이들 회사들이 신세계에서 발견되는 광산의 권리와 회사 이익의 1/5을 국왕 제임스 1세에게 받치기로 계약을 하고 국왕의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받아 신세계로 갈 사람을 모집하고 돈을 빌려주게 되었던 것이다.

나) 영국의 버지니아 제임스타운(Jamestown) 개척

영국은 제임스 1세(James Ⅰ, 재위 1603 ~ 1625) 때인 1606년 주주들이 출자하여 설립한 런던 회사(London Company, Virginia Company of London, 합자회사  joint stock company, 후에 버지니아 회사 Virginia Company로 변경)는 1606년 제임스 1세(James I, 재위 1603 ~ 1625)로부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남부 뉴욕 주 일부에 대한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받았다. 런던회사는 새로운 땅을 개척하여 옥수와 포도주, 원목 등을 본국에 수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잘 살아보겠다는 경제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척자금을 빌려주어 모집한 남자 144명을 크리스토퍼 뉴포트 선장(Christopher Newport)이 지휘하는 수전 콘스턴트 호(Susan Constant), 갓스피드 호(Godspeed), 디스커버리 호(Discovery) 등 3척에 싣고 1606년 12월에 버지니아 주(엘리자베스 1세에서 유래)로 출발하였다.
5개월의 긴 항해 끝에 파종시기가 지난 1607년 4월에 버지니아주 포우하탄족(Powhatan, 알곤킨족 Algonquian의 한 부족) 연맹 지역인 체사피크 만(Chesapeake Bay)에 도착하여 스페인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만에서 제임스 강 상류 60킬로미터 지점의 습지에 미국 식민지로 처음인 제임스타운(Jamestown)을 건설하였다. 명칭은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에드워드 마리아 윙필드(Edward Maria Wingfield, 1550 ~ 1631, 런던회사 창립멤버) 대위가 통치 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이끌었으나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통치 위원회의 의장 1608 ~ 1609)와 충돌로 1608년 4월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주자들은 농사보다 황금에 관심이 더 많았던 도회지 사람이었으므로 황무지를 개척하여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초기에 제임스타운은 인디언의 공격을 받았고 습지라 환경이 좋지 않아 말라리아에 시달렸으며 농사를 짓지 않고 식량을 본국의 보급과 인디언으로부터 조달했으므로 식량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수많은 정착민이 죽었다.
그나마 식민지의 평의회 의장(통칭 주지사, 1608~ 1609)인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영국 군인, 탐험가, 식민지 의장, 뉴잉글랜드 제독) 선장의 통솔로 유지되고 있었다.
1609년에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존 스미스가 영국으로 돌아가자 식민지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1609년과 1610년 사이에 원주민은 식량공급을 끊었고 이주민들 대부분이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1610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3백 명(중간에 이민자가 유입됨) 가운데 60명뿐이었다. 이들은 1610년 버지니아 주지사인 드 라 워 남작 토마스 웨스트(Thomas West, 3rd Baron De La Warr, 제3대 델라웨어 남작 토마스 웨스트, 델라웨어 경, 1577 ~ 1618)가 영국에서 식량을 운반하여 공급함으로써 겨우 살아남았다.
드 라 워 남작 토마스 웨스트 (델라웨어 경, 1609 ~ 1618, 대부분 기간 영국에 거주, 직무는 위임)는 존 스미스 대위의 직속 부하로 버지니아 식민지 지배 위원회를 대신하여 종신 주지사 겸 대장으로 1609년에 임명되었다.
그 후 1609년 포와하탄 부족이 식민지를 공격하여 제임스타운 식민지 통치 위원회의 의장인 존 래트클리프(John Ratcliffe, 1549 ~ 1609)를 살해하였다. 이에 영국에 있던 델라웨어 경은 1610년에 150명의 부대를 모집하고 장비를 갖추어 3척의 배에 실어 지원하였던 것이다.
그 후 담배 농부인 존 롤프(John Rolfe, 1585년경 ~ 1622년)가 1612년 인디언이 재배하던 담배가 너무 독하여 서인도제도에서 가져온 담배 종자와 교배하여 순한 맛의 종자로 개랑하였으며 1614년 인디언 추장의 딸인 포카혼타스(Pocahontas, 1596년경 ~ 1617년)와 결혼하여 인디언들의 담배 재배법을 배웠다.
이주민들은 담배를 대량으로 경작하여 런던 버지니아 회사를 통해 영국에 수출하여 많은 수익을 얻었다.
1607년 이래 이주민들과 포와하탄족들은 같이 잘 지내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였다.
포카혼타스(Pocahontas, 1596년경 ~ 1617년)는 이주민과 어울려 지내는 동안 존 스미스에 관심을 가졌다. 1607년 존 스미스는 탐험 중에 인디언에 붙잡혀 죽을 고비를 포카혼타스의 구원으로 살아났으며 포카혼타스는 그 후 식량을 이주민에 가져다주는 등 도와주었다.
1609년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존 스미스는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영국에서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
포카혼타스는 1613년 이주민과 교전 중 식민지 이주민에게 붙잡혀 1년 동안 포로로 생활하는 중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 후 포카혼타스는 이주민 포로와 교환되어 돌아갔으나 남편인 코쿰은 교전 중 정착민에게 살해되고 없었다.
그녀는 정착민과 살기를 원했다.
포카혼타스는 1614년(17~ 18세) 항해 중 난파로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은 담배 농부 존 롤프와 결혼하였으며 1615년 아들 토머스 롤프를 낳았다.
1616년, 롤프 가족은 제임스타운 정착촌에 대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홍보원으로 선정되었는데 특히 포카혼타스를 '문명화된 야만인'의 본보기로 영국 사회에 보내던 것이다. 포카혼타스는 영국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각종 사교 모임에 참석했다.
1617년 이들 가족이 배를 타고 미국으로 출항하던 중 테임즈강 근처에서 포카혼타스는 중병에 걸려 영국에서 21세로 사망하였다.
1619년 제임스타운(Jamestown)에서는 각 지역마다 대표자를 선출하여 식민지 의회(House of Burgesses)를 결성하였는데 이것이 선거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미국 정부이다.
영국에서 90명의 신부(처녀)도 데려오고 네덜란드 무역선으로부터 노예도 샀다.
오렌지 모리스(Maurits van Oranje, 1567 ~  1625) 네덜란드 총독으로부터 사락선(私掠船, privateer ship, 국가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적국의 상선을 노략질하는 배)의 특허장(Lettre de marque, Lettre de course, 나포편지, 특허편지, 위임장)을 받은 영국의 사락선인 화이트 라이온(white lion)호는 멕시코로가는 포르투갈 노예선에서 이십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탈취하여 제임스 타운에 계약노예(Indentured servitude, 특정 기간 동안 급여 없이 일하기로 계약을 맺은 노예)로 팔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아프리카 출신 흑인노예 제도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런던 버지니아 회사는 경작지를 넓히면서 인디언과 충돌이 벌어져 1622년에는 보복으로 제임스 타운 학살(Jamestown Massacre)이 일어나는 등 20년간이나 끊임없는 전쟁을 하여 승리하였으나 1624년에 살아남은 사람이 1,132명으로 파산상태였으며 그 결과 왕립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제임스타운은 1624년 국왕령으로 바뀌고 국왕이 임명한 총독이 파견되었다.
1699년 제임스타운에서 일어난 베이컨의 반란 중에 화재가 발생하여 버지니아 주도가 제임스 타운에서 오늘날의 윌리엄스버그(1698년까지 옛 이름 : 미들 플랜테이션 Middle Plantation)로 이전되었으며, 그 이후 제임스타운은 정착지로서의 기능은 중지되었고, 오늘날에는 유적지만 남아 있다.

다) 메이플라워의 청교도(필그림 파더스, Pilgrim Fathers, 巡禮始祖, 필그림스, Pilgrims, 성지순례자) 플리머스 개척

16세기에 유럽에서 개신교(Protestant, 프로테스탄트)의 출현과 종교 개혁에 이어 종교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Henry VIII, 재위 1509 ~ 1547)가 왕비인 캐서린 아라곤(Catherine of Aragon, 1485 ~ 1536)과의 이혼 문제로 교황과 대립하게되자 로마 교황청과 단절하고 영국 교회를 관리하는 모든 권한이 국왕에게 있다는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 수장법, 1534)을 선포하고 종교개혁을 하였는데 가톨릭 요소가 많이 포함된 개신교의 한파인 성공회(聖公會, 英國 國敎會, 영국 국교회, Church of England, Anglican Church)를 국교로 창립하였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재위 1558 ~ 1603)는 가톨릭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교리만 개신교로 바꾼 중도적 교회로 성공회를 개혁하였고 로마 가톨릭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으며 성공회를 다시 영국의 국교로 확립하였다.
비국교도인 퓨리턴(Puritan, 청교도, 영국의 칼뱅 계통의 신교도)들은 제임스 1세(James Ⅰ, 재위 1603 ~ 1625)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에 개신교도 중 성공회에 불만을 가진 분리파(청교도) 일부는 1608년부터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1606년 제임스 1세(1603 ~ 1625)는 동부 해안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플리머스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of Plymouth, Plymouth Company, Joint stock company, 주주들이 투자)를 인가하였으나 플리머스 버지니아 회사는 1607년에 세웠던 팝햄 식민지(Popham Colony, Sagadahoc Colony 사가다호크 식민지, 1607 ~ 1608, 매인 주)를 1608년에 포기하였고 회사가 수년간 중단된 후 1620년 11월에 재 조직된 뉴잉글랜드평의회(Council for New England )에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넘겨주었다. 플리머스 식민지(the Plymouth Colony, 1620 ~ 1686), 뉴햄프셔 식민지(the Province of New Hampshire, 1629 ~ 1641),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the Massachusetts Bay Colony,1628 ~ 1691), 뉴헤이븐 콜로니(the New Haven Colony,1638 ~ 1664), 메인 식민지(the Province of Maine, 1622 ~ 1691)가 뉴잉글랜드평의회에 소속되었다.
1616년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제임스타운 건설)는 자신이 본 신대륙에 대해 열광적으로 소개하는 소책자를 출간하였으며 이 책자는 급진적인 청교도(Puritan) 분리주의자(Separatists)에게 자극을 주었다.
영국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 1608년부터 네덜란드로 조금씩 이주하여 라이덴(Leiden)에서 10여 년간 살던 분리주의자(Separatists)인 급진적인 청교도(Puritan)들은 생활고, 자제 교육의 어려움, 그리고 윌리엄 브루스터(William Brewster, 1566 ~ 1644, 인쇄업자)가 영국 성공회를 비판하는 인쇄물을 찍어냄에 따라 제임스 1세가 분노하여 체포령을 내리는 등 제임스 1세의 박해가 네덜란드에까지 미칠 위험이 있어 네덜란드를 떠나 매력적인 신대륙으로 이주하고자 하였으나 이주 비용이 없어 방법을 찾던 중 폴리머스 회사의 지원과 버지니아에 정착할 수 있는 허가를 받게 되었다.
플리머스 회사는 퓨리탄을 회사의 주주(株主)로서, 그리고 자유민으로서 보내며 신대륙에서 발생하는 생산물과 재산을 7년 동안만 공동으로 소유하며 그 이후에는 주주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신대륙 이주를 위해 스피드웰 호(speed well, 60톤)와 메이플라워 호(Mayflower, 화물선,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 fluijt선, 180톤)를 빌렸으나 스피드웰 호는 1620년 8월에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35명의 청교도를 영국으로 이송한 후 고장이 나 청교도들은 65명의 이주자들이 타고 있던 메이플라워호에 옮겨 탔다.
1620년 9월에 102명이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Mayflower, 화물선,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 fluijt선)를 타고 버지니아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항로를 이탈하여 항해가 늦어짐에 따라 겨울인 11월이 되어서야 미국에 다다랐으므로 항로를 바뀌어 처음 목적지와는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매사추세츠주 케이프 코드(Cape Cod)의 프로빈스(Province)에 11월 21일 상륙하여 정착하였다.
이들은 Mayflower 선상에서 메이플라워 서약서(Mayflower Compact)를 작성하였는데 자주적인 식민정부를 수립하고,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행정을 운영하며 식민지의 복리와 안녕을 위해 평등한 법을 제정하여 준수할 것을 서약했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앞서 이곳을 1614년  매사추세츠의 해안을 따라 탐험했던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탐험가, 식민지 총독, 뉴잉글랜드 제독, 영국 군인, 제임스타운 건설)가 ‘플리머스(Plymouth)’라고 이름 붙인 곳이었다.
이 지역은 1602년, 영국의 바솔로뮤 고스놀드(Bartholomew Gosnold, 1571 ~  1607, 변호사, 탐험가, 사략선 선장, 버지니아 회사 설립에 기여)가 탐험대를 이끌고 매사추세츠 주(Massachusetts)의 엘리자베스 제도(Elizabeth Islands)에 있는 커티헝크 섬(Cuttyhunk Island)에 도착한 뒤 매사추세츠 프로빈스타운(Provincetown, 메이플라워호가 처음 닻을 내린 곳, 플리머스는 만 건너 쪽) 항구에 이르러 이 지역을 코드곶(Cape Cod, 케이프코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어촌 전초기지를 세워 정착하고자했으나 원주민과의 마찰로 철수했다.
프랑스의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 ~ 1635, 지리학자, 탐험가, 지도 제작자, 누벨 프랑스 초대 총독)도 1605 ~ 1606년에 뉴잉글랜드 해안선 지도를 그렸다.
1620년 플리머스에 최초로 정착한 이들은 처음에는 스스로를 ‘올드 커머스(Old comers)’라 불렀고 후에는 ‘포어파더스(forefathers)’로 불렀으며, 최초의 정착민인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90 ~ 1657, 총독, 플리머스 식민지 건설자)가 자신들을 '이 세상의 여행자(We’re Pilgrims In The Earth. 성서 용어)'라고 불렀기 때문에 2세기 s, 巡禮始祖)라고 불려졌다.
이들 청교도는 현지 사정을 모르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겨울을 지나는 동안 추위와 굶주림, 괴혈병(비타민C 결핍)으로 절반이 죽고 53명만 살아남았다.
이듬해 봄 그곳 인디언인 왐파노아그 족(Wampanoag people) 중에서 영어가 유창한 스관토(별명 Squanto, 본명 Tisquantum, tɪsˈkwɒntəm, 티스콴텀, 1585 ~ 1622)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 농사법 등 그 지역의 생활 방식을 배워 정착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단풍나무 시럽(Maple syrup)을 생산하는 방법을 배워 당과 비타민 등의 공급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단풍나무 시럽(Maple syrup)은 우리나라의 고로쇠나무(Painted maple, 단풍나무속) 수액을 채취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채취하여 끓여 물을 증발시키고 졸여서 만든 설탕(66%)이 주성분인 감미료이다(수액 40리터를 이용하여 시럽 1리터 생산).
그래서 스관토는 정착촌의 중요 구성원이 되었으며 통역으로 인디언과의 평화를 가져오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그런데 스관토는 인디언들이 총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인디언과 정착민을 속이다 발각되어 마사소이트(Massasoit, 1581 ~ 1661, 파카노켓의 인디언 추장, 왐파노아그 연맹체의 추장)에 의해 죽을 것을 그 이외는 통역자가 없어 면했으나 곧 병에 걸려 죽었다.
스관토(Squanto)는 1605년 조지 위머스(George Weymouth, 1585  ~  1612, 영국의 탐험가, 식민지 개척자)에 의해 납치되어 영국으로 끌려간 5명의 인디언 중 1명으로서 영국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9년을 살다가 1614년 토머스 헌트(Thomas Hunt, 탐험가, 무역상인)에 의해 스페인에 노에로 팔렸으며 거기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런던 콘힐에서 존 슬레이니(John Slaney, 1632년 사망), 영국 상인, 선박 건조업자)와 같이 생활하면서 영어를 배웠다.
다시 미국의 뉴펀들랜드로 가서 뉴펀들랜드 식민지의 총독인 존 메이슨(John Mason, 1600 ~ 1672, 정착민, 군인, 사령관, 코네티컷 식민지 부총독)대위와 함께 일을 하였으며 또 토마스 더머(Thomas Dermer, 1590 ~ 1620, 항해자, 탐험가, 미국의 동부 해안 탐험, 존 스미스 선장, 뉴펀들랜드 회사, 제임스타운, 플리머스 회사, 상인 모험가들과 교류) 등과 함께 농원 사업을 하다가 뉴잉글랜드의 고향에 가서 사업을 하면 재산을 모을 수 있다고 토마스 더머(Thomas Dermer)를 설득하여 1619년 토마스 더머(Thomas Dermer)와 함께 고향 파투켓에 왔으나 그의 종족은 천연두에 걸려 모두 죽고 없었다.
그런데 인디언들은 영국인들이 전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 악의를 품고 공격하였으므로 토마스 더머(Thomas Dermer)는 버지니아로 물러났다.
그 지역에는 천연두가 만연하여 인다언이 별로 없었으며 인디언 부족끼리 싸움이 벌어져 그 지역 인디언인 스관토는 백인들과 연합하여 다른 부족을 방어하고자 했으므로 이주민이 정착하여 같이 살 수 있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정착에 성공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퓨리턴(Puritan, 청교도, 영국의 칼뱅 계통의 신교도)들이 1620년의 메이플라워 호를 시작으로 신천지를 찾는 신교도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인디언과 가톨릭을 적대하면서 세력을 늘려 나갔다. 인디언들은 이들을 민족학살 시작의 원흉이라고 말한다.

라) 캐롤라이나 식민지(Province of Carolina) 개척

1629년 법무장관 로버트 히스(Robert Heath, 1575 ~ 1649)는 찰스 1세로부터 케이프피어 지역에 대한 면허장을 받았다. 히스는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개척하기를 원했으나 찰스 1세는 영국 성공회 신도들로 제한했다.
노스캐롤라이나 개척민들은 대부분 가난한 담배 농가였으나 사우스캐롤라이나 개척민들은 대규모 농장을 가지고 수익성 작물을 재배하였다. 이들은 목재, 쌀, 인디고 등을 생산해 경제를 일으켰다.

마) 메릴랜드 식민지(Province of Maryland) 개척

유럽에서 종교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인 가톨릭교도들에게 피난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1632년 초대 볼티모어 남작 조지 캘버트(Lord Baltimore George Calvert, 1579 ~1632)가 영주 식민지로 개척을 시작하였다.

바) 로드아일랜드 식민지(Colony of Rhode Island and Providence Plantations) 개척

로드아일랜드 식민지(Colony of Rhode Island and Providence Plantations)는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 ~ 1683)가 설립했다.
1636년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건설되었다.
1637년, 침례교 지도자 앤 허치슨이 아퀴드넥 섬을 내러갠셋 족의 추장 카노니 카스로부터 구입하여 현재 포츠머스로 알려진 포카셋에 정착했다.

사)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개척

1681년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 ~ 1718, 영국의 신대륙 개척자)이 그의 아버지인 윌리엄 펜 경(Sir William Penn, 1621 ~ 1670, 제독, 정치가)이 왕에게 빌려준 돈의 대가로 뉴저지 서부와 남부의 큰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 1685)에게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 ~ 1718, 영국의 신대륙 개척자)은 그 지역을 펜실베이니아라고 명명하고 이듬해 현지로 가서 총독과 양원제 의회(兩院制議會)에 의한 정치를 실시하고 퀘이커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로운 신앙의 식민지로 건설하였다.

아) 영국의 식민지 확장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 1685)때인 1664년 해군 최고 사령관(lord high admiral, commander of the Royal Navy 왕립해군 사령관)인 요크 공작(Duke of York, 1633 ~ 1701, 영국왕 제임스 2세, James II of England, 재위 1685 ~ 1688)의 명령을 받은 요크공작의 신랑(Groom of the Chamber 궁정 신랑)인 리처드 니콜스(Richard Nicolls, 1624 ~ 1672, 영국의 왕당파 대령출신, 뉴욕총독)는 4척의 전함과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 Nieuw Nederland 니우 네덜란드, 수도는 뉴 암스테르담, 니우 암스테르담, Nieuw Amsterdam, 북아메리카 허드슨강 유역, 뉴욕)를 원정하였는데 현지의 뉴 네덜란드의 총독 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 1612 ~ 1672, 뉴 네덜란드 총독 재임 1647 ~ 1664)가 신임을 잃어 그의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함에 따라 쉽게 정복되었으며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 1685)는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Duke of York, 제임스 2세, James II of England, 재위 1685 ~ 1688)에게 뉴 네덜란드 일부를 하사하였다.
제임스 2세가 된 요크공작을 기념하여 니우 암스테르담(Nieuw Amsterdam)을 뉴욕(New York)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 ~ 1667)에 승리한 네덜란드는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 1667)을 맺어 설탕 생산으로 수익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영국 소유의 수리남(Suriname, 남미 북쪽), 향료 산지인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의 룬(Run) 섬, 기아나를 받고 미국의 뉴 암스테르담(뉴욕)을 영국에 넘겨주었다.
1667년에 영국은 뉴욕을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었으나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중인 1673년에 다시 빼앗겼던 것을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72 ~ 1674)이 끝난 후 웨스트민스터 조약(1674)을 맺고 배상하여 뉴욕(뉴욕주와 뉴욕시)을 되찾았다.
영국이 네덜란드령 뉴욕을 침입하였을 때 뉴욕에 Jan(얀)과 Kees(키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많이 있어 그들을 양키(Yankee)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현재는 미국 뉴잉글랜드(New England) 지역의 사람을 양키(Yankee)라 한다.
유럽에서 일어난 13년에 걸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스페인 왕위를 프랑스가 계승하는 것을 반대하는 연합국가와의 전쟁, 1701 ~ 1714) 중에 북미에서는 영국이 캐나다의 프랑스령 식민지를 공격하여 영국( 앤 여왕, 재위 1702 ∼ 1714)과 프랑스 (루이 14세, 재위 1638 ~ 1715) 사이에 앤 여왕 전쟁(Queen Anne's War, 1702 ~ 1713)이 일어났다.
전투는 뉴잉글랜드 주변과 무역 패권(貿易覇權)을 위한 서인도 제도의 해상에서 일어났다.
그 결과 1715년 맺어진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으로 영국은 허드슨만 해안 일대와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섬을 프랑스로부터 넘겨받았다.
이렇게 미국의 동해안을 장악한 영국인들은 인디언을 몰아내고 영토를 서부로 확대하여 13개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영국(조지 2세 1727 ~ 1760, 조지 3세 1760~1820)은 1763년 프랑스와 북아메리카를 무대로 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 오스트리아가 푸로이센으로부터 슐레지엔 회복을 위해 일으킨 1756 ~ 1763년 7년 전쟁의 일부분, 푸로이센 영국 대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에서 프랑스(루이 16세, Louis XVI, 1754. ~ 1793)에 승리하여 미시시피 강 동쪽 루이지애나를 넘겨받았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 1754 ~ 1763)은 영국과 프랑스의 팽창정책이 부딪혀 일어났으며 5 대호 남쪽의 오하이오 계곡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를 시작으로 오하이오강 지역 등 미국 동북부 지역과 캐나다의 퀘벡 등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넘겨받은 오대호 지역과 일리노이 동부, 오하이오 등에 거주하는 인디언 부족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들 부족은 자신들의 땅에 들어와 있는 영국 정착민들을 싫어했다. 결국은 ‘폰티액 전쟁(Pontiac's Rebellion, 1763 ~ 1764)'으로 발전되어 인디언들은 여러 요새를 불태우고 정착민을 살해하였으며 영국군은 패하여 북서부 영토에서 쫓겨났다.
영국은 다시 요새를 강화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했으며, ‘부시런 전투(Battle of Bushy Run, 1763)’에서 인디언을 물리쳤다.
영국은 쇼니족(Shawnee) 등 인디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1763년 선언'으로 프랑스로부터 넘겨받은 북서부 영토에 미국 백인 개척민의 이주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리고 1774년 영국 의회는 '퀘벡법(Quebec Act)'을 통과시켜, 북서부 영토를 퀘벡 식민지에 편입시켰다.
이에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 1754 ~ 1763)에 참전하여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길 원했던 일부 미국 개척민들은 불만을 가졌다.

4) 네덜란드의 허드슨강 유역(뉴 네덜란드, 뉴암스테르담, 뉴욕, 니우 암스테르담, Nieuw Amsterdam) 개척

1524년 이탈리아의 탐험가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Giovanni da Verrazzano, 1485 ~ 1528)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원을 받아 뉴욕 지방을 탐험한 첫 유럽인이 되었다. 베라자노는 캐롤라이나에서 뉴 펀들 랜드까지 탐험했으며 뉴욕만 안으로 진입하면서 허드슨 강에 도달하였다.
1609년 프랑스의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 ~ 1635)이 퀘벡에서 뉴욕의 북쪽으로 탐험하여 들어왔다.
1609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65 ~ 1611, 영국)이 현재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허드슨 강으로 올라갔다.
네덜란드인들은 1609년 허드슨의 탐사 후 1610년부터 허드슨 강 골짜기에 일부 교역자와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뉴욕에 위치한 허드슨 강 유역과 뉴저지의 델라웨어 강 하류 지역이다. 거기서 그들은 인디언들과 함께 모피 교역을 시작했다.
1621년 네덜란드인 상인들의 단체가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네덜란드 정부는 서인도 회사에 뉴 네덜란드에서 교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1624년 서인도 회사는 이 지역에 정착할 30여 가족을 보냈다. 이 가족들의 일부는 이 지역에서 첫 정착지인 오린지 요새(Fort Orange, 현재 Albany 올버니)를 건설하였으며 나머지는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 니우 네덜란드, Nieuw Netherland, 지금의 코네티컷,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 주 지역)의 다른 지역에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1625년 네덜란드 식민지 주민들의 단체는 맨해튼 섬에 요새를 짓고 도시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착지를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 Nieuw Amsterdam, 니우 암스테르담, Hudson River 하구, New Netherland 수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626년 네덜란드 식민지를 총괄하던 총독 페터 미뉴이트(Peter Minuit, 1580 ~ 1638)는 회사의 대리인 자격으로 인디언들에게 약 24달러의 값싼 장신구를 주고 맨해튼(Manhattan, 언덕이 많은 섬)을 사들였다.
그 후 식민지 주민들은 뉴 네덜란드에 빌트비크(현재의 킹스턴), 렌셀라에르스비크(현재의 렌슬레어), 브루켈렌(현재의 브루클린), 셰넥터디 등의 정착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중인 1664년 영국의 왕당파였으며 대령출신인 리처드 니콜스(Richard Nicolls, 1624 ~ 1672, 뉴욕총독)는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 1685)의 명령에 따라 4척의 전함과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뉴 네덜란드(북아메리카 허드슨강 유역, 뉴욕)를 원정하였는데 현지의 뉴 네덜란드의 총독 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가 신임을 잃어 그의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함에 따라 쉽게 정복되었으며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 1685)는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Duke of York, 제임스 2세, James II of England, 1633 ~ 1701, 재위 1685 ~ 1688)에게 뉴 네덜란드 일부를 하사하였다. 그 후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을 요크 공작(Duke of York)의 이름을 따서 New York(뉴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우세했던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 ~ 1667) 결과로 체결한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 1667)으로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을 영국에 넘겨주고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익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수리남과 향료 산지인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의 룬(Run) 섬과 기아나를 얻었다.
1673년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72 ~ 1674) 중에 영국으로부터 뉴암스테르담을 빼앗았으나 전쟁 후 네덜란드는 웨스트민스터 조약(1674)을 맺고 자신들의 뉴 네덜란드 영토를 모두 영국에 할양했으며,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는 뉴저지주와 뉴욕 주로 분리되었다.
영국이 네덜란드령 뉴욕을 침입하였을 때 뉴욕에 Jan(얀)과 Kees(키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많이 있어 그들을 양키(Yankee)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현재는 미국 뉴잉글랜드(New England) 지역의 사람을 양키(Yankee)라 한다.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780 ~ 1784)에서 네덜란드는 1781년에 네덜란드 해안이 봉쇄되고 서인도 제도와 동인도 제도를 잃었으며 1784년 항복함으로써 세계 강대국 지위를 상실했다.
이어서 영국이 해양강국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5) 스웨덴의 델라웨어(Delaware) 개척

1609년 네덜란드의 헨리 허드슨이 항해 도중 현재의 델라웨어 만에 들어갔다.
1631년에 네덜란드가 28명을 파견하여 루이스 크릭에 헨로핀 만 내륙에 요새를 건설하였다. 이 지역에는 고래 떼가 많아 고래 기름을 채취하였다. 그런데 1632년 식민지인들이 오해로 원주민인 인디언을 학살하였다.
뉴 스웨덴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괄 피터 미뉴잇(Peter Minuit, 1580 ~ 1638, 1626년 24달러로 맨해튼 섬 구입)이 스웨덴 정부를 설득하여 델라웨어주 윌밍턴 지역에 크리스티나 요새(Fort Christina)를 세웠다. 스웨덴의 정착자들이 1638년에 뉴 스웨덴(New Sweden, Nya Sverige, 뉘아 스베리예)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모피 거래에 성공하였다. 뉴 스웨덴(New Sweden, Nya Sverige, 뉘아 스베리예)은 델라웨어 만에서 뉴저지주 트렌턴까지로 350명의 농부들과 모피 상인들이 살았다.
그러나 1655년 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 1612 ~ 1672)가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가 스웨덴 요새를 점령하여 네덜란드가 델라웨어를 지배하게 되었다.
1664년 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결과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델라웨어’라는 이름은 버지니아 식민지 2대 총독이었던 델라웨어 경(卿, Thomas West, 3rd Baron De La Warr, 제3대 드 라 워 남작 토마스 웨스트, 제3대 델라웨어 남작 토마스 웨스트, 1577 ~ 1618)을 기념하여 붙여졌다.

6) 러시아의 알래스카 남부 개척

러시아는 알래스카에서 태평양 해안을 따라 더 멀리 남부로 내려와 식량조달과 모피 수집 및 무역하기를 원하였다.
러시아가 남으로 확장하여 스페인과 국경이 맞닿게 되자 러시아의 모피회사인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AC, 1799년 그리고리 셸라이호프와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모피회사로 창립, 1804년 ~ 1840년 알래스카를 탐험)의 창설자인 니콜라이 레자노프(Nikolai Petrovich Rezanov, 1764 ~ 1807)는 그의 선장인 흐보스토프 중위( Lt. Khvostov)가 스페인이 캘리포니아 북부 지역 전역을 완전하게 점령하지 않았다고 보고함에 따라 그 지역의 주지사인 바라노프(Alexander Andreyevich Baranov, 1747 ~ 1819, RAC가 주지사로 임명 1818년까지)와 알렉산더 1세(Alexandre Ier, 재위 1801 ~ 1825)에게 캘리포니아에 정착지를 세울 것을 건의했다.
1806년 레자노프는 수달 털로 식량을 교환하고 영국, 미국, 스페인과 동맹을 맺기 위해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의 시트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항해했다. 그는 스페인의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동안 수비대 사령관의 딸을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기로 약속하였다.
레자노프는 이 결혼이 러시아와 스페인 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종교가 달라 종교적인 승인을 받아 결혼하기로 하고 레자노프는 귀국했으나 병사하였던 것이다.
1808년 바라노프는 레자노프의 수석 보자관인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쿠스코프(Ivan Aleksandrovich Kuskov, 1765 ~ 1823)에게 스페인령 캘리포니아 북부 지역에 비밀리에 러시아 소유 표시를 하도록 했다.
1812년 쿠스코프가 바라노프의 명에 따라 스페인령인 북부 캘리포니아 해안에 러시아인들의 진출을 후원하고 모피 무역을 위한 군대 주둔을 위해 로스 요새(Fort Ros, 모피 고갈 등으로 소용이 없어지자 1841년에 멕시코인에 팔고 철수)를 건설하였다.
1808년에는 바라노프(Alexander Andreyevich Baranov, 1747 ~ 1819, 1818년까지 주지사)가 탐험을 하던 중 하와이에 도착했으며 1817년에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스카페르(Georg Anton Schaffer, 게오르그 안톤 스카페르, 1779 ~ 1836, 의사 독일)에 의해 하와이에 군대 주둔을 위한 요새(Fort Alexander, Fort Elizabet, Fort Barclay)가 건설되었으나 요새 건설을 허락했던 지방 추장의 변심으로 그해 바로 철수했다(러시아는 유럽에서의 나폴레옹 전쟁으로 군대를 원정시킬 여유가 없었음).
미국은 1824년에 러시아와 러시아-아메리카 조약을 맺어 북위 54도 40‘의 북부 지역은 러시아인들에게 모피 거래의 권리를, 그 남부 지역은 미국인들에게 모피 거래의 권리를 확보했다. 이에 따라 북서 해안 쪽의 오리건 주 등의 해안 영토의 권리를 러시아로부터 확보했다.

* 13개 식민지(十三個 植民地, Thirteen Colonies)

1498년 베네치아 인 존 캐벗(John Cabot, Giovanni Caboto, 조반니 카보토, 1450 ~ 1499, 이탈리아 출신)은 영국 왕국을 위해 북미 해안을 탐험하였다. 그래서 영국은 1600년대 초반에 북아메리카 동해안 지방 전체를 영국령이라고 주장하였다.

A. 뉴햄프셔 주(state of New Hampshire)

1603년 영국의 마틴 프링(Martin Pring, 1580 ~ 1626)이 상선을 타고 피스카타쿠아강(Piscataqua River)을 항해하였다.
프랑스의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 ~ 1635)이 1605년에 뉴햄프셔 해안에 상륙하였다. 1614년 잉글랜드의 선장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 제임스타운 건설)가 숄즈 섬에 도달하였다.
1623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청교도인  데이비드 톰슨(David Thomson, 1588 ~ 1628) 등이 라이(Rye, 포츠머스 근처)의 오디온즈포인트(Odiorne's Point)에 정착하였다.
뉴햄프셔 주는 1629년 뉴잉글랜드(코네티컷, 뉴햄프셔, 버몬트, 매사추세츠, 메인, 로드아일랜드 지역) 의회(합작 주식회사)가 존 메이슨 선장(John Mason, 전 뉴펀들랜드 주지사)과 페르디난도 고르지스 경(Sir Ferdinando Gorges, 메인 주 설립)에게 토지를 분할해 줌에 따라 설립되었다.
1641년 찰스 2세는 이 지역에 구성된 공동체에 식민지 헌장(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다.
주의 명칭은 메이슨이 영국 햄프셔 카운티에서 유래한 뉴햄프셔 (New Hampshire)라 명명했다.

B. 매사추세츠 주(state of Massachusetts)

1602년 영국의 바솔로뮤 고스놀드(Bartholomew Gosnold, 1571 ~ 1607, 런던 버지니아 회사 조직원)는 엘리자베스 제도에 있는 커티헝크 섬(Cuttyhunk Island, 케이프코드 Cape Cod)에 처음 상륙하였다.
1605년과 1606년 프랑스의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 ~ 1635)은 뉴잉글랜드 해안선 지도를 그렸다.
1614년 영국의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 제임스타운 건설) 선장은 매사추세츠의 해안을 따라 항해하였다.
1606년 제임스 1세는 동부 해안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플리머스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of Plymouth, Plymouth Company, Joint stock company, 주주들이 투자)를 인가하였으나 플리머스 버지니아 회사는 1607년에 세웠던 팝햄 식민지(Popham Colony, Sagadahoc Colony 사가다호크 식민지, 1607 ~ 1608, 매인 주)를 1608년에 포기하였고 회사가 수년간 중단된 후 1620년 11월에 재 조직된 뉴잉글랜드평의회(Council for New England)에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넘겨주었다. 플리머스 식민지(the Plymouth Colony, 1620 ~ 1686), 뉴햄프셔 식민지(the Province of New Hampshire, 1629 ~ 1641),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the Massachusetts Bay Colony,1628 ~ 1691), 뉴헤이븐 콜로니(the New Haven Colony,1638 ~ 1664), 메인 식민지(the Province of Maine, 1622 ~ 1691)가 뉴잉글랜드평의회(Council for New England)에 소속되었다.
영국의 성공회에 불만을 가진 분리파(청교도) 일부는 1608년부터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으로 이주하였으나 라이덴(Leiden)에서 이들은 생활고, 자제 교육의 어려움, 그리고 윌리엄 브루스터(William Brewster, 1566 ~ 1644, 인쇄업자)가 영국 성공회를 비판하는 인쇄물을 찍어냄에 따라 제임스 1세가 분노하여 체포령을 내리는 등 제임스 1세(James I, 재위 1603 ~ 1625)의 박해가 네덜란드에까지 미칠 위험이 있어 네덜란드를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하고자 하였다.
신대륙으로 가기 위해 스피드웰 호(speed well, 60톤)와 메이플라워 호(Mayflower, 화물선,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 fluijt선, 180톤)를 빌렸으나 스피드웰 호는 1620년 8월에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35명의 청교도를 영국으로 이송한 후 고장이 나 청교도들은 65명의 이주자들이 타고 있던 메이플라워호에 옮겨 탔다.
1620년 9월에 102명이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Mayflower, 화물선,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 fluijt선)를 타고 출발하여 11월에 프로빈스타운(Province town) 항구에 도착하여 플리머스(Plymouth)에 정착하였다.
1626년 영국의 플리머스회사(Plymouth Company)의 주주(株主)들이 주주의 권리를 식민지 인에게 매도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는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흡수되었다.
1628년, 청교도들의 합자회사는 매사추세츠 만 지역에 이주민을 단체로 보내어 그 지역의 이주민들과 합작하여 보스턴과 세일럼(Salem) 지역을 식민지화하였다.
1629년, 잉글랜드의 찰스 1세는 왕실헌장에 따라 청교도들의 합자회사에 식민지 헌장(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다. 헌장은 회사에 그 지역에 정착과 통치를 하는 데 필요한 더욱 강한 권리를 주었다.
1630년 존 윈스럽(John Winthrop, 1588 ~ 1649, 변호사, 초대 매사추세츠 주지사)은 1,000명의 청교도들을 이끌고 와 보스턴 지역에 정착지를 세워 번창시켰다.
식민지가 점점 팽창해지자 원주민인 인디언 부족과의 갈등이 커져갔다.
식민지인들은 코네티컷 강 계곡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토지의 소유자였던 피쿼트 부족(Pequot)과 1634 ~ 1638년 동안 피쿼트 전쟁(Pequot War)을 하였다.
식민지인들이 1637년 4월 피쿼트 족 마을을 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피쿼트 족 전사들은 웨더스필드 타운(Town of Wethersfield)을 공격하여 30명의 식민지 개척자를 죽였으며 그러자 식민지인들은 피쿼트 족의 마을을 습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었고, 300명의 피쿼트 족을 죽여 거의 멸족시켰다.
피쿼트 전쟁 후 뉴잉글랜드의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코네티컷 식민지, 뉴헤이븐 식민지와 플리머스 식민지는 뉴잉글랜드 식민지 연합이라는 방위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1675년부터 1678년까지 4년 동안 인디언 부족인 왐파노아그 부족과 필그림 파더스 간에 토지 갈등을 둘러싼 필립왕 전쟁(King Philip's War, First Indian War, Great Narragansett War,  Metacom's Rebellion, 1675 ~ 1678)이 일어났다.
식민지인들이 합의했던 경계를 넘어서 들어오자 왐파노아그 부족장
메타코멧(Metacomet, 별명 필립왕)은 분노하여 식민지인들의 농장을 약탈했으며 이에 식민지 민병대는 왐파노아그 부족과 분쟁이 있었던 모호크족(Mohawk People)의 전사들과 합세하여 대항했으나 필립왕이 인디언 특유의 게릴라전을 전개함에 따라 필립왕을 토벌할 수 없었다. 인디언들은 자기들도 후에 민병대와 적이 되어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민병대에 게릴라 전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병대는 모히간족(Mohican)과 동맹을 맺고 필립왕을 토벌하였으며 전쟁결과 왐파노아그 부족은 60 ~ 80%에 해당하는 6천명이 죽고 겨우 4백명만이 살아남았으며 식민지인도 8%에 해당하는 600명 가량이 죽었다.
필립왕 전쟁 이후에도 인디언의 저항은 계속되었으나 소규모였으며 별로 성과를 얻지도 못했다.
주 이름은 이 지역에 살았던 매사추세츠 족(Massachusett tribe)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1684년 매사추세츠는 왕실 식민지로 변경되었다.

C. 로드아일랜드 주(state of Rhode Island)

1524년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Giovanni da Verrazzano, 1485 ~ 1528, 이탈리아, 탐험가)가 프랑스를 위해 로드아일랜드의 해안을 따라 항해하였고 내러갠셋만(Narragansett Bay)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1614년 네덜란드의 항해자 아드리엔 블록아드리엔 블록(Adriaen block, 1567 ~ 1627  상인, 선장)이 내러갠셋만(Narragansett Bay)으로 들어오면서 항해하였다.
1631년 영국에서 보스턴에 도착한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 ~ 1683, 영국, 침례교 성직자)는 종교의 자유,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1631년 여름 포리머스로 이주하였다.
청교도 목사에서 침례교 목사로 전향한 로저 윌리엄스는 청교도로부터 분리되었다.
1632년 12월 로저 윌리엄스는 국왕의 헌장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으로부터 땅을 사지 않은 채 플리머스의 땅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긴 소책자를 썼다.
1633년 12월, 매사추세츠만 당국은 국왕과 헌장을 공격하는 그의 소책자 문제로를 보스턴의 일반 법원에 출두하도록 그를 소환했다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  ~ 1683)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했으며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는 것을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다양하고 새롭고 위험한 의견으로 인해 선동과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1636년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서 추방되었다.
1636년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  ~ 1683)는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서 추방된 후 내러갠세트 만(Narragansett bay) 끝에 살고있던 내러갠세트(Narragansett) 부족이 제공한 땅에 정착했다 . 그는 그 곳을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Providence Plantations)이라고 부르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곳이라고 선언했다.
1640년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Providence Plantations)에서는 39명의 자유인(시민권과 투표권을 가진 남성)이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에 따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할 것"이라고 의결하여 선언하는 협정을 하였다.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  ~ 1683)는 시민권과 종교를 분리하여 종교의 자유를 실현하였고 이에 따라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제공하는 근대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정착촌을 설립했다.
그리고 1638년,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에서 추방된 앤 허친슨(Anne Hutchinson), 윌리엄 코딩턴(William Coddington), 존 클라크(John Clarke), 필립 셔먼(Philip Sherman)과 종교적인 반체제 인사들은 로저 윌리엄스의 설득에 따라 로드아일랜드에 정착하여 포츠머스 협약(Portsmouth Compact, 1638. 3.)을 체결하고 포츠머스 정착지를 설립하였다.
로드아일랜드 식민지 및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 식민지는 프로비던스(Providence), 포츠머스(portsmouth) 외에 뉴포트(Newport), 워릭(Warwick)이 세워져 형성되었다.
1643년 매사추세츠 만, 플리머스, 코네티컷과 뉴헤이븐 식민지들은 내러갠셋 만의 타운들을 제외하고 군사적 동맹을 형성하였으는데 그들은 로드아일랜드를 사악하고 무질서한 장소로 여겨 로그스 아일랜드(Rogue's Island)라고 부르고 군사동맹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
로저 윌리엄스가 1644년 뉴잉글랜드 내러갠셋에서 프로비던스 식민지의 주를 설립하기 위하여 잉글랜드로부터 식민지 헌장(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획득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1660년 잉글랜드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을 때에 무효가 되었다가 합자회사에 의해 로드 아일랜드 주가 설립된 후인 1663년 국왕 찰스 2세에 의해 새 헌장이 승인되었다.
로드 아일랜드는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네덜란드어인 rodlich Eylande(붉은 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D. 코네티컷 주(state of Connecticut)

1609년 네덜란드가 고용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 (Henry Hudson, 1565 ~ 1611 실종)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으로 올라갔다.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드리엔 블록(Adriaen block, 1567 ~ 1627  상인, 선장)은 1614년 코네티컷 강을 항해하여 탐험하고 코네티컷을 뉴네덜란드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네덜란드는 코네티컷에 정착촌을 세웠으나 열심히 개척하지 않았다.
최초의 영국인 정착민은 1633년 Windsor에 정착했고, 다음 해에는 Wethersfield에 정착했다.  매사추세츠 출신 존 윈스럽(John Winthrop, 1588 ~ 1649, 변호사, 초대 매사추세츠 주지사)은 1635년 코네티컷 강어귀에 세이브룩 식민지를 건설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존 윈스럽 주니어(John Winthrop Jr., 1606 ~ 1676) 코네티컷 주지사는 이미 합자회사로 설립된 코네티컷 주이지만 영국 정부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식민지에 대해 절대적인 통제권을 시행할 것을 두려워하여 식민지 헌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1662년 식민지 헌장(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받았다.
167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결과 웨스트민스터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에게 뉴네덜란드를 할양하였다.
코네티컷이란 이름은 모히간족어 'Quinnehtukqut(긴 강이 흐르는 땅, 긴 하천을 마주한 땅)에서 유래되었다.

E. 뉴욕 주(state of New York)

1524년 프랑스가 고용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Giovanni da Verrazzano, 1485 ~ 1528)가 뉴욕만 안으로 진입하면서 허드슨 강에 도달하였다
1609년 네덜란드인들이 고용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65 ~ 1611 실종)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그 강으로 올라갔으며 곧 네덜란드인들은 허드슨 강 골짜기에 일부 교역지들과 정착지들을 설립하여 뉴네덜란드를 만들었다.
그 해에는 프랑스의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이 퀘벡에서 뉴욕의 북쪽에 들어왔다
거기서 그들은 인디언들과 함께 모피 교역을 시작했다. 1621년 네덜란드인 상인들의 단체가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뉴암스테르담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626년 네덜란드의 총독 페터르 미노이트(Peter Minuit, 1580 ~ 1638, 뉴네덜란드 식민지의 제3대 총독)가 맨해튼을 인디언들로부터 약 24 달러로 사들였다.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에서 건너온 영국의 식민자들이 롱아일랜드에 정착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네덜란드인들과 협동생활을 하였다.
영국의 찰스 2세의 동생 요크의 공작 제임스(James, Duke of York, 1633 ~ 1701, 제임스 2세 재위 1685 ~ 1688)는 뉴네덜란드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1664년 요크공작의 신랑(Groom of the Chamber 궁정 신랑)인 리처드 니콜스(Richard Nicolls, 1624 ~ 1672)가 이끄는 4척의 함대를 보내어 뉴네덜란드를 강탈하였다.
찰스 2세는 뉴욕을 요크의 공작 제임스(James, Duke of York, 1633 ~ 1701, 제임스 2세 재위 1685 ~ 1688)에게 주었다.
요크 공작은 개인 소유의 뉴욕에 1665년 공작법(The Duke's Laws)을 제정하여 뉴욕 식민지 정부의 통치지침으로 사용하였다.
1682년 뉴욕 주의 영주인 요크 공작 제임스는 토머스 동안(Thomas Dongan, 2nd Earl of Limerick, 1634 ~ 1715, 5대 뉴욕주지사, 재임 1683 ~1688)을 주지사로 임명하였으며 토머스 동안은 1683년 뉴욕 최초로 대표 회의를 소집하여 뉴욕 총회에서 자유 및 특권 헌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과 통치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 헌장은 찰스 2세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주 이름은 요크 공작에서 유래하였다.

F. 펜실베이니아 주(state of Pennsylvania)

1609년 네덜란드가 고용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65 ~ 1611 실종)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으로 올라갔다.
펜실베이니아는 뉴네덜란드의 일부였으나  1681년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1685, 요크 공작의 형)는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 ~ 1718, 식민지 개척자, 작가  퀘이크 교도)에게 펜의 아버지 윌리엄 펜 경(Sir William Penn,1621 ~ 1670, 제독, 하원의원)에게 빌린 빚 대신에 그 지방을 펜에게 1681년 개인 소유의 식민지 면허장(Colonial Charters)을 주었다.
펜실베이니아라는 이름도 윌리엄 펜 아버지의 이름(Sir William Penn,1621 ~ 1670, 제독, 하원의원)으로 라틴어로 '숲'을 의미하는 'sylvanus'에서 유래되었다.

G. 뉴저지 주(state of New Jersey)

1609년 네덜란드가 고용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65 ~ 1611 실종)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으로 올라갔다.
뉴저지는 뉴네덜란드의 일부였으나 1664년 영국의 요크 공작(제임스 2세, 재위 1685 ~ 1701)이 뉴네덜란드를 점령하였고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1685, 요크 공작의 형)가 요크 공작에게 주었다.
제임스 2세(요크 공작)는 영국 해협에 있는 저지섬의 이름을 따서 뉴저지라고 하였다.
1664년 제임스 2세(요크 공작)는 자신의 친구들인 존 버클리 경과 조지 카터렛 경에게 개인 소유의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을 주었다.
1674년 에드워드 빌린지가 이끄는 퀘이커 교도들이 버클리가 나눈 뉴저지를 매입하였다.

H. 델라웨어 주(state of Delaware)

1609년 네덜란드가 고용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65 ~ 1611 실종)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으로 올라갔다.
스웨덴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괄 피터 미뉴잇(Peter Minuit, 1580 ~ 1638)이 스웨덴 정부를 설득하여 델라웨어주 윌밍턴 지역에 크리스티나 요새(Fort Christina)를 세웠다.
1638년 스웨덴이 정착촌을 세웠으나 1655년 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 1612 ~ 1672)가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가 스웨덴 요새를 점령하여 네덜란드가 델라웨어를 지배하게 되었다.  
델라웨어는 뉴네덜란드의 일부였으나 1664년 영국의 요크 공작(제임스 2세, 재위 1685 ~ 1701)이 뉴네덜란드를 점령하였고 1681년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1685, 요크 공작의 형)는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 ~ 1718, 식민지 개척자, 작가)에게 펜의 아버지 윌리엄 펜 경(Sir William Penn,1621 ~ 1670, 제독, 하원의원)에게 빌린 빚 대신에 그 지방에 대한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다.
델라웨어라는 이름은 뉴저지를 흐르는 강에 버지니아 주 제3대 총독이었던 델라웨어 남작 토마스 웨스트(Thomas West, 3rd Baron De La Warr)의 이름을 붙이면서 시작되었다.

I. 메릴랜드 주(state of Maryland)

1498년 베네치아 인 존 캐벗(John Cabot, Giovanni Caboto, 조반니 카보토, 1450 ~ 1499, 이탈리아 출신)은 은 영국 왕국을 위해 북미 해안을 탐험하였다. 그래서 영국은 1600년대 초반에 북아메리카 전체를 영국령이라고 주장하였다.
스페인의 플로리다 총독 페드로 메네데스 데 아빌레스(Pedro Menendez De Aviles, 1519 ~ 1574)는 1572년 체스피크 만을 탐험하였다.
1608년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 제임스타운 건설) 선장은 북부로 향하여 체서피크으로 항해하면서 메릴랜드 지방으로 들어갔다
1631년 버지니아의 윌리엄 클레이본(William Claiborne , 1600 ~ 1677, 버지니아 식민지 국무장관, 농장주, 무역업자)은 체서피크 만에서 켄트 섬에 첫 식민적 정착지인 교역지(交易地, a trading point)를 열었다.
1632년 영국의 찰스 1세(Charles I, 재위 1625 ∼ 1649)는 영국의 첫 번째 볼티모어 경(Lord Baltimore)인 조지 캘버트(George Calvert, 1579~1632)에게 메릴랜드 지방에 대한 개인 소유의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으나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세실리어스가 1632년 2대 볼티모어 경으로 메릴랜드 식민지의 주인이 되었으며 찰스 1세의 부인 헨리에타 마리아의 명예를 가려 메릴랜드라고 이름을 지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서부 해안의 남부 끝에 세인트 메리스 시티(Saint Mary City)를 건설하였다.

J. 버지니아 주(state of Virginia)

1570년 스페인 예수회의 단체가 버지니아에 처음으로 정착하였으나 인디언들에 의해 몇 달 후에 전멸되었다.
1584년 엘리자베스 1세는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552 ~ 1618, 정치인, 탐험가, 작가, 여왕의 총신)에게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칙허장을 주었다.
1584년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552 ~ 1618, 길버트의 아버지 다른 동생)은 탐험대를 보내어 식민지를 개척하게 했다.
탐험대는 플로리다 북부를 탐험하였으며 1585년 랠프 레인(Ralph Lane, 1532 ~ 1603, 탐험가) 주지사가 이 지역에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를 건설하였으나 보급품 부족과 인디언 부족과의 좋지 않은 관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귀국하였으며 1587년 존 화이트(John White, 1539 ~ 1593, 식민지 총독, 탐험가, 아티스트,  지도 제작자)가 다시 로어노크 섬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후 곧 보급품을 싣고 다시 갈 예정이었으나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쟁으로 늦어져 1590년에 보급품을 싣고 갔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식민지 개척은 실패했다.
월터 롤리는 이 지역을 영국의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린 엘리자베스 1세 여왕(Elizabeth I, 재위 1558 ~ 1603)의 명예를 기려 ‘버지니아(Virginia)’로 명명하였다.
1606년, 국왕 제임스 1세는 합자회사인 런던의 버지니아 회사에게 식민지를 개척할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을 주었다. 1607년 제임스타운에 첫 영구적 영국인 정착지를 설립하였다.
식민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 제임스타운 건설) 선장이 잘 이끌었다.

K. 사우스캐롤라이나 주(state of South Carolina)

1521년 카를 5세의 명령으로 프란시스코 고르딜로(Francisco Gordillo)가 스페인 원정대를 이끌고 캐롤라이나 해안을 탐험하였다.
1526년 히스파니올라섬의 산토도밍고에서 온 스페인의 루카스 바스케스 데 아일론(Lucas V?zquez de Aylon, 1480 ~ 1526, 스페인 치안판사)이 미국의 첫 유럽인 정착지(산미겔 데 괄다페)를 건설하였다.
1692년 영국의 찰스 1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와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포함한 대지를 로버트 히스 경(Robert Heath, 1575 ~ 1649, 법무부장관)에게 개인 소유의 식민지 면허를 승인(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하였다. 그러나 히스 경은 캐롤라이나에 정착지를 건립하지 않았다.
캐롤라나(Carolina)는 "찰스(2세)의 땅"이라는 뜻이다.
1663년 찰스 2세가 8명의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캐롤라이나를 승인하였다. 1669년 소유자들은 정착자들을 아메리카로 보내어 정착촌을 세웠다.
1719년 국왕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를 실제로 식민지에 가지 않은 식민지 영주로부터 매입하여 총독을 임명했다
1729년까지 7명의 영주로부터 매입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식민지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의 두 직할 식민지를 두었다.

L. 노스캐롤라이나 주(state of North Carolina)

1524년 이탈리아의 탐험가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Giovanni da Verrazzano, 1485 ~ 1528)가 뉴욕만 안으로 진입하면서 허드슨 강에 도달하였다. 1540년 스페인의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 1495 ~ 1542)가 노스캐롤라이나 지방의 남서부 끝을 원정하였다. 그는 금을 찾는 목적이었으나 실패하였고 미시시피강에 처음 도달한 유럽인이 되었다.
1584년 잉글랜드의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552 ~ 1618, 정치인, 탐험가, 작가)이 정착지를 찾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에 탐험대를 보냈다.
1585년 로어노크 섬에 잉글랜드의 첫 아메리카 식민지가 설립되었으나 모두 돌아갔다.
롤리 경은 1587년 존 화이트(John White, 1539 ~ 1593)를 로어노크 섬에  원정대를 보냈으며 존 화이트는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를 건설하고 물자를 공급하기 위하여 1587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1588년 스페인과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90년 엘리자베스 1세의 허가를 받아 공급물자를 싣고 로어노크 섬에 갔으나 그의 식민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1629년 찰스 1세는 법무 장관 로버트 히스 경(Robert Heath, 1575 ~ 1649, 법무부장관)에게 버지니아 남동부의 광대한 토지를 개발할 수 있는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으나 정착촌 건립에 실패하였다.
캐롤라이나에 첫 영구적 유럽인 정착자들은 1650년 경에 버지니아에서 왔으며 앨버말 사운드 지방에 정착하였다.
1663년 찰스 2세는 8명의 호의적 귀족들에게 개인소유의 캐롤라이나 식민지 면허를 재승인(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하였다.
캐롤라나(Carolina)는의 북쪽은 남쪽과 크게 달랐고 두 지역 사이의 수송이나 정보 전달이 어려웠기 때문에 1712년에 분할하여 노스캐롤라이나에 행정부가 구성되었지만, 한 식민지 영주가 두 식민지를 지배하였다.

M. 조지아 주(state of Georgia)

1565년 스페인군은  플로리다에 상륙하여 세인트오거스틴에 요새를 세웠으며 조지아 해안에는 선교사 양성소들을 세웠다.
1600년대 후반에 영국의 후원을 받은 인디언과 해적들이 조지아의 스페인 선교 시설을 파괴시켰으며 1700년대 초반 앤 여왕 전쟁(Queen Anne's War, 1702 ~ 1713) 중에 영국은 스페인과 인디언 동맹을 물리치고 조지아 해안의 통치권을 얻었다.
그 후 20년 동안 조지아 이사(Trustee Georgia)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1732년 영국왕 조지 2세는 제임스 오글소프(James Edward Oglethorpe, 1696 ~ 1785, 장군, 의회 의원)가 이끄는  조지아 식민지 설립 관리위원회에 조지아 식민지 헌장(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승인하였다.
주 이름은 영국의 조지 2세(George II, 재위 1727 ~ 1760)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붙였다.
1624년 버지니아 회사가 파산하여 버지니아는 면허가가 취소되었고 버지니아는 최초의 왕실 식민지가 되었다.
독립전쟁이 시작될 무렵까지 개인소유의 식민지로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가 남아있었고 합자회사 소유로는 로드아일랜드와 코네티컷이 남아있었으며 나머지 8개 식민지는 왕실 소유로 바뀌었다.

다. 식민지 노예

북아프리카의 이슬람인들은 오래전부터 간혹 사하라 사막 남쪽으로 내려가서 흑인을 데려와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십자군도 원정에서 돌아올 때 흑인들을 데려와 노예로 삼았다.
1434년에 엔히크 왕자가 보낸 길 에아네스(Gil Eanes, 1395 ~?)가 이끄는 함대가 보자도르곶(Cabo Bojador)을 탐험하고는 그 지역 상황을 알기 위해 원주민을 사서 데려와서는 리스본에서 노예로 팔아 원정대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포르투갈 원정대가 흑인을 리스본에 데려와 노예로 사고 판 것이 노예무역의 시작이었다.
1441년에는 농업 노동력으로 이용하였으며 1443년에 6척의 함대가 아르깅(Arguim, Mauritania, 모리타니) 제도에서 275명의 노예를 데려오는 등 노예무역은 계속 이어졌다.
엔히크 왕자는 노예무역의 1/5을 세금으로 받았으며, 교황은 영혼을 구원한다는 이유로 가톨릭의 노예무역 상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오는 것을 인정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은 에스타도 다 인디아(Estado da india, 포르투갈 인도)를 설립하고 동아프리카 노예무역을 시작하였다.
1830년대까지 매년 200명의 노예가 모잠비크에서 수출되었고,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합병된 기간(1580–1640)에 아시아에서 필리핀으로 끌려온 노예 수도 비슷하였다.
스페인은 콜럼버스(1451? ∼ 1506)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이래 아메리카 인디언을 노예화하여 광산개발, 사탕수수와 담배 재배의 대농장 등에서 혹사하였으므로 인디언의 수가 격감하였다.
그리고 인디언을 노예로 사용하는 것을 1530년에 스페인령(領)에서, 1570년에는 포르투갈령인 브라질에서 법규로 금지하였다.
이에 아메리카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설탕, 커피, 면화, 담배 등의 농장을 대규모로 개척하였으므로 노동력이 크게 부족하게 되었다.
16세기 초엽에 스페인은 선교사 B. 라스카사스(Bartolom de Las Casas, 1474 ~ 1566)의 권유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인디언 대신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아프리카 대륙의 대서양 연안에서 여러 부족의 흑인들이 노예 무역상을 통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수입되었다. 노예무역 상인들은 노예를 공급한 아프리카의 흑인 유력자에게 노예 제공 대가를 전쟁무기와 인도산 면직물로 지불했다.
흑인 노예무역이 성행했던 이유는 식민지에 많은 노예 수요가 있었고 아프리카 현지인이 노예 포획을 직업으로 삼아 그 지역의 경제를 유지했으며 스페인 왕실의 이권 확보 수단이 되었고 무역상이 흑인 노예무역으로 얻는 수익이 다른 무역에 비해 300 ~1,000%로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유럽산 총칼과 면직물을 아프리카에 지불하고 흑인 노예를 끌고와 신대륙에 공급하고는 신대륙에서 흑인 노예를 이용하여 생산된 설탕 등을 구입하여 유럽으로 가져가는 삼각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은 아프리카 흑인 수입권(輸入權)을 스페인 왕령으로 독점 특허권(獨占特許權, lit Asiento de Negros, 아시엔토 데 네그로스, '흑인의 정부계약')을 발부했다.
첫 번째 아시엔토는 카를로스 1세(Carlos Ⅰ de España, 재위 1516 ~ 1556)가 1518년 노예무역을 인정하고 플랑드르(Flemish)의 로랑 드 구베노트(Laurent de Gouvenot, 플랑드르 궁정의 귀족이자 스페인 국왕 국무회의 회원)에게 내어준 것으로 최대 4천 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8년 동안에 수입하는 독점 사업이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Carlos Ⅰ de España, 재위 1516 ~ 1556)는 1542년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자신의 승인을 철회했지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포르투갈 노예무역상인들은 서아프리카의 상(上) 기니와 시에라리온 지방에서 노예를 사들여 아메리카로 보냈다. 1575년 포르투갈의 앙골라를 식민지로 건설한 후에는 포르투갈 총독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더욱 적극적이었으며 17세기 초에는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로 공급되는 흑인노에의 85%를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이 수송했다.
1662년에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아센토에 대한 대규모 계약을 맺어 스페인 식민지에 2만 4천 명의 흑인 노에를 공급했다.
그 이후 1702년 프랑스의 기니 회사(Compagnie de Guinée)가 4천8백 명의 흑인 수입권을 받았고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영국 정부가 스페인으로부터 얻어낸 노예무역의 독점 특허권(獨占特許權, 아시엔토, Asiento)은 1743년까지 30년 동안 11만 4천 명의 흑인 노예를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수송하는 것으로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 1711 ~ 1853, 영국의 민관 협력 주식회사)에 양도하였다.
노예무역이 성행한 300년 동안 약 1,500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로 강제 이송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노예 수요는 카리브해 지역 및 중남미가 압도적이었고, 북미에 노예 수출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미국은 18세기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중심으로 인디언 노예 매매가 성행하였다. 19세기의 미국 남부의 목화 등의 광대한 플랜테이션 농업은 노예 제도에 의해 유지되고 발달되었다.
미국은 흑인 노예무역이 금지되자 흑인 노예 자손을 모두 노예화하여 노예 수를 늘렸다(one-drop rule, 한 방울 원칙,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간주).
노예무역의 폐지는 1792년 영국에서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윌리엄 윌버포스, 1759 ~ 1833, 정치가.)가 제안한 노예무역의 점차적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결의안이 하원을 통과하였다.
활발히 노예무역을 하던 영국 상인을 뒤이어 미국 상인들이 마지막으로 노예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1802년에 덴마크, 1807년에 미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하였고, 1814년에 프랑스도 1819년부터 노예무역을 금지한다고 결의하였다.
노예해방령은 1833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법령이 통과되었다.
미국은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남에 따라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라. 미국의 독립

북아메리카 동해안을 개척한 영국은 원주민 인디언을 몰아내고 영토를 서쪽으로 확대하여 13개 식민지 주(Original 13 American colonies: state of Delaware, state of Pennsylvania, state of New Jersey, state of Georgia, state of Connecticut, state of Massachusetts, state of Maryland, state of South Carolina, state of New Hampshire, state of Virginia, state of New York, state of North Carolina, state of Rhode Island)를 건설하였으며 이주한 백인의 숫자가 늘어나 인디언보다 많은 지역도 생겨났다.
영국은 지역마다 총독을 파견하였지만 이주한 퓨리턴(Puritan, 청교도, 영국의 칼뱅 계통의 신교도)이 1620년 메이 플라워호에서 서약(자주적 식민지 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를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할 것)한 플리머스의 기본법에 따라 자치가 허용되었고 미국 땅은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었으므로 영국은 식민지인들이 개척하여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세금을 거의 부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국은 식민지에 영국 국교회의(성공회) 조직을 만들지 않았으며 성직자도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는 다양하였다.
17세기 이후 식민지 정착이 진행됨에 따라 한랭한 기후로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미국의 동북부에서는 양조, 조선, 목재, 철강, 운수 등의 산업이, 남부에서는 인디언 주식인 쌀, 담배, 인디고 등의 농산물이, 중부에서는 밀, 육류 등의 산업이 발달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부가 축적되고 있었다.
1651년 영국 공화제 정부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 ~ 1658)이 세계 무역의 3/4를 차지하고 있는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시행한 항해조례(航海條例, Navigation Act, 1651년, 1849년에 핵심 폐지)는 모든 식민지 해상 무역의 물품 운송은 영국 상선을 이용해야 하며 모든 식민지는 담배, 설탕, 직물 등을 오직 잉글랜드를 통해서만 수입과 수출을 할 수 있고 수입관세를 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영국은 식민지인 미국에서는 양털, 실, 모직물 수출을 영국에만 해야 한다는 모직 조례(Woolen Act, Wool Act of 1699, 1699)를 규정하여 영국과의 무역 이외의 독자적 무역을 금지하였다.
조지 1세(George I,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및 아일랜드 국왕 재위 1714 ~ 1727)의 총리인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 영국의 초대 총리, 재임 1721 ~ 1742)은 네덜란드에 뒤떨어진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보호무역 정책(protective trade policy)을 실시하였다. 수입 제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고 수입 원자재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거나 인하했으며, 영국산 제품에 대한 수출 보조금을 지급하였고, 영국 상품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품질 관리 규정도 제정하였다. 이렇게 보호무역 정책을 시행한 결과 영국은 세계 무역의 3/4을 차지하던 네덜란드 제국을 넘어 설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영국에서는 밀수가 너무나 성행하여 이를 막을 수 없어 물품세로 세금을 부과하려하자 폭동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관세를 낮추고 물품세를 높이면 세관을 통과한 물품이나 밀수로 들어온 물품이나⁠  모두 세금이 부과되지만 관세를 높이고 물품세를 낮추면 밀수로 들어온 물품은 세금이 부과되지 않아 싸기 때문이다.
영국 본토가 이럴진데 식민지에서의 밀무역은 말할 것도 없이 성행하였다.
1750년 영국왕 조지 2세(George II of Great Britain, 재위 1727 ~ 1760)는 식민지에서 철을 녹이는 것을 금지하는 철 조례(Iron Act, 1750년)를 정하여 식민지의 공업 발전을 방해하였으며 여기서 더 엄격한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 식민지의 원자재를 독점 구입 가공하여 식민지에 고가로 판매함) 정책을 시행하였다.
유럽에서 7년 전쟁(Seven Years' War, 1756 ~ 1763)이 일어나 싸우는 중에 북미 식민지에서도 영국과 프랑스 간에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 ~ 1763)이 일어났으며 양국 군대에 많은 식민지인과 인디언들도 참가하였다. 식민지인들은 인디언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민병대가 참가했다.
인디언들의 일부는 영국과 동맹을 맺어 참전하고 다른 일부의 인디언들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참전했다. 그런데 영국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가 인디언과 동맹을 맺었다고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고 한다.
미국 식민지인들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주들 간에 서로 협력하게 되었고 민병대는 전쟁에 대처하는 전쟁 능력을 길렀던 것이다.
미국의 식민지인들은 영국이 1763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 ~ 1763, 7년 전쟁의 일부)에서 퀘벡을 점령하고 승리하여 프랑스로부터 할양받은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루이지애나(미시시피강 동쪽)를 식민지인들에게 농토와 목장에 필요한 땅을 확장해 주고 늘어나는 이민을 수용해 주기를 원했으나 영국의 조지 3세(George III, 재위 1760 ~ 1820)는 식민지인과 인디언과 충돌로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수없어 1763년 식민지인이 서쪽으로 개척하여 확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1763년 선언(Royal Proclamation of 1763, 1763)을 하고 북서부 영토(미시시피강 동쪽,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에 백인 정착을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1774년 영국 의회는 '퀘벡법(Quebec Act)'을 통과시켜, 북서부 영토(미시시피강 동쪽,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를 퀘벡 식민지에 편입시켰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 참가하여 싸웠으나 그에 대한 보답이 없자 반영 감정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영국(조지 3세, George III, 재위 1760 ~ 1820)은 프랑스와의 7년 전쟁(프렌치 인디언 전쟁)으로 발생한 어마어마한 재정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1763년 영국 의회에서 영국 외에 다른 외국과 설탕이나 담배 등의 상품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는 항해조례(navigation act, 1763)를 제정하였고, 1733년에 세수를 높일 목적으로 식민지가 영국령에서 수입하는 당밀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당밀 조례(Molasses Act, 1733)을 제정하였던 것에 이어 1764년에 식민지는 세금이 부과된 영국 설탕만 사용해야 한다는 설탕 조례(Sugar Act, 1764)가 제정되었다.
그런데 영국 설탕은 맛이 없었고 특히 럼주 제조에 맞지 않았다.
이듬해인 1765년에는 영국군의 식민지 주둔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식민지인들이 영국 부대에 병영과 식량을 제공하는 의무를 지게 하는 병영법(Quartering Act, 1765)과 인지조례(Stamp Act, 1765)까지 통과시켜 시행되었다.
인지조례는 식민지에 유통되는 모든 종이에 3페니의 인지세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큰 금액은 아니었으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어 식민지인들의 여론을 크게 악화시켜 큰 저항을 부르게 되었다.
이들 조세는 식민지인들의 동의 없이 조례로 정하여 강제로 시행되었으므로 식민지들의 자치권이 크게 침해되었다.
그런데 영국의 추가적인 식민지 세금 부과 정책은 그 시대에 미국 식민지인의 소득이 영국 일반인보다 몇 배나 소득이 높았기 때문에 시행한 것이었으나 식민지인들에게는 강제적으로 세금이 부과되어 자치권을 침해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반발이 컸던 것이다.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고 주장하면서 과세를 반대하였으며 특히 인지세법 폐지를 주장하였고, 1765년에는 열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므로 영국은 이듬해 이 세금법을 철폐하였다.
1766년 인지세법을 폐지하는 대신에 영국왕과 의회가 식민지의 입법권을 가진다는 선언법(宣言法, 1766)을 제정하였고 1767년에 제정한
타운젠드법(Townshend Acts, Townshend Duties, 1767, 1770 폐지)은 세입법, 보상법, 관세위원회법, 부해사 재판법, 뉴욕 제한법 등이 속하며 납, 종이, 페인트, 유리, 홍차 등과 같은 일상 용품 수입에 대해 관세를 정하여 식민지에서의 세수를 증대시키고 식민지의 규칙에서 총독과 판사를 독립시키며 법에 의한 철저한 무역 통제를 하기 위한 법률이다.
특히 보스턴에서는 보스턴 학살 사건 (Boston Massacre, 1770) 등으로 영국에 대한 불만이 더 크게 쌓여가고 있었다.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 1770.3.)은 인지세법, 설탕법 등으로 영국과 식민지인들의 감정이 격화된 상황에서 보스턴 항구 부두에서 여러 명의 부두 노동자들이 술을 마시는 중에 이발사가 관세 구역 주둔 영국 장교에게 이발값을 달라고 소란을 피우자 경계병이 심하게 쫓아냈고 이에 항의하여 노동자들이 눈덩이를 만들어 던지는 등 시위가 결렬해지자 경계병이 발포하여 노동자 5명이 죽었으며 이에 매체들이 학살이라는 과도한 표현으로 선동하여 식민지인을 크게 자극했다.
미국의 식민지인들도 영국인과 마찬가지로 차를 즐겨 하루에 5~6회(early tea(bed tea), breakfast tea, eleven tea, mid day tea, afternoon tea, evening tea, after dinner tea, night tea) 마셨다.
1773년 영국 의회는 네덜란드 상선과 미국 식민지인 사이의 차 밀무역을 금지시키고 망해가던 동인도회사에게 차 무역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세법인 차법 (Tea Act, 1773)을 제정했다. 동인도회사에 투자한 영국 귀족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려 했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차 밀무역 상인들은 1773년에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의 일원인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 1722 ~ 1803, 독립운동가, 후에 매사추세츠 주지사)의 주동으로 인디언으로 분장하고 보스턴 항구에 정박한 배를 습격하여 340상자의 차(42톤, 현재 시가 약 백칠십만달러, 22억원)를 바다에 버리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일으켰다.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은 찻값을 배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한다는 보스턴 항구법(Boston Port Bill, 1774)을 제정하여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였으며, 차 사건을 일으킨 주민들에게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매사추세츠 주를 영국 정부의 지배하에 두도록 변경하여 자치령을 폐기하는 매사추세츠 통치 법(Massachusetts Government Act, 1774)과 매사추세츠 관리가 고발당하여 그곳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총독이 다른 식민지 혹은 영국 본국으로 재판장을 옮기는 것을 인정하는 재판권법(Administration of Justice Act, 1774)을 제정하였다.
보스턴 항구법(Boston Port Bill, 1774), 매사추세츠 통치법(Massachusetts Government Act, 1774), 재판권법(Administration of Justice Act, 1774), 병영법(Quartering Act, 1765, 1774)을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 Coercive Acts, 강제적 제법)이라 하였다.
이에 아메리카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제1차 대륙 회의(大陸會議, Continental Congress, 1774년 9월)를 열고, 식민지 협의회를 구성하여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영국에 대하여 저항할 것을 결의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식민지 인들은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13개 식민지 외에 퀘벡, 프린스 에드워드 섬, 노바 스코샤, 조지아, 동 플로리다, 서 플로리다에도 대륙회의 참가 초대장을 보냈지만 참석하지 않았으며 조지아 주는 제2차 대륙회의(大陸會議, Continental Congress, 1775년 5월)에 참가했다.
1774년 영국은 북아메리카 퀘벡 식민지 지배에 관한 법률인 퀘벡법(Quebec Act, 1774)을 제정하여 영국령 북아메리카 퀘벡 식민지에 유화정책을 폈다.
보스턴 사람들은 영국의 매사추세츠 주 자치령 폐기에 격분하였으며 식민지 협의회는 영국군에 대항해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각지에서 mimuteman(긴급 소집병)이라고 명명된 많은 민병대(militia, Minutemen)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 식민지인들은 영국과 전쟁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거친 자연환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각자 터전을 잡아 살아남는데 전력을 다했으므로 독립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많은 군비를 들여 군 조직을 강화할 필요성도 없었고 인디언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된 소수의 민병대는 전쟁을 할 수 있는 체계적인 훈련이 되어있지 않았으며 더욱이 식민지인들 중 독립에 반대하거나 전쟁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그때 식민지 미국의 인구 250만 명 중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독립파(Patriots)가 약 100만 명으로 40%였으며 독립을 반대하는 왕당파(Loyalist)의 수는 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식민지 미국 전체 인구의 20 ~ 30%에 해당되었다. 왕당파(Loyalist)가 독립을 반대한 이유는 독립하면 영국으로부터 받았던 해택이 없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스턴 차 사건에 영국이 가혹하게 대처함에 따라 미국인들은 영국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즐겨 마시던 차를 끊고 불매운동을 하였으며 차 대용으로 중남미에서 저렴하게 공급되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차 대신에 커피를 마시게 됨에 따라 커피를 드립(drip)식으로 묽게 하여 차와 비슷하게 하여 마시게 되었다. 그 뒤 압축 증기로 추출하는 에스프레소(espresso)에 뜨거운 물을 더하여 커피 농도를 묽게 하고 양을 많게 하여 마시는 미국식 커피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를 카페 아메리카노(caffe Americano)라 한다. 후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미국인들이 이렇게 커피를 마시는 방식을 보고 카페 아메리카노(Caffe Americano)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미국인처럼 마시는 커피라는 의미로 약간 비하하는 용어라는 것이다.
1775년 4월에 영국군(1,700명)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근처의 콩코드에 미국 식민지 민병대의 무기고 설치 정보를 입수하여 무기 접수 작전을 실시했다. 이에 반발한 식민지 민병대는 콩코드로 가는 렉싱턴(Lexington)에서 최초의 전투를 벌였고 이어서 보스턴 인근의 콩코드(Concord)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여기서 식민지군이 영국군을 격파했는데 이를 렉싱턴 콩코드 전투(Battles of Lexington and Concord)라 한다.
민병대는 영국군의 작전계획을 사전에 모두 알고 무기고의 무기를 다른 곳으로 이전시켜 놓고는 적은 수의 민병대 병력으로 맞서다 후퇴했으나 여러 민병대가 지원하여 가담하여 영국군을 중간에 습격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1775년 5월 제2차 대륙 회의를 개최하여 임시 정부를 조직하고 화폐를 발행하여 군비를 확보하였으며 대륙 군 결성을 의결하고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 ~ 1799, 독립군 총사령관, 초대 대통령 1789 ~ 1797, 프렌치 인디언 전쟁 때 영국군에 버지니아 민병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움)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대륙 군(Continental Army)은 지역별로 있던 각주의 민병대를 통합하여 1775년 6월에 창설하였으며 병영을 확장하여 더 많은 병사를 새로 모집하고 훈련해야 했다.
그러나 렉싱턴 콩코드 전투에서 밀렸던 영국군은 대대적으로 전력을 보강하여 다시 침공해 오면서 전쟁이 재개된 뉴욕 전역에서 대륙군은 계속 패퇴하였다.
그리고 1775년 제2차 대륙회의는 퀘벡주에게 영국에 대항하여 같이 싸울 것을 제의했으나 퀘벡주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 1738 ~ 1775) 장군,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1741 ~ 1801) 대령,  대니얼 모건(Daniel Morgan, 1736 ~ 1802) 중대장 등은 대륙군 1,200명을 이끌고 1775년 12월 퀘벡주로 침공하여 퀘벡 전투(Battle of Quebec, 1775)를 벌였으나 몽고메리와 아놀드가 부상을 당하고 다니엘 모건이 지휘하다 항복하는 등 대패하고는 캐나다를 끌어 들이려던 계획을 단념하였다.
이때 유럽에서는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 Lumières)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17, 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 Lumières)는 몽테스키외(Charles 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프랑스), 볼테르(Voltaire, 프랑스), 루소(Jean-Jacques Rousseau, 프랑스), 디드로(Denis Diderot, 프랑스), 엘베시우스(Claude Adrien Helvétius, 프랑스) 등이 주도하였으며 이들의 사상은 17세기 R. 데카르트(Descartes, René, 프랑스), B.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네덜란드) 등의 합리주의와 J. 로크(Locke, John, 영국), T. 홉스(Thomas Hobbes, 영국) 등의 철학, 그리고 뉴턴(Isaac Newton, 영국)의 기계론적 우주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계몽주의는 자연의 빛을 다방면에 미치도록 하자는 것으로 주된 신념은 자연과 이성이다.
계몽주의는 왕권신수설과 같은 도그마와 종교의 미신과 같은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빛에 해당하는 인간 각자의 이성의 힘을 길러 행동함으로써 이성적, 자립적인 인격의 공동체 실현을 지향하였다.
이는 이성을 초월하는 왕권, 은총과 계시의 권위에 의지하는 구교회, 스콜라철학에 비판적이었다.
정치도 신성(神性) 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 생물학적 등의 자연법칙에 따르고 이성으로 방향을 정하여 조정할 수 있으므로 개개인이 이성을 존중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을 정치의 원리로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의 교의(敎義, dogma)도 이성에 반해서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을 주장했다
계몽사상은 프랑스, 독일에서 강하게 전개되었으며 미국 혁명과 프랑스혁명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이때 계몽사상을 받아들인 미국의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 ~ 1809, 영국 출생, 미국의 작가. 국제적 혁명이론가로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에 기여)이 저술하여 미국의 독립을 역설한 '생각(common sense, 47페이지,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평등사상을 설파하고 영국의 봉건제와 군주제를 비난하고 성문헌법에 의거한 공화제 형태의 독립 정부 건설을 제안하였으며 미국은 독립할 능력이 있음을 주장, 1776년 1월 출간)'이라는 책이 큰 반향을 일으키는 등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확실한 자치권 보장의 요구에서 미국 독립의 요구로 여론이 형성되어 갔다.
1776년 7월 4일 대륙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 ~ 1826, 제3대 대통령, 1801 ~ 1809)이 초안한 미국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다. 미국 독립 선언서에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양도할 수 없는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권을 부여받았으며 사회계약으로 성립된 국가가 이를 실행하는데 국가가 이들 권리의 추구를 제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국민은 이들 권리를 추구하도록 국가를 변화시킬 권리가 있으므로 미국은 이를 제대로 실행하지 않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독립군은 군자금이 부족하여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 ~ 1790, 정치가, 사상가, 과학자 피뢰침 등 발명. 미국 독립 선언문의 기초 위원) 등을 유럽으로 보내어 프랑스와 네덜란드, 스페인 등으로부터 전쟁비용을 빌려왔으며 영국에 복수를 원하던 이들 나라에 전쟁 참여를 요청했으나 이들 나라들은 독립군이 영국군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망설이고 참전하지 않았다.
대륙 군은 초창기 5년 동안 계속 패퇴했다.
워싱톤 장군은 병사 수가 적고 약한 대륙 군이지만 없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영국군이 보급품 조달에 긴 시간이 걸리는 약점을 이용하여 전투를 피하고 도망 다니는 전법과 게릴라전을 구사하여 계속 시간을 끄는 장기 소모전을 택하였던 것이다.
세계 최강인 대영제국의 군대가 민병대 수준인 대륙 군을 바로 제압하지 못한 것은 영국군이 즐길 것을 다 즐기고 자만심만 앞세워 방만하게 전쟁에 임했기 때문에 주민과 합심하여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대륙 군에 끌려다닌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군은 영국 본토가 대서양 넘어 너무나 멀리 있어 병사 증원과 보급품 공급에 문제가 발생하여 자신들의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에 영국군의 지휘부는 항상 불안하여 병사와 보급품의 소모에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전략과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했으며 군을 통합하는 사령부 하에 군대가 조직되지 않고 여러 장군들이 각자 마음대로 전략을 세우고 전투에 임해 전쟁을 협조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으며 왕당파(王黨派, royalist, 영국 지배를 원하는 사람)들이 봉기하여 크게 도와줄 것을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미미했다.
더욱이 대륙 군은 1만여 명에 불과했지만 전투에 영국군이 이겨도 병사와 보급품이 곧 채워져 전투가 200회나 끝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대륙 군의 민병대는 임기가 1년이었으며 1만 명이 넘을 때도 있었으며 영국군은 흑인과 독일인(독일 용병 Hessian 헤시언즈, 8천 명) 등의 용병도 고용하였고 인디언들도 있었다.
1776년 3월 대륙 군은 보스턴의 영국군을 포위하였고 영국군은 대륙 군이 영국군의 티콘데로가 요새(Fort Ticonderoga), 크라운 포인트 요새(Fort Crown Point), 앤 요새(Fort Ann)를 공격하여 노획한 화약과 대포로 함선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날 것을 제시하여 협상을 하고 캐나다로 철수했다.
대륙 군은 이로서 사람이 많고 반영(反英) 감정이 심한 뉴잉글랜드(메인, 버몬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등)를 장악하여 독립운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리고 영국군은 1776년 9월 ~ 11월 동안의 전투에서 뉴욕을 점령하여 항구인 뉴욕을 기지로 하여 해군력을 최대한 활용하게 된다.
1777년에 사라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 뉴욕 사라토가)에서 대륙 군(독립군)의 첫 승리가 이루어졌다.
뉴욕 식민지의 올버니(City of Albany)를 공격하기 위해 캐나다 퀘벡에서 남하한 영국군의 캐나다 방면군 사령관 존 버고인(John Burgoyne, 1722 ~ 1792, 소장)의 군대에 대륙 군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Lloyd Gates, 1727 ~ 1806) 장군이 사라토가 전투에서 승리하여 항복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영국군이 패배하게 된 것은 영국군 북아메리카 총사령관 윌리엄 하우(William Howe, 5th Viscount Howe, KB, PC, 1729 ~ 1814) 장군이 존 버고인과 협력하여 대륙 군이 주둔한 뉴욕의 올버니를 점령하고 반란을 끝낼 계획을 세우고 협력하기로 상부와 약속하였으나 이를 어기고 뉴욕 뉴저지 전역과 대륙 군 사령부 지역인 필라델피아 전역에서 워싱턴 장군을 공격하여 몰아내고 승리하였던 것이다.
대륙 군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제작한 켄터키 라이플(Kentucky rifle, Pennsylvania rifle, 수석총 燧石銃 flint lock 부싯돌, 강선을 넣은 전장식 총, 독일 이민자 중 총기 제작자가 있어 독일 사냥총을 제작한 것)을 사용하였는데 장전속도는 느렸지만 사거리가 영국 머스킷 총인 브라운베스(Brown Bess, Land Pattern Musket 랜드 패턴 머스킷, 수석총 燧石銃 flint lock 부싯돌, 전장식 총)의 2배로 길고 적중률이 높아 광활한 미국에서, 그리고 숨어서 싸우는 게릴라 전에 유리하였던 것이다.
영국 정부는 영국군이 사라토가 전투에서 독립군에 패하자 미국에게 전쟁을 중지하면 미국의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미국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랑스가 지원해 준 보급품과 탄약, 대포로 사라토가 전투에서 승리하자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 ~ 1790, 정치가, 사상가, 과학자 피뢰침 등 발명. 미국 독립 선언문의 기초 위원)등의 미국 독립전쟁 지도자들은 유럽으로 건너가 사라토가 전투처럼 미국이 영국에 승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며 미국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이 영국 정부의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영국은 미국을 식민지로 유지시키고 더욱 강한 나라로 될 것이므로 프랑스는 이를 두려워 하였다.
그래서 그동안 망설였던 프랑스는 동맹조약(우호통상조약 및 다른 유럽 동맹국의 입국을 허용하는 비밀 조항, 1778)을 맺고 1778년 참전하였고 스페인은 1779년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참전하였으며 1780년 네덜란드 등도 참전하였다.
워싱턴 장군이 오합지졸의 대륙 군을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가리켜 전쟁에 임하기에는 역부족이던 차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프로이센 국왕, 재위 1889 ~ 1786) 군의 장군이었다며 대륙 군에 지원한 바론 스토이벤(Baron Frederick von Steuben, 1730 ~ 1794, 프로이센 복무 1744 ~ 1762, 대륙 군 복무 1778 ~ 1783)이라는 전직 프로이센 대위의 능력을 워싱턴 장군이 알아보고 참모로 임용하여 부대와 병사 훈련을 담당하게 하였다. 바론 스토이벤(Baron Frederick von Steuben)은 훈련교범과 복무규정을 작성하고는 프러시아의 기계식 군대 훈련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일부만 가미하여 자유분방한 대륙병사에게 맞는 미국식 훈련 방식을 개발하여 적용함으로써 군대를 민병대 수준에서 정규균 수준으로 혁신시켰던 것이다.
1778년, 조지 로저스 클라크(George Rogers Clark , 1752 ~ 1818, 준장) 장군이 오하이오 강에 있던 영국군의 요새를 점령하고 오하이오 강을 지배하에 두었고, 오하이오 강에서 북쪽 땅의 영유권을 선언했다.
1778년 12월 영국 해군은 세인트루시아 해전(Battle of Saint Lucia, 서인도 제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고 세인트루시아 섬을 점령했다.
1779년 7월 프랑스 해군은 그레나다 해전(Battle of Grenada, 서인도 제도)에서 영국 해군에 승리하면서 전세는 프랑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어서 1780년 8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서인도 제도로 향하던 52척의 영국 상선과 5척의 동인도 회사 소속 함선 및 수많은 물자와 수백 명의 선원들을 포획해 영국의 해상 무역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프랑스 등의 참전으로 미국이 전쟁에 유리해졌지만 좀처럼 끝을 맺지 못하였다.
사라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 1777, 뉴욕 사라토가) 패배로 물러난 윌리엄 하우 소장의 뒤를 이어 뉴욕의 영국군 총사령관이 된 헨리 클린턴 소장(Henry Clinton, 1730 ~ 1795)은 프랑스 등이 참전함에 따라 대륙 군에 승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점령했던 필라델피아를 포기하고 퇴각하여 뉴욕을 요새화(要塞化)하여 머물렀으며 대륙 군도 군비 부족과 내분 등으로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지 못해 전쟁은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대륙 군의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1741 ~ 1801) 장군은 독립전쟁 초기에 여러 공을 세웠으나 인정받지 못하였고 영국군의 퇴각으로 수복된 필라델피아의 군정장관으로 재임 중 재정문제로 모함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고는 대륙 군을 배신하여 영국군 준장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새러토가 전투 패배 후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자는 일부 주장도 있었으나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정하고 전쟁의 목적을 '반란의 진압'에서 '미국이 스스로 독립을 포기하거나 미국이 독립을 한다 해도 일부 지역만 독립을 허용하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그래서 영국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프랑스 해군의 공격을 받기 쉬운 뉴욕을 떠나 왕당파(王黨派, royalist)의 지지가 강한 남부로 원정하는 전략을 채택했으나 소수의 왕당파만 호응하였다.
영국군은 남부 일대에서 벌어진 서배너 공방전(Siege of Savannah, 1779, 조지아), 찰스턴 공방전(Siege of Charleston, 1780, 사우스캐롤라이나), 캠던 전투(Battle of Camden, 1780, 사우스캐롤라이나) 등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영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동맹을 맺은 서부의 인디언과도 맞서 싸워 정복해야 했던 것이다. 많은 인디언들은 개척해 들어오는 식민지인보다는 떨어져서 지배하는 영국 편에 서는 것이 자신들에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륙 군은 프랜치 인디언 전쟁으로 영국령이 된 북서부 지역에서도 영국군과 인디언에 맞서 싸웠다.
대륙 군은 뉴욕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의 주력부대를 섬멸해야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었지만 영국군은 요새를 의지하여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1781년 영국군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1st Marquess Cornwallis, 1738 ~ 1805) 장군은 킹스마운틴 전투(Battle Of Kings Mountain, 사우스 캐롤라이나, 1780, 대륙 군과 영국왕 왕당파 민병대 간의 전투)와 카우펜스 전투(Battle Of Cowpens, 사우스캐롤라이나, 1781, 대륙 군 모건 준장, 영국군 배내스터 탈턴 대령)에서 패배하자 요크타운으로 철수하여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프랑스 해군이 체서피크 만 해전(Battle of the Chesapeake, Battle of the Virginia Capes, Battle of the Capes, 1781.9.)에서 영국 해군에 승리함에 따라 탈출이 불가능하였고 이어서 벌어진 프랑스-미국 연합군과의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 버지니아, 1781.10., 워싱턴 장군, 프랑스 로샹보 장군 Rochambeau)에서 항복하였다.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 버지니아, 1781)가 미국 독립 전쟁을 사실상 종결시킨 결정적 전투였다. 그러나 그 이후 전투는 더 맹렬해져 사상자 수가 급증하였다.
대륙회의는 법을 제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최되었으므로 명백한 법적 권한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2차 대륙회의(第二次 大陸會議, secound Continental Congress, 1776년 United States of America로 개칭, 1775 ~1781)에서 13개 식민지의 상호 우호 동맹을 정한 약관으로 미국 연방 헌법 비준 이전의 헌장인 연합규약(연합과 영속적 연방에 관한 규약, Articles of Confederation and Perpetual Union)을 1777년 발의하여 통과시켰으며 1781년 3월에 13개주가 모두 이를 승인함에 따라 연합규약에 근거하여 미국의 합법적인 대표권을 갖는 연합 회의(미국 소집회의, Congress of the Confederation, United States in Congress Assembled, 1781 ~ 1789)가 결성되었다.
연합 회의는 미국 13개 식민지 각 의회에서 임명한 대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제2차 대륙 회의의 후속 기관이다.
1782년, 켄터키 민병대는 미국 독립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블루릭스 전투(Battle of Blue Licks, 1782. 8. 켄터키)’에서 영국군 정찰대와 인디언 전사들의 매복 공격에 전멸했으나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에 영국군과 인디언 전사들은 물러갔다.
1782년 영국 의회는 아메리카에서의 모든 작전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지만 해외에서 전쟁은 이어져 영국 해군이 해전에서 프랑스군에 승리하기도 하였지만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지브롤터를 포위하여 수송을 막았던 것이다.
미국은 이렇게 약 8년간에 걸친 영국과의 독립 전쟁 끝에 1783년 9월 3일 전쟁에 지친 영국과 파리 조약을 맺고 독립하였으며 '파리 조약'에서 13주 외에 북서부도 미국 영토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전쟁에 승리해 프랑스의 자존심을 세웠고 그 후 미국과 무역으로 일부 혜택은 있었지만 전부터 부채가 심했던 데다가 많은 미국 독립전쟁비용으로 제정이 더욱 악화되었으며 이를 증세하여 충당하려다가 대혁명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을 반대했던 미국의 왕당파(Loyalist)는 재산 몰수 등으로 미국에서는 살 수 없어 5만 명 정도는 캐나다로 이주했다.
미국이 독립할 때 영토는 13개 주와 영국이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 7년 전쟁, 1763)에서 이겨 프랑스로부터 양도받았던 미시시피 강 동부 지역의 루이지애나도 대륙 군이 점령하여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런데 새로 얻은 루이지애나 지역에 접한 주들은 루이지애나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주들은 불만이었으므로 새로 얻은 루이지애나 지역(미국 서부)을 아메리카 인 전체에 속하는 공유지(public land)로 규정하였다.
1784년에 연합 회의(연합 의회, 미국 소집회의, Congress of the Confederation, United States in Congress Assembled, 1781 ~ 1789)에서 제퍼슨이 기초한 영토법(Ordinance of 1784)을 통과시켜 새로 획득한 영토에 기존의 주들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주를 창설고 노예제는 인정하지 않았다.
1875년 연합 회의(연합 의회)에서 영토법(Ordinance of 1784) 후속법으로 공유지 조례(Land Ordinance of 1785, 1785)가 재정되어  루이지애나의 공유지를 개인에게 불하(拂下)할 기준을 규정하였는데 마을(township) 단위를 36평방마일로 하고 1평방마일(640에이커, 약 78만 평)을 1구역(section)으로 정하여 개인에게 1구역(section) 단위로 불하하도록 규정하였다. 1에이커(1224평)에 대한 공개 입찰의 최저 불하 가격이 1달러였으므로 일반 정착민에게는 640달러라는 불하 금액이 과도하여 토지 불하는 투기세력의 차지가 되었다.
1787년 연합회의(연합의회, 미국 소집회의, Congress of the Confederation, United States in Congress Assembled, 1781 ~ 1789)에서 북서영토법(Northwest Ordinance)을 제정하여 새 준주(territory)와 주(state)의 설치에 관한 규정을 하였다. 먼저 새 준주(territory)의 예정지를 의회가 승인을 해야하고 의회가 해당 지역에 지사(governor)와 실무책임자인 행정관(secretary) 및 법적 문제를 처리할 3명의 판사(judge)를 임명하여 파견하며 성인 남성 주민의 수가 5,000명을 넘어서면 준주(territory)로 승격되었다. 준주는 준주 의회를 구성하고 연합 의회에 대표를 파견할 수 있었지만 연합 의회에서 투표할 권리는 없었다. 그리고 준주(territory)의 성인 남성 인구가 60,000명을 넘어서면 새 주(state)로 승격될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국호는 1776년에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으로 정하였으며 미국 헌법은 1787년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제정되었다.
이렇게 늦게 연방 헌법이 제정된 것은 필라델피아 대표들 중에는 독립 후 주 자치권 강화를 선호하여 연방정부가 강해지는 것을 꺼리고 왕국과 같이 독재국가가 되는 것을 염려하는 반연방주의자(Anti - fe⁶deralists, 공화주의자, republican, 제퍼슨, 패트릭 헨리, 리처드 핸리 리, 조지 클린턴 등)들과 외부로부터 침략을 방어하고 내전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주 연합이 아닌 강력한 중앙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연방주의자(Federalists, 워싱톤, 존 에덤스,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 등) 간에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 ~ 1836, 4대 대통령, the Father of the Constitution, 헌법의 아버지)이 초안한 연방 헌법을 두고 연합 회의(미국 소집회의, Congress of the Confederation, United States in Congress Assembled,  1781 ~ 1789)에서 4년간 치열한 논쟁을 거치는 동안 초기에는 반연방주의의 지지세력이 강하였으나 반란 등으로 국가가 혼란해지자 연방주의로 기울어져 일부 수정하여 대통령제를 채택한 연방헌법이 1787년에 제정되어 1789년 3월 4일부터 공식적으로 발효되었다.
1789년 미국 연방 정부(US federal government, US government, 1789), 연합 회의 후속의 합중국의회(United States Congress, 연방의회, 1789), 연방 법원(연방 사법부, Federal judiciary of the United States, 1789)을 설립하여 삼권분립(三權分立, trias politica, three branches of government)이 되었다.
미국은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로 인류사 최초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 ~ 1799, 독립군 총사령관, 초대 대통령 1789 ~ 1797)을 1789년 투표로 선출하였다.
그때 대통령의 3선 제한은 없었지만 조지 워싱턴은 재선 후 불출마를 선언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마. 인디언 전쟁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었으므로 인디언들의 신앙과 문화를 사탄의 문화로 간주하여 말살시켰다.
이주한 백인들이 늘어나자 이들은 인디언들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했다. 이에 인디언들이 폭력투쟁으로 저항하자 백인들은 인디언 마을을 불태우고, 여자와 어린이까지 학살하였다.
초기에 영국인들이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여 식민지가 점점 팽창해지자 원주민인 인디언 부족과의 갈등이 커져갔다.
식민지인들은 코네티컷 강 계곡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토지의 소유자였던 피쿼트 부족(Pequot)과 1634 ~ 1638년 동안 피쿼트 전쟁(Pequot War)을 하였다.
식민지인들이 1637년 4월 피쿼트 족 마을을 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피쿼트 족 전사들은 웨더스필드 타운(Town of Wethersfield)을 공격하여 30명의 식민지 개척자를 죽였으며 그러자 식민지인들은 피쿼트 족의 마을을 습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었고, 300명의 피쿼트 족을 죽여 거의 멸족시켰다.
피쿼트 전쟁 후 뉴잉글랜드의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코네티컷 식민지, 뉴헤이븐 식민지와 플리머스 식민지는 뉴잉글랜드 식민지 연합이라는 방위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1675년부터 1678년까지 4년 동안 인디언 부족인 왐파노아그 부족과 필그림 파더스 간에 토지 갈등을 둘러싼 필립왕 전쟁(King Philip's War, First Indian War, Great Narragansett War,  Metacom's Rebellion, 1675 ~ 1678)이 일어났다.
식민지인들이 합의했던 경계를 넘어서 들어오자 왐파노아그 부족장
메타코멧(Metacomet, 별명 필립왕)은 분노하여 식민지인들의 농장을 약탈했으며 이에 식민지 민병대는 왐파노아그 부족과 분쟁이 있었던 모호크족(Mohawk People)의 전사들과 합세하여 대항했으나 필립왕이 인디언 특유의 게릴라전을 전개함에 따라 필립왕을 토벌할 수 없었다. 인디언들은 자기들도 후에 민병대와 적이 되어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민병대에 게릴라 전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병대는 모히간족(Mohican)과 동맹을 맺고 필립왕을 토벌하였으며 전쟁결과 왐파노아그 부족은 60 ~ 80%에 해당하는 6천명이 죽고 겨우 4백명만이 살아남았으며 식민지인도 8%에 해당하는 600명 가량이 죽었다.
필립왕 전쟁 이후에도 인디언의 저항은 계속되었으나 소규모였으며 별로 성과를 얻지도 못했다.
현재 미국의 인디언 부족의 수는 565 부족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부족이 미국남서부의 나바호 부족(Navajo)이다.
초기 이주민은 북동부에 거주하고 있던 알곤킨족(Algonquian)과 이로키족(Iroquois) 등과 접촉하여 도움을 받고 갈등하여 전투를 벌였다.
알곤킨족(Algonquian)은 이누족(Innu), 미크마크족(Mi'kmaq), 아베나키족(Abenaki), 캐롤라이나 알곤킨족(Carolina Algonquin) 등으로 북쪽에서 남쪽까지 다양한 부족이 있으며 대부분이 캐나다 지역에 거주한다.
이들 부족들은 1754년에 시작된 프렌치 인디언 전쟁 때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 편에 가담하였다.
이로키족(Iroquois)은 이로키 연맹(Iroquois Confederacy)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이로키 연맹(Iroquois Confederacy)은 육족 연합(Six Nations)으로 모호크족(Mohawk), 오논다가족(Onondaga), 오네이다족(Oneida), 카유가족(Cayuga), 세네카족(Seneca)의 오족연합이 결성된 후에  투스카로라족(Tuscarora)이 가담하였다.
부족을 크게 보면은 서스케한녹족(Susquehannock), 휴런족(Huron, 와이언도트족 Wyandot people, 웬다트족Wendat, 와이언도트 언어 사용), 이리족(Erie people), Neutral people(Neutral Confederacy 중립 연맹, 이로키족의 부족 연맹), 체로키족(Cherokee pelopl) 등도 이로키 족이다.
이로키 부족(Iroquois)은 1754년에 시작된 프렌치 인디언 전쟁 때에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1775년에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많은 인디언들이 미국의 독립군과 영국군에 가담했다.
이로키부족 연맹( Iroquois Confederacy)의 부족 중에  오네이다 족(Oneida)과 투스카로라 족(Tuscarora)은 미국인 편을 들었고 모호크족(Mohawk), 오논다가족(Onondaga), 카유가족(Cayuga), 세네카족(Seneca)은 영국펀에 가담했다.
그리고 미국이 독립된 후에는 여러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내가 혼란하였으며 이에 인디언들이 반란에 가담할 것을 두려워하여 인디언 말살 정책을 폈다.
앤드루 루이스(Andrew Lewis, 1720 ~ 1781, 군 장교 및 정치가)와 토마스 루이스(Thomas Lewis, 1718 ~ 1790, 변호사, 서부 버지니아 개척자, 하원의원)가 1778년 델라웨어에서 델라웨어 인디언족과 ‘델라웨어 조약(Treaty with the Delawares, Treaty of Fort Pitt, 1778)’을 처음 체결한 이후 미국은 인디언들에게 무력을 배경으로 영토를 구입하고, 그들을 보호구역(Reservation)으로 몰아넣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인디언은 토지 구매라는 개념이 없어 백인의 토지 구매 행위는 백인들이 그들에게 선물을 하고 여기에 같이 살게 해 달라는 청탁으로 생각했다. 백인이 생각하는 토지 구매는 이 땅에서 인디언들이 나가 라는 의미였으므로 인디언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디언들은 공동체 생활이었으므로 토지를 사고파는 문화 관습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인들은 인디언 추장을 인디언 부족의 대표나 부족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디언 사회에서 추장(Chief)은 실제로는 중재자, 촉진자 또는 봉사자였으며 한 명의 개인이 권력을 가지는 상명하복 체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백인들은 인디언 전쟁을 하면서, 추장을 협상의 상대 책임자로 간주했다. 추장이 서명으로 X표를 하게 하고 (인디언은 문자가 없었다) 이를 부족 전체가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인디언 전사들은 부족 전체의 합의를 거치지 않은 총의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추장의 서명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하였으나 인디언의 영토는 점점 축소되었다.
1803년부터 1848년까지는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라고 불린다. 이때 백인들이 서부로 이동하여 주로 담배를 재배했으므로 많은 토지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인디언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1830년에 제정된 인디언 이주 법(Indian Removal Act, 1830, 대통령 앤드루 잭슨)에 의해 미국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10만 명의 인디언들을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이주시키고 토지를 빼앗았다.
특히 조지아주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그곳에 살던 인디언 체로키 부족의 토지를 몰수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미시시피 강 서쪽 오클라호마 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1만 5천 명에 이르는 인디언들이 이동 도중에 대부분 죽고 1천5백 명 정도만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걸어서 간 길을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불렀다.
미국이 스페인과 제1차 세미놀 전쟁 (The First Seminole War, 1817 ~ 1818)결과 아담스-오니스 조약(Adams-Onis Treaty, 1819)을 맺어 플로이다 주를 합병한 후 플로이다 주에서는 백인이 증가함에 따라 백인들은 플로리다의 세미놀족이 차지하고 있는 넓은 평원을 차지하기 위해 세미놀족 인디언들을 이주시키라고 연방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이에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제7대 대통령, 재임 1829 ~ 1837) 대통령은 인디언 세미놀족을 이주시키기로 했다.
1832년, 미국 정부는 여러 명의 세미놀족 추장과 페인즈 랜딩 조약(Treaty of Payne's Landing, 1832)을 체결하여 인디언들이 플로리다주를 떠나 미시시피 강 서쪽에 마련된 인디언 보호지역으로 이동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세미놀족은 이주하지 않고 세미놀 지도자 오세올라(Osceola, 1804 ~ 1838)을 중심으로 저항했다.
1835년 미국 육군이 랜딩 조약을 집행하자 제2차 세미놀전쟁(The Second Seminole Wars, 1835 ∼ 1842)이 일어났다.
세미놀족 인디언은 1,400명이 전사로 참여하였으나 1838년 오세올라는 붙잡혀 옥에서 참수 되었고 미육군에 패하여 많은 인디언들은 미시시피 강 서쪽의 인디언 보호구역(오클라호마)인 크리크족(Creek)의 땅으로 추방되었으며, 일부 인디언들은 에버글래이즈(Everglades, 플로리다주)로 후퇴하였다.
이 전쟁에 미군 병사 2,000명이 전사했다.
이 후 미국 정부는 플로리다에 남아 있던 세미놀 인디언들을 완전히 이주시키기 위해 제3차 세미놀 전쟁(The Third Seminole War, 1855 ~ 1858)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는 유혈사태는 없이 정부가 남아있던 인디언들에게 이주 비용을 지불하여 이주시킴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이 외에도 세 차례에 걸친 인디언 학살(약 300만 명 학살, 어린이와 여성 포함), 인디언들의 식량인 버펄로(들소)를 50년 동안 4천만 마리를 학살하여 인디언들을 굶어 죽게 만드는 등 인디언 말살 정책을 통하여 그들의 토지를 강탈하였다.
아파치 족(Apache)은 미국 남서부 기원의 치리카와 족(Chiricahua), 히카리야 족(Jicarilla), 리판 족(Lipan), 메스칼레로 족(Mescalero), 평원 아파치 족(Plains Apache), 서부 아파치 족(Western Apache) 등의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말하며 각 부족은 언어가 다르다.
미국과 아파치 족은 수많은 전쟁을 하였다.
1847년 미국-멕시코 전쟁 중에 미국이 뉴멕시코 북부를 점령하자 이에 반대하여 히스패닉과 푸에블로 인디언(Pueblo Indian)들이 일으킨 타오스 반란(Taos Revolt)이 일어나 40여 년간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남북전쟁 기간 중에도 북부와 남부동맹 모두 아파치 족과 전투를 계속하였다.

바. 미국의 영토 확장

1) 미국 독립선언 때와 독립 때의 영토

영국이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승리로 1763년 프랑스로부터 애팔래치아 산맥 넘어 미시시피강 동쪽에 위치한 루이지애나를 할양받았지만 미국 식민지인의 이주를 막아 1776년 독립선언을 할 때 미국 식민지인이 살고 있는 영토는 대서양 연안 13개 주(Original 13 American colonies: Delaware, Pennsylvania, New Jersey, Georgia, Connecticut, Massachusetts, Maryland, South Carolina, New Hampshire, Virginia, New York, North Carolina, Rhode Island)에 불과했다.
1783년 독립전쟁 승리 후엔 오대호에서 애팔래치아 산맥 넘어 미시시피강까지(미시시피강 동쪽의 루이지애나)를 대륙 군이 점령하였으므로 '파리조약(1783)'에서 인정받아 영국으로부터 넘겨받았다.

* 미시시피강 동쪽 루이지애나(Louisiana)

  7년 전쟁(1756 ~ 1763, 영국, 프로이센,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 동맹,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스페인, 헝가리, 스웨덴 등 동맹)의 일환으로 복미에서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스페인이 동맹국으로 참전) 간의 프렌치-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 1754 ~ 1763)에서 1763년 프랑스는 영국에 패하여 북미의 식민지를 모두 잃었다.
1762년 프랑스는 스페인이 그 동안 루이지애나의 영유권을 주장해 왔고 스페인이 영국에게 폴로리다를 넘겨준 대가로 동맹국인 스페인과 은밀히 퐁테인블로 조약(Treaty of Fontainebleau, 1762)을 맺고 뉴올리언스와 미시시피 강 서부의 루이지애나 지역(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네바다주, 유타주, 빌링스, 캐스퍼, 시애틀, 애리조나주, 미니애폴리스, 덴버, 캔자스시티, 세인트루이스, 배턴루지, 댈러스 등 미시시피강 서부에 있는 모든 지역)을 스페인에게 넘겨 주었으며 1763년의 파리 조약(Treaty of Paris, 1763)의 결과로 캐나다(퀘벡)와 미시시피강 동쪽의 루이지애나 지역은 영국에 할양하였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스페인은 프랑스 편을 들었다. 1762년 영국군은 스페인령인 쿠바의 아바나를 점령하였다. 1763년 영국은 스페인에게서 마닐라와 아바나를 반환하는 대신 플로리다를 획득했다(미국 독립전쟁 중 스페인이 참전하여 영국과 전쟁을 치러 다시 점령함).
미국 식민지인들은 영토를 넓혀 목장 등으로 이용하기를 원해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영국과 함께 참가하였으며 그래서 전쟁 후 루이지애나 지역을 자기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원했으나 영국은 인디언들과 분쟁 등으로 관리가 어려워 미국 식민지인들에게 주지 않고 1774년 영국 의회는 '퀘벡법(Quebec Act)'을 통과시켜, 북서부 루이지애나(미시시피강 동쪽,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를 퀘벡 식민지에 편입시켰다.

2) 루지애나(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 Louisiana Purchase) 매입

미시시피강은 미국의 내륙 개발과 교통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미시시피강은 넓은 미국에 물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전 국토를 강으로 연결하는 물류 중심의 운하였으므로 미국의 개발과 발전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7년 전쟁(프랜치인디언 전쟁, French-Indian War, 1754 ~ 1763)에 패하자 그동안 영유권을 주장해 온 동맹국인 스페인과 1762년 은밀히 퐁테인블로 조약(Treaty of Fontainebleau, 1762)을 맺고 뉴올리언스와 미시시피 강 서부의 모든 영토를 스페인에게 주었으며 1763년의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을 맺고 캐나다(퀘벡)와 미시시피강 동쪽의 루이지애나 지역을 영국에 할양하였다.
그래서 미국은 국경지역인 미시시피 강의 사용권에 대해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차지하고 있던 스페인과 1795년 핀크니 조약(Pinckney's Treaty, 1795)을 체결하여 미시시피 강에서의 자유로운 항행과 그 하구에 위치한 뉴올리언스(New Orleans) 항구의 자유로운 이용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집정정부(통령정부, Consulat)로 집권한 나플레옹은 1800년 지배하에 있는 스페인을 압박하여 스페인과 산 일데폰소 비밀 조약(secret Treaty of San Ildefonso, 1800)을 체결해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역(Toscana, 주도 피렌체)을 내주고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 지역을 차지하였다.
나플레옹은 신대륙의 루이지애나에 제국을 건설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카리브해 연안의 자국 식민지 산토도밍고(Saint Domingue, 지금의 아이티)에서 일어난 아이티 혁명(Haitian Revolution, 1791 ~ 1804)을 진압하기 위해 매제(妹弟)인 샤를 르클레르크(Charles Victoire Emmanuel Leclerc, 1772 ~ 1802)를 사령관으로 하는 2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아이티 반란을 진압하고 이어서 루이지애나로 진출할 계획이었으나 아이티에서 황열병과 주민들의 게릴라 전술에 대부분의 병사를 잃었고 사령관 샤를 르클레르크도 황열병으로 죽었다.
나폴레옹은 이 원정에 많은 전비를 사용하여 돈이 절실히 필요하였고 또 캐나다의 영국군이 루이지애나를 침공할 위험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대국으로 성장하는 미국과 충돌할 위험이 있어 루이지애나 제국 건설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 넘겨주고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미국의 3대 대통령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 ~ 1826, 제3대 대통령, 1801 ~ 1809)은 프랑스의 나플레옹이 루지애나를 지배함에 따라 미시시피강 수로 사용에 어려움을 예상하고 뉴올리언스 항구(미시시피강 수로의 요충지)를 미국에 팔 것을 프랑스에 제안하고 제안에 응하지 않으면 영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에 대항하겠다고 생각했다(토머스 페인이 프랑스가 돈이 궁한 것을 알고 제퍼슨에게 구입하도록 조언했다고도 함).
그때까지 미국 쪽에 가담하여 미국에 도움을 주었던 프랑스가 미국 영토를 압박해 들어오고 미시시피강 수로 확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프랑스와 대적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나플레옹은 루이지애나 문제에 영국이 개입되는 것을 피하고 곧 닥쳐올 영국과의 전쟁을 위하여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필요가 있어 별 이득이 없는 루이지애나 전체를 미국이 구입할 것을 역으로 제안하였다.
이에 프랑스의 침략을 걱정하던 3대 대통령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 ~ 1826, 제3대 대통령, 1801 ~ 1809)은 영토를 확장할 권한이 대통령에게 없었지만 의회의 비준도 받지 않고 매매계약서에 사인부터 하였다.
1803년 제퍼슨 행정부는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지만 의회의 승인을 받아 프랑스의 나플레옹 정부에 1,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였다. 루이지애나는 단지 주 하나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미시시피강 서쪽의 미국 남쪽과 북쪽에 이르는 대부분의 주(15개 주에 걸침)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뉴올리언스 항구를 포함해서 214만 평방킬로미터(미국 영토가 2배로 확장됨)에 달하는 영토였다. 이때에 루이지애나 서쪽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도 모르는 상태였으며 루이지애나가 얼마나 넓은지도 모르고 팔았으며 구입(1803) 한 것이었다.
이 광대한 영토의 비옥한 토지는 이후 미국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3) 북서부 탐험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지애나를 매입(1803) 한 후 경계를 조사하고 내륙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서쪽으로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 당시 지금의 서부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애팔래치아(Appalachia) 산맥 넘어 루이지애나 지역(미시시피강 동쪽, 현재는 중서부라 함)을 서부라고 했었다.
1804년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 1774 ~ 1809)와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1770 ~ 1838)가 이끄는 원정대는 미주리강을 거슬러 오르며 서쪽으로 출발하여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마침내 태평양까지 닿았다.
그리고 1806년 2년 4개월에 걸쳐 8000마일에 달하는 대장정을 끝내고 탐험대는 돌아왔다.
탐험대에 의한 미시시피 강 너머 서부 세계에 대한 정보와 지식은 서부 개척의 초석이 되었다. 이들의 탐험은 이뿐만 아니라 훗날 미국이 북서부인 로키 산맥 너머 오리건 지역을 처음 탐험한 근거가 되어 미국이 이들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4) 1812년 미국과 영국 전쟁(캐나다와 영토 전쟁, War of 1812, 미영 전쟁 美英戰爭, 1812 ~ 1815)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인 북쪽의 영국령 북아메리카(British North America; BNA, 현재의 캐나다)와의 합병을 원했다.
1812년 6월, 미국이 캐나다에 주둔한 영국군을 공격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때 영국은 프랑스와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1797 ∼ 1815) 중에 프랑스를 봉쇄하고 있었는데 영국군 탈영병을 조사한다면서 미국 상선을 나포해 가고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미국 상선의 선원들을 영국군 탈영병이라 우기고 강제로 징집해 갔으며(더욱이 영국은 영국에서 출생한 사람은 모두 영국인이므로 징집대상이라고 주장했으며 미국인 중에 영국 국적인 사람이 많았음) 상선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중립을 취하는 미국의 통상을 방해하여 국익에 손실을 입히는 등으로 미국이 독립전쟁에 도움을 받았던 프랑스에 도움을 주지 못하게 위협하였다.
그리고 영국은 미국 서부의 인디언들에게 무기를 지원하여 미국의 서부 개척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이에 제4대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 ~ 1826, 재임 1809 ~ 1817) 대통령은 이를 주권 침해로 간주하여 군대도 1만2천 명 밖에 없고 전쟁에 대한 국론이 분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미국과 전쟁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의회의 승인을 얻어 대영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던 것이다.
1812년 6월 미국 윌리엄 헐 장군이 캐나다로 이주한 미국인들이 미국편에 서서 협력해 줄 것을 기대하고 1,000명 정도의 민병대로 캐나다로 진격하여 샌드위치 타운을 점령했으나 곧 후퇴하여 디트로이트에서 영국 정규군과 캐나다 민병대 그리고 인디언들에게 포위되어 항복을 했다.
이후 미국은 영국 해군의 총공격으로 해상이 봉쇄되어 무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테쿰세 연맹(Tecumseh's Confederacy)을 조직해 미국의 서부 진출을 방해하고 있던 인디언들이 영국군의 무기를 공급받아 강력하게 대항하자 미군은 이들을 1813년에 완전히 해체시켰다.
그리고 1814년 8월 체사피크만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해군이 워싱턴을 공격해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이 불타고 메디슨 대통령이 메릴랜드 주로 피난하는 등 워싱턴이 쑥대밭이 되었으며 디트로이트를 빼앗기는 등 미국 육군은 고전했으나 미국 해군은 서인도 제도 등에서 영국 해군은 쓸모없다고 페기한 몇척의 중프리깃함으로 영국 상선 1,300여척을 격침시키거나 나포하여 영국에 경제적 손실을 입혔다.
전쟁은 전선을 형성하여 밀고 밀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여기 저기 침입하여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영국의 육군과 해군은 미군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였으나 미군의 게릴라 전에 점령했던 지역도 지배하지 못하고 곧 철수해야했다.
처음에는 영국과 캐나다가 승리하였으나 미국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볼티모어 전투(Battle of Baltimore, 1814)에서는 영국군 사령관 로버트 로스(Robert Ross, 1766 ~ 1814)가 전사했고, 미군은 볼티모어의 맥헨리 요새(Fort McHenry)를 끝까지 방어하였다.
그리고 영국이 프랑스와의 오랜 나폴렝옹 전쟁을 하는 동안 영국민은 전쟁에 필요한 많은 세금을 부담하여 불만이 높았으므로 미국과의 전쟁에는 영국군이 전력을 다 할 수 없어 캐나다인과 인디언들이 주로 참전했다.
그 결과 전쟁은 교착상태가 되어 협상이 시작되고 양국은 별 이득없이 전쟁 전 상태로 원상 복귀하자는 겐트 조약(Treaty of Ghent, 헨트 조약, 1814, 벨기에)을 맺고 1815년에 전쟁을 종료했다.
미국은 이 전쟁으로 큰 자부심이 생겼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국론은 통일되고 단합되었으며 애국심이 고양되었던 것이다. 미국 국가의 가사도 이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캐나다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영국군보다 자신들의 군대가 주로 싸워 승리하였으므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5)  중부의 북쪽 경계지역 매입(1818년 조약)

1818년 미국과 영국 사이에 1818년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에서 미국과 캐나다는 북위 49도를 중부의 국경선으로 결정했다.
중부지역의 북위 49도 북쪽의 미국 영토(현 몬타나 북부, 1889년 주 가입)는 캐나다에 넘기고 북위 49도 남쪽의 캐나다 영토였던 노스다코타 주 대부분(1889년 주 가입), 사우스다코타 주(1889년 주 가입) 일부, 미네소타 주(1858년 주 가입) 북서부를 미국이 캐나다로부터 매입하였다.

6) 플로리다 매입(애덤스-오니스 조약)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 스페인 정복자)출신의 푸에르토리코 총독이었던 후안 폰세 데 레온(Juan Ponce de León, 1474 ~ 1521)이 1513년에 지금의 마이애미를 발견하여 'Pascua Florida(꽃의 축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폴로리다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은 점점 쇠퇴했다.
스페인은 7년 전쟁(1756 ~ 1763)에서 프랑스 쪽에 가담하였으며 1762년 영국에 쿠바 아바나, 필리핀 마닐라 등을 점령당했다.
스페인은 7년 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다음 파리 조약(Treaty of Paris, 1763)으로 쿠바 아바나와 필리핀 마닐라 등을 돌려받는 대가로 플로리다 전체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스페인은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1781년 영국과의 전투에 승리하여 서부 플로리다를 되찾았으며 1783년 전 플로리다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이 독립된 후 조지아 주 노예들이 정기적으로 스페인령 플로리다로 도망치자 노예 소유자들이 국경을 넘어 플로리다의 노예를 자주 습격하였다.
국경의 접전이 이어지자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제7대 대통령, 재임 1829 ~ 1837)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은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세미놀(Seminole)족 인디언들이 조지아주를 약탈하므로 인디언들의 조지아 약탈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제1차 세미놀 전쟁(The first Seminole Wars, 플로리다 전쟁 Florida Wars, 1817 ~ 1818)을 일으켜 플로리다로 침범해 들어갔다.
미군의 압박에 스페인은 1819년에 미국과 애덤스-오니스 조약(Adams - Onis Treaty, 1819, Transcontinental Treaty of 1819 대륙횡단 조약 1819, Florida Purchase Treaty 플로리다 구매 조약)을 미국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5대 대통령, 재임 1817 ~ 1825) 대통령의 국무 장관인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6대 대통령, 재임 1825 ~ 1829)와 스페인 페르난도 7세(Ferdinand VII, 재위 1808, 1813 ~ 1833)의 외무 장관 루이스 데 오니스(Luis de Onís y González-Vara) 사이에 맺었다.
이 조약은 Florida 전부와 Louisiana, Mississippi, Colorado, Alabama의 일부를 500만 달러에 미국이 매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조약으로 스페인은 텍사스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고 오리건 지역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그 결과 미국 남서부의 국경이 텍사스의 새바인 강(Sabine river)의 위쪽으로 해서 록키산맥과 태평양까지 북위 42도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스페인은 이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821년 코르도바 조약(Treaty of Córdoba)으로 독립한 멕시코가 미국과 제한 조약(Treaty of Limits between Mexico and the United States, 1828)을 맺어 애덤스-오니스 조약을 인정했다.

7) 메인주(State of Maine)와  뉴브런즈윅주(New Brunswick) 사이의 국경 확정

미국 동부의 북쪽 가장 끝에 있는 메인 주와 캐나다 사이의 경계가 미국과 영국이 1842년 웹스터-애쉬버튼 조약(Webster - Ashburton Treaty, 1842)을 맺어 미국의 메인주(State of Maine)와
캐나다의 뉴브런즈윅주(New Brunswick) 사이의 국경을 확정했다.

8) 미국 북서부 지역(워싱턴주, 오리건주, 아이다호) 확장

알래스카 남쪽에서 미국 서부(북위 42도)에 이르는 지역은 러시아, 스페인, 미국 , 프랑스, 영국의 다섯 나라가 각 국의 탐험을 근거로 일정 부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7년 전쟁의 패배로 영유권을 잃어버렸다.
그러던 중 1800년 경 스페인과 러시아는 북위 54도를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스페인령으로 하였지만 미국과 영국은 이 경계에 동의하지 않았다.
1818년 미국과 영국은 오리건 지역에서 두 나라 공동으로 교역과 정착을 하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819년 영국과 미국이 1818년 조약에 의해 공동으로 점유하고 있던 오리건(아이다호에서 알래스카 국경까지)에 대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함에 따라 오리건 국경 분쟁이 발생하였다.
미국은 1819년 스페인과의 애덤스-오니스 조약(Adams - Onis Treaty, 1819)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북위 42도 이북의 모든 영유권을 넘겨받았으며 1804년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 1774 ~ 1809)와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1770 ~ 1838)가 이끄는 원정대가 처음으로 북서부를 탐험했으므로 영유권을 주장했다.
러시아는 1824년 미국과 조약, 1825년 영국과의 조약(알래스카와 캐나다 국경 확정)으로 오리건 지역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였다.
1846년 영국과 미국은 오리건 조약(Oregon Treaty, 1846)을 맺어 이를 해결했다. 이때 미국은 멕시코와 전쟁 중이어서 영국 요구에 맞추어 협상을 진척시켰다.
미국은 영국에게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넘겨주는 대신 아이다호, 오리건, 워싱턴주 전 지역과 와이오밍과 몬태나 일부 지역을 미국 영토로 확정하여 오늘날의 미국 북서부를 통치하게 된다. 오리건 조약은 북미의 미국과 영국의 경계를 밴쿠버 섬을 제외하고 북위 49도선에 평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태평양의 산후안 열도(San Juan Islands, 벤쿠버 섬과 워싱턴 주 사이)의 영유권 문제로 계속 분쟁이 일어났으며 1871년 워싱턴 조약(treaty of Washington, 1871, 독립전쟁 중 앨라배마 사건 해결, 산후안 영유권)에 이어 1872년에 해결되었다.

9) 텍사스 합병

1519년 자메이카의 스페인 총독은 플로리다에서부터 멕시코까지 걸프 해안을 탐험하는 데 알론소 알바레스 데 피네다(Alonso Alvarez de Pineda)를 보냈으며 피네다는 텍사스를 최초로 탐험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 스페인(에스파냐)인이 텍사스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1680년 프랑스 탐험가 르네 로베르 카벨리에 드 라 살(Rene-Robert Cavelier de La Salle, 1643 ~ 1687)은 일리노이 지역에 크레브쿠외르 요새(Fort Crevecouer)를  건설했다.
프랑스의 라 살은 1682년 미시시피 강에서 진출하여 멕시코만에 도달하였다.
  1685년 프랑스 라 살이 미시시피 강의 입구의 마타고르다 만(Matagorda Bay) 근처에서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나 원주민의 공격으로 곧 어려움에 직면했다.
  프랑스 탐험대가 텍사스에 들어오자 스페인은 탐험을 계속하고 수도사들은 선교사 양성소를 설치하고 정착민의 수를 늘렸다. 1691년에 텍사스는 스페인(에스파냐) 령이 되었다.
스페인의 멕시코 식민지 정부는 텍사스의 땅을 개척하기 위해 미국인을 불러들여 개인에게 식민지 땅을 나누어 주었다.
18세기 초에는 미국 서부 개척자들이 미국 내에 개척할 땅이 없어지자 불법으로 텍사스로 몰려오는 이민자 수가 점점 늘어갔다. 미국 이민자들은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고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극한 상황에 몰린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납광산업자이며 미주리주 하원 의원을 지낸 모지스 오스틴((Moses Austin, 1761 ~ 1821)이 텍사스를 여행하던 중 여기서 사업을 하기로 하고 정부로부터 공유지를 불하받아 정착민에게 나누어 주는 사업자로 변신하여 정부로부터 땅을 불하받았으나 정착민을 데려오기 전에 죽었다. 그의 아들인 스티븐 오스틴(Stephen Austin, 1793 ~ 1836, 미주리 지역 대의원)이 1821년 미국에서 이주해 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미국에 이주민 모집을 널리 공표하여 이주민을 모집하는 데 성공하였다.
1810년 멕시코 부왕령(副王領, Viceroyalty)에서  이달고(Miguel Hidalgo y Costilla, 미구엘이달고 이 코스띠야, 1753 ~ 1811, 독립의 아버지) 신부가 독립운동을 시작하였으며 그 후 스페인 원정군인으로 멕시코에 들어와 독립운동을 무참히 진압했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in de Iturbide, 1783 ~ 1824)가 스페인에 반기를 들어 군사를 동원하여 멕시코 부왕(총독)을 위협하여 멕시코 부왕(총독)과  코르도바 조약(Treaty of Córdoba, 1821. 8.)을 체결하고 독립하였다.
1822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in de Iturbide, 1783~1824)는 스스로 아구스틴 1세(Agustín I, 재위 1822~ 1823)로 황제에 등극했으나 군부의 반란으로  총살당해 1823년에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되었으며 내전이 일어났다.
이후 멕시코에서는 군부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정부가 불안정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 정부는 엠프레사리오(Empresario, 정부로부터 공유지를 불하받아 정착민에게 나누어 주는 사업자)에게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 승인된 이주민 땅을 다시 승인받게 했다.
엠프레사리오(Empresario, 정부로부터 공유지를 불하받아 정착민에게 나누어 주는 사업자)는 새로운 이주민 영입과 이주민을 통제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엠프레사리오는 정부와의 계약으로 불하 지역의 정착민들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지키게 하였다. 정착민은 스페인의 신민(후 멕시코의 공민)이 될 것을 동의하여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가톨릭 신자가 되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엠프레사리오에 종사하는 사람 수도 늘어나고 이에 따라 이민자 수도 늘었다.
1824년 헌법을 개정하여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킴에 따라 텍사스 주 정부는 권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멕시코 정부는 1824년에 노예제를 폐지했으므로 노예를 고용하여 농장을 운영했던 텍사스 이주민들은 정부에 불만을 표출하였다.
스티븐 오스틴은 텍사스에 노예제가 도입되도록 노력하였으며 텍사스에서는 노예제가 용인되었다가 1829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스티븐 오스틴은 미국의 정착민들에게 텍사스로 이주하도록 설득했고, 1825년까지 오스틴은 최초로 300명의 미국 가족을 텍사스로 데려왔다.
스티븐 오스틴은 이주민과 멕시코 정부 사이의 관계가 좋게 유지되도록 노력하였으며 프레도니아 반란(Fredonian Rebellion, 1826 ~ 1827, 엠프레사리오 하덴 에드워즈가 이끄는 정착민들이 멕시코 텍사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나코그도세스 근처에 프레도니아 공화국을 세움)을 진압하는데 도왔다.
1827년 미국의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은 100만 달러로 텍사스를 매입하려 했지만 거절당했으며 1829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다시 500만 달러를 제시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리고 1829년에 스페인이 다시 멕시코 점령을 시도했으나 멕시코군이 방어하였다.
1830년경에는 합법과 불법으로 들어온 미국 이주민의 수가 점점 늘어 미국 이주민 수가 텍사수 인구의 90%가 되었다.
1830년 멕시코 정부는 법률을 제정하여 엠프레사리오에게 승인하지 않은 이전에 정유한 땅이나 이후의 이주민 개척지를 해제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주민에게 세금 징수를 할 수 있게 하고 더 이상의 텍사스로 이주를 금지했다.
1834년 스티븐 오스틴(Stephen Austin, 1793 ~ 1836, 텍사스 공화국의 4대 국무장관)이 멕시코 정부에 분리 독립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구금되기도 했다.
스티븐 오스틴은 미국 본토 주민에게 텍사스의 이민 군대에 지원하면 텍사스 땅을 주겠다고 선전하여 많은 지원군을 끌어들였다.
1835년 텍사스에 이민 온 미국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텍사스의 반란군들이 곤살레스에서 멕시코군에 발포하였으며 이것이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오스틴은 텍사스 군을 지휘하여 1835년 10월 베샤르 공방전(Siege of Béxar)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1835년 11월 텍사스 이주민들은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후 오스틴은 전 텍사스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스티븐 오스틴(Stephen Austin, 1793 ~ 1836, 텍사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 텍사스 공화국의 4대 국무장관)이 이끈 이주민 민병대는 1835년 12월 샌안토니오(San Antonio)에서 전투를 벌인 결과 열세였으나 결국엔 멕시코군을 격파하였다.
1835년 산펠리페에 텍사스 전체에서 모인 대표들이 민병대의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회의를 하였으며 그리고 군사령관을 오스틴에서 샘 휴스턴(Sam Houston, 1793 ~ 1863, 미국-영국 전쟁 War of 1812에 참전, 1827년 테네시주 하원의원 주지사, 정치적 폭력행사로 1832년 텍사스로 이주)으로 변경하였다.
그 후 몸이 약했던 오스틴은 미국으로 건너가 전쟁 지원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고 무기를 매입하는 등 텍사스 독립전쟁을 위한 미국과의 교섭일을 하였다.
멕시코는 반란군을 응징하기 위해 1836년 3월 1,800명의 멕시코 군을 출정시켜 알라모 요새(Fort Alamo)를 13일간 포위하여 186명의 이주민 민병대를 전멸시켰으며 오로지 주민 3명만 살아남았다. 이 잔악성에 분노한 많은 텍사스의 미국계 멕시코인들이 민병대에 자원입대하였다.
1836년 4월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Antonio de Padua María Severino López de Santa Anna y Pérez de Lebrón, 1794 ~ 1876)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였으며 샘 휴스턴(Sam Houston, 1793 ~ 1863, 텍사스 공화국 초대, 3대 대통령, 상원의원, 텍사스 주지사) 장군이 이끄는 텍사스 독립군은 산 하신토(San Jacinto)에 주둔한 멕시코군을 급습하여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를 포로로 잡고 텍사스 공화국 대통령 대행인 데이비드 G. 버넷(David G. Burnet)과 산타 안나가 벨라스코 조약(Treaties of Velasco, 1836. 5.)을 맺어 분리 독립하여 텍사스 공화국(1836 ~ 1845)을 세웠다.
독립한 텍사스 공화국은 인디언들과 멕시코인들의 급습으로 주민들이 위협을 받곤 하였으므로 사회가 불안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텍사스 공화국은 돈이 없어 치안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투표를 통해 미국 연방에 가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미국 남부는 텍사스가 합중국에 가입하기를 원하였지만 북부는 텍사스가 노예제를 허가하고 있어 텍사스가 합중국에 가입하는 것을 처음에는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결국엔 상하원을 통과하여 합중국 가입이 허용되었다.
이때 미합중국의 정치가들은 서부개척의 팽창주의를 운명이라고 옹호하여 시민들을 설득했다.
1845년 존 오설리번(John L. O'Sullivan, 1813 ~ 1895, 컬럼리스트, 주포르투갈 미국대사)이 텍사스 병합에 대한 평론에서 텍사스 병합을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 하였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란 "미국 백인은 신세계에 기독교(개신교)와 민주정을 전파하는 하늘이 내려 준 사명을 띠고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으로 팽창주의와 영토 약탈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텍사스는 1845년 미국에 병합되어 28번째 주가 되었다.
이에 멕시코는 텍사스가 독립하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미국과 합병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어 미국과 국교를 단절했고 텍사스와 멕시코 사이의 경계에 대한 분쟁이 일어났다.
1846년 미국의 텍사스 합병에 따른 분쟁으로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전쟁(미국-멕시코 전쟁
Mexican–American War, 1846 ~ 1847)이 일어났다. 멕시코가 국교를 단절하자 미국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멕시코시티를 점령하는 등 전쟁에 승리하였으며 그 결과 1848년 멕시코와 평화조약(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Treaty of Guadalupe Hidalgo, 1848)을 맺었다.

10) 캘리포니아 등 남서부 찬탈(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Treaty of Guadalupe Hidalgo)

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 평화조약, 1848)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미국이 텍사스는 물론이고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1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캘리포니아와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주, 그리고 콜로라도, 뉴멕시코, 애리조나, 와이오밍 주 일부)를 찬탈하였던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과 힐라 강으로 확정했는데 이것은 미국이 전쟁 전 멕시코 영토의 약 55%를 차지한 것이었다.

11) 개즈던 매입(Gadsden Purchase)

1853년 미국 남부의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위하여 멕시코령 리오그란데 부근의 땅 개즈던 지역(애리조나주 남부와 뉴멕시코주, 76,800 km2)을 1,000만 달러에 (현재 시세로 2억 4천4백만 불) 멕시코로부터 매입하였다.

12) 알래스카 매입과 국경 분쟁

알래스카는 1741년 러시아의 표트르 1세(Pyotr I, 재위 1682 ~ 1725)의 명을 받은 베링(Vitus Jonassen Bering, 1681 ~ 1741, 덴마크)에 의해 발견되어 러시아령이 되었다.
알래스카는 러시아가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고 원주민과 모피 무역을 수행하며 식민지 설립을 목표로 만든 러시아 아메리카 회사(Russian-American Company, 1799 ~ 1867, 러시아)가 관리했다.
모피를 찾아 러시아인들은 캐나다쪽으로 내려오면서 개척하고 영국 식민지의 캐나다인들은 알래스카쪽으로 올라가면서 개척함에 따라 결국 이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러시아는 1825년 영국-러시아 협정(The Anglo-Russian Treaty of 1825, Treaty of Saint Petersburg)을 맺었으는데 사용한 지도가 불완전하고 경계선 정의('해안선에 위치한 산의 정상부를 따른다' 등)도 명확하지 않았으나 그 때는 별 쓸모없는 땅이라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래스카는 처음에 모피 무역이 활발했지만 남획으로 동물이 고갈되는 등 별로 쓸모가 없어졌고 관리에 비용만 증가하였다.
미국의 전기통신회사인 웨스턴 유니온(The Western Union Company, 1851 ~)은 캘리포니아주에서 북아메리카의 해안과 베링 해협을 가로질러 모스크바와 유럽까지 전신 망을 구축하기 위하여 러시아와 합작하였으며 여기에 3백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경쟁 중이던 애틀랜드 텔레 그래프 회사(Atlantic Telegraph Company, 1856년 사이러스 필드가 설립, 미국)가 1866년에 대서양 횡단 해저 전신 케이블을 먼저 완성하자 사업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미국(제17대 대통령 앤드루 존슨 Andrew Johnson, 1808 ~ 1875, 대통령 1865 ~ 1869)은 모스크바까지 연결하는 통신망의 잠재성을 예견하고 계속 사업이 진행되기를 원하였으며 러시아와 협상하기 위해 국무장관 윌리엄 H. 슈어드(William Henry Seward, 1801 ~ 1872, 국무장관 1861 ~ 1869)가 나서 통신망 사업권을 이양받았다.
19세기 중반에 러시아 제국은 영국 등과 크림 전쟁(1853 ∼ 1856년)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어려웠고 더군다나 캐나다에 있는 영국 해군이 알래스카 해상을 봉쇄하면 알래스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사이가 좋은 미국에 알래스카를 팔면 미국과 함께 지리적으로 영국을 압박할 수 있고 재정적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재위 1855 ~ 1881)는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기로 결정하고 1867년 주미 러시아 공사 에두아르트 스테클(Эдуард Андреевич фон Стёкль)에게 미국(제17대 대통령 앤드루 존슨 Andrew Johnson, 1808 ~ 1875, 대통령 1865 ~ 1869)의 국무 장관 윌리엄 H. 슈어드(William Henry Seward, 1801 ~ 1872, 국무장관 1861 ~ 1869)와 협상하도록 했던 것이다.
미국은 알래스카 구입에 대한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신중계소와 항해하는 배에 연료를 공급하는 석탄저장소, 영국(캐나다)을 압박할 수 있는 군사주둔지 등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1867년에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하였다.
1825년 영국은 러시아와 알래스카(Alaska)의 국경조약을 맺어 확정했다. 캐나다와 알래스카의 국경은 남쪽 해안에서 10 리그(48km) 떨어진 안쪽부터 서경 141도를 경계로 내륙을 구분하고 남쪽 해안 쪽은 서경 141도와 북위 56도가 만나는 지점까지 남쪽으로 해안에서 10 리그(48km) 떨어지고 해안선에 평행한다는 것으로 남쪽으로 약 800km 길게 내려와 있다.
1825년 러시아와 맺은 이 조약에는 남쪽 해안 쪽은 서경 141도와 북위 56도가 만나는 지점까지 해안에서 10 리그(48km) 떨어지고 해안선에 평행한다는 것으로 모호하였다.
캐나다는 1867년 미국이 알래스카를 매입한 후인 1871년부터 미국과 국경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특히 1896년에 캐나다의 클론다이크(Klondike)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일어남에 따라 이 지역 해안에 있는 클론다이크 강(Klondike River)이 금광에 진입하는 수로로 유용하게 되었다.
서경 141도와 북위 56도가 만나는 지점까지 남쪽으로 해안에서 10 리그(48km) 떨어지고 해안선에 평행한다는 것에서 미국은 해안선에서 10 리그(48km) 떨어진 곳을 경계선이라 주장하였고 캐나다는 섬으로부터 10 리그(48km) 떨어진 곳을 경계선이라 주장하여 서로 대립하다가 국제재판소(미국인 3명, 캐나다인 2명, 영국인 1명으로 구성)에 제소하여 거의 미국 측 주장 데로 결론이 났던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1903년에 새로 국경 협약을 맺었다.

13) 하와이, 괌,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병합

하와이는 1782년에 카메하메하 1세(Kamehameha I, 재위 1810 ~ 1819)가 왕조를 세운 독립국가(하와이 왕국)였다.
19세기 중반부터 하와이는 미국과 극동을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으며 많은 미국 사람이 이민을 와서 19세기 후반에 사탕수수 및 파인애플 재배에 성공하였고 이에 하와이에서는 제당업이 번창하였다.
미국은 1887년 하와이 왕국과 호혜 통상조약을 맺어 진주만에는 미 해군이 주둔하였으며 백인의 참정권도 인정되었다.
그런데 1890년의 미국 관세법 개정으로 하와이의 제당업이 타격을 받자 하와이의 미국인 제당 업자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과 합병 운동을 하였다.
1891년에 즉위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Liliuokalani, 재위 1891 ~ 1893)이 미국 농장주들의 면세혜택을 폐지하는 헌법 개정을 시도하자 1893년에 농장주들이 반란을 일으켜 하와이 왕국을 멸망시키고 1894년에 하와이 공화국(Republic of Hawaii, 1894 ~ 1898)을 세웠다.
미국은 하와이를 합병해 달라는 공화국의 요청에 1897년 6월 16일 합병조약을 체결하였고 미국 의회가 1898년 7월 7일에 비준함에 따라 1900년 4월 30일 조약이 발효되어 합병되었다.
1511년 스페인에 복속된 쿠바는 1895년에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으며 여기에 1898년에 미국이 개입하여 미국- 스페인이 전쟁(Spanish-American War, 1898. 4 ~ 1898. 8)을 치른 결과 미국이 승리하였다.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이때 미국은 쿠바를 합병할 수 있었으나 합병할 마땅한 명분이 없어 쿠바를 독립시켰으며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 결과로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구입하고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를 양도받았다.
1903년에는 쿠바의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경제를 미국 자본이 장악하는 등 쿠바는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 미국은 쿠바를 합병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쿠데타 등으로 정국이 불안하던 중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공산혁명을 일으켜 쿠바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1896년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독립 전쟁을 미국과 같이 하였으나 1899년 전쟁에 이긴 미국은 필리핀을 스페인으로부터 강제로 2,000만 달러에 매입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그래서 필리핀은 다시 미국과 싸웠으나 수많은 사상자만 낳았다.
그 후 미국은 대공황으로 필리핀을 관리하기 어렵게 되자 1934년 미국 의회는 타이딩스-맥더피 법(Tydings–McDuffie Act, 필리핀 독립법 Philippine Independence Act, 10년 후에 필리핀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통과시켰으며 이에 필리핀은 1935년 필리핀 자치정부(Commonwealth of the Philippines)인 연방정부를 세웠으나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했다.
서인도 제도(카리브해)의 대(大) 앤틸리스 제도에 있는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는 1493년 콜럼버스가 섬을 발견했을 때는 산후안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라고 불렀으며 그 후 계속 스페인 식민지로 남아 있었으나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Spanish-American War, 1898. 4 ~ 1898. 8)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미국령이 되어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나 1952년에는 국방, 외교, 통화를 제외한 내정을 이양받아 미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미국은 푸에르토리코가 51번째 주(州)로 편입되기를 원하였지만, 푸에르토리코는 1993년, 1998년, 2003년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미국 자치령으로 결정했다
미국 - 스페인이 전쟁(Spanish-American War, 1898. 4 ~ 1898. 8) 결과 태평양 상의 스페인령 북 마리아나 제도(남태평양)등도 미국령이 되었다.

사. 미국의 서부 개척

미국은 영국이 프랜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 ~ 1763)으로 프랑스로부터 할양(割讓) 받은 미시시피강 동쪽의 루이지애나를 1783년 독립할 때 영국으로부터 이양받았고 제3대 제퍼슨 대통령(Thomas Jefferson, 재임 1801 ~ 1809)이 나폴레옹으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1803년에 구입함으로써 미국은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당시 지금의 서부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으며 애팔래치아(Appalachia) 산맥 넘어 루이지애나 지역(미시시피강 동쪽, 현재는 중서부라 함)을 서부라고 했었다.
그래서 1804년 제퍼슨 대통령의 명을 받은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 1774 ~ 1809)와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1770 ~ 1838)가 이끄는 원정대가 태평양까지 닿는 2년 4개월간의 대탐험을 하고 돌아옴에 따라 서부지역이 알려지게 되었다.
1783년 미국이 독립이 된 후 수십 년이 지나자 미국의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에 미국 정부는 1800년대 초반부터 개인에게 토지를 무상 지급하는 등으로 이주 장려정책을 펴 서부로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일어났다.
이들이 정착할 토지를 제공하기 위해 1830년 제7대 미국 대통령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재임 1829 ~ 1837)이 서명한 인디언 이주 법(Indian Removal Act)에 따라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인디언 부족을 미시시피 강 서쪽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인디언들은 이주 중에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체로키 인디언들은 14,000명 중 강제 이주 후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200명에 불과하였다.
미국이 독립하여 민주국가가 되었고 광활한 영토를 가졌다는 것이 유럽에 알려지자 가난하고 박해받던 유럽인들의 미국행 이민 행렬이 이어졌다.
이민자 수는 1820년대에 약 15만 명이었으며 점점 증가하여 1850년대에 약 260만 명, 1900년대에는 약 880만 명으로 최절정에 이르렀다. 출신지역별로 보면, 1840 ~ 60년대에는 아일랜드가 약 290만 명, 독일이 약 150만 명으로 많았고, 1900 ~ 1920년대에는 발칸 반도 중심의 동남부 유럽이 약 350만 명, 이탈리아가 약 320만 명, 러시아와 폴란드를 합쳐 약 252만 명으로 많았다.
미국은 계속해서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구입하였고 이어서 멕시코로부터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를 반 강제로 구입하였다.
후에 석유 등 천연자원의 보고로 판명된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구입하고 하와이를 병합하여 엄청나게 넓은 지금의 미국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이민자들이 계속 쏟아져 들어와 서쪽으로 서쪽으로 몰려갔다.
미국의 서부 개척자들은 인디언들과 불량자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견고한 마차를 이용한 대규모의 마차대를 조직하여 이동했다. 개척자들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험준한 여행길에서 마차대의 지도자를 뽑고 경호원을 고용하여 무리를 지어 함께 이동하는 것이 개인이나 한 가족이 따로 여행하는 것보다 안전했던 것이다.
정부의 위탁을 받은 역마차는 사람과 화물의 운반과 더불어 개척민들의 이주 수단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으로부터 구입한 루이지애나의 대평원이 대규모 목축에 적합하다는 것이 알려져 백인들이 몰려오자, 이곳에 정착했던 인디언과 들소들은 또다시 이주하거나 떼죽음을 당해야만 하였다. 무기를 들고 백인에게 저항하던 인디언들은 학살당하였던 것이다. 1840년쯤 루이지애나 지방은 모두 백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때 미합중국의 정치가들은 서부개척의 팽창주의를 운명이라고 옹호하여 시민들을 설득했다.
1845년 존 오설리번(John L. O'Sullivan, 1813 ~ 1895, 컬럼리스트, 주포르투갈 미국대사)이 칼럼에서 팽창주의와 영토 약탈을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 하였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란 "미국 백인은 신세계에 기독교(개신교)와 민주정을 전파하는 하늘이 내려 준 사명을 띠고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은 사람들을 일확천금의 기회로 들뜨게 만들어 전 가족이 마차를 타고 줄지어 루이지애나의 대평원을 지나 로키 산맥을 넘어 캘리포니아에 들어가거나 바다로 캘리포니아에 상륙하는 골드러시(gold rush)가 일어났던 것이다.
1849년에는 미국인뿐만 아니라 유럽, 중남미, 하와이, 중국 등지에서 약 10만 명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아. 남북전쟁(南北戰爭, American Civil War, 1861 ~ 1865)과 산업발전

아메리카 합중국(미국, United States of America)을 구성하는 States(州, 주)는 하나의 국가이다. 그래서 미국은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 한다. 미국은 개척 초기부터 여러 주로 나뉘어 각 주는 독립된 자치권을 행사했으며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연합했던 것이다.
독립 초기에는 States(州, 주)의 자치권이 강하였다.
그렇지만 반란 등으로 불안해지자 독립 6년 후인 1789년 대통령제를 도입하는 등 연방정부의 권한이 점점 강해졌다.
이때 미국은 경제면에서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북동부 지역에서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남동부 지방은 면화 농업에 전념하였다. 그래서 공업지역인 북부와 농업지역인 남부는 이해관계가 매우 달랐다.
북부의 States(州, 주)들은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화되는 것을 원하였으며 상공업이 발전단계에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공산품을 많이 팔기 위해서는 외국 공산품의 수입을 억제할 수 있는 관세를 높이는 것을 지지하였으나 남부 States(州, 주)들은 States(州, 주)의 권한이 줄어드는 것을 반대하고 관세가 낮추어지기를 원하였다. 대농장주가 노예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대량 생산한 목화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외국 공산품이 많이 수입되어야 하므로 관세를 낮추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
남부는 유럽 목화 수요의 70%를 공급할 정도로 목화 재배를 많이 하였고 목화 재배에는 노동력이 많이 소요되었으므로 노예제는 필수였다.
엘리 휘트니(Eli Whitney, 1765~1825)가 면화의 솜에서 씨를 분리해 내는 기계인 코튼-진(Cotton gin)을 발명하여 솜의 처리가 수월해지자 면화의 재배지역은 더욱 넓어졌다. 면화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솜을 따는 등의 수작업이 많아 노예를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영국(1792), 미국(1807) 등에서 노예무역이 금지되어 미국 남부는 외부로부터 노예를 더 이상 수입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노예의 자손을 모두 노예로 만들어 수요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1800년경에 약 100만 명이던 노예가 1860 경에는 약 400만 명으로 늘어났다.
북부가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 공장 노동자로 사용하기 위해 노예제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1787년 협정에서 노예 다섯 명을 세명의 자유인으로 인정하여 선거권을 주었으므로 노예제는 선거에 있어서 남부 States(州, 주)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대부분의 대통령이 남부 출신이었고 초기 대통령들은 대부분 많은 노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노예문제를 남북이 협상으로 해결해 왔다.
그런데 북부를 기반으로 하는 공화당의 링컨(Abraham Lincoln, 에이브러햄 링컨, 1809 ~ 1865, 제16대 대통령, 재임 1861 ~ 1865)이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의 대통령으로 집권하자 남부에서는 노예제에 대한 불안이 증대되었으며 더욱이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 1811 ~ 1896)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엉클 톰스 캐빈, Uncle Tom's Cabin, 1852 )'이 출간되어 노예해방의 여론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의 근본 원인은 노예 문제가 아니고 북부의 보호 무역 주장과 남부의 자유 무역 주장의 핵심인 관세의 인상 문제였다.
먼저 1828년 5월 19일 연방 관세법이 하원에서 찬성 105 대 반대 94로 간신히 통과되었다. 이 법의 골자는 보호무역을 위해 수입품에 62%까지 관세율을 올렸다. 영국(33%), 프랑스(24%)보다 훨씬 높은 40%대의 관세율로 높아지자 남부의 불만이 높아졌다. 고율 관세로 인한 보호무역의 혜택은 북부 제조업체가 독점하는 반면 무역 보복의 피해는 농작물을 주로 수출하는 남부가 뒤집어써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832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자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1767 ~ 1845) 제7대 미국 대통령(임기 1829 ~ 1837)은 '연방군은 찰스턴으로 진격을 준비하라.’라고 군대에 명령을 내리면서 강경 대응하여 탈퇴를 막았다.
1857년 버몬트주 출신 저스틴 스미스 모릴(Justin Smith Morrill, 1810 ~ 1898, 하원 의원 1855 ~ 1867, 상원 의원 1867 ~ 1898) 의원은 새로운 관세법을 발의하였다.
저스틴 모릴 의원의 이름을 딴 모릴 관세법안은 관세를 2~3배 인상해 미국의 평균 관세율을 49%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남부가 연방을 탈퇴하게된 결정적인 정치적 계기는 링컨의 대통령 당선보다는 1860년의 연방의회 선거결과였다.
1860년 이전에 민주당은 적어도 상원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1858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하였고 1860년 의회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양원을 모두 석권함에 따라 남부 출신의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연방의회의 주도권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북부 출신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남부의 불만이 증폭됐다.
1861년 2월 8일 미국 남부의 7개 노예주 중 6개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아메리카 연합국(남부연맹)을 수립하였다.
남부 출신 의원들이 의사당을 떠난 뒤 1861년 3월 2일 상·하원은 ‘모릴 관세법(Morrill Tariff)’을 통과시켰다.
1861년 3월2일  모릴 관세법안이 의결되고 1861년 3월 4일 노예해방론자로 알려진 링컨 (Abraham Lincoln, 1809 ~ 1865)이 제16대 대통령(임기 1861년 3월 4일 ~ 1865년 4월 15일)으로 취임하여 관세 인상을 추진하자 한 달여 만에 남북 전쟁(南北戰爭, The American Civil War, The Civil War, 1861년 4월 12일 ~ 1865년 5월 9일)이 일어났다. 관세법이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미국은 모릴 관세법(Morrill Tariff, 1861)에 이어 매킨리 관세법(Tariff Act of 1890, 1890, 수입품에 대한 평균 관세율을 거의 50%로 인상), 윌슨 고먼 관세법(Wilson-Gorman Tariff Act, 1894, 1890년 매킨리 관세율을 낮춤), 딩글리 관세법(Dingley Tariff, 1897, 관세율을 더 높임)으로 이어지는 보호 관세 정책을 통해 외국 상품이 미국에 들어와 경쟁하는 것을 막아주었던 것이다.
공화당이 상하의회를 장악함에 따라 링컨이 대통령(재임 1861. 3. 4. ~ 1865. 4. 15.)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남부에서는 7개 주(사우스캐롤라이나 1860년 12월 20일, 조지아, 플로리다, 앨라배마, 미시시피 1861년 1월 21일, 루이지애나, 텍사스 2월 1일)가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CSA, 남부연맹, 南部聯盟, Southern Confederacy)을 1861년 2월 4일 결성하여 수도를 버지나아 주의 리치먼드(Richmond)로 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1808 ~ 1889, 미시시피주 상원의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켄터키 주 출신의 미합중국 제14대 부통령인 존 캐벨 브레킨리지(John Cabell Breckinridge)는 남부로 가서 전쟁장관이 되었다.
남군이 남부연맹(南部聯盟, Southern Confederacy)의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섬터 요새(Fort Sumter, 합중국 군대 주둔)를 1861년 4월 12일부터 13일까지 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내전이 일어났다.
1861년 4월 12일 에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버지니아 4월 17일,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가 추가로 연방을 탈퇴하여 남부에 가담함에 따라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은 11개 주가 되었고 북부에는 23개주가 남았으며 남북 경계에 있는 4개 주는 흑인노예제는 찬성하지만 연방에 남은 경계주(境界州, border state, 델라웨어 주, 켄터키 주, 메릴랜드 주, 미주리 주)였다.
이때 인구는 북부가 2,300만명이었고 남부가 900만명이었으며 남부의 900만명 중 400만명이 흑인 노예였다.
남북전쟁은 4년간 지속되었고 이 기간 중 10,000회 이상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전투의 40%가 버지니아주와 테네시주에서 일어났다.
남부연맹(南部聯盟, Southern Confederacy)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1808 ~ 1889, 미시시피주 상원의원)는 1862년 조지프 존스턴 장군이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물러나자 내근(內勤) 중이던 로버트 리(Robert Edward Lee, 1807 ~ 1870) 장군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연맹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며 로버트 리(Robert Edward Lee) 장군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링컨 대통령은 전쟁 초기에 로버트 리(Robert Edward Lee, 1807 ~ 1870, 전쟁 전 대령으로 승진하여 무보직 상태로 대기 중) 장군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연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리 장군은 연방군을 사임하고 고향인 남부연맹으로 가버렸으며 이어서 여러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나 패전을 거듭하였다.
남부연맹(南部聯盟, Southern Confederacy)은 북부에 비해 인구도 적고 군사력도, 경제력도 약하여 절박한 상황이었으나 남군은 가정을 지킨다는 목적이 뚜렸하여 사기가 높았으며 탁월한 전투 능력을 가진 로버트 리 장군의 지휘로 전쟁을 이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북부의 미국 연방 정부(Federal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는 우세한 해군력으로 남부의 전 해안과 미시시피강의 수로를 점령하여 남부를 동서로 갈라 봉쇄하는 봉쇄 전략을 폈다.
  북군에 의해 해안과 미시시피강의 수로가 봉쇄된 남부연맹(南部聯盟, Southern Confederacy)은 물자 공급이 부족하여 산업 생산과 국민 생활이 어려웠으며 식량 생산은 많이 되었지만 봉쇄로 교통이 불편하여 공급이 원할하지 못해 어떤 지역은 굶주리기까지 했다.
전쟁 중에도 유럽에서 많은 이민이 들어왔으나 이들은 남부의 해안봉쇄로 북부로만 들어올 수 있었으며 이민으로 들어온 이들은 이민 조건에 따라 북군이 되었던 것이다.
해안이 봉쇄된 남부는 커피를 수입할 수 없어 병사들이 커피를 를 마실 수 없어 전쟁의 압박감과 긴장을 풀 수없었지만 북군은 커피를 마실 수 있어 전쟁의 압박감과 긴장을 풀 수 있었으므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남부연맹은 외교전을 펴 유럽의 지원을 받고자 하였으며 유럽의 영국, 프랑스 등은 강해져 가는 미국이 둘로 나누어 지기를 원하였으므로 남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에 링컨 대통령은 유럽의 개입을 막기 위해, 주의 노예정책에 대통령이 관여할 권한이 없었지만 1863년 1월 1일에 포고문 95호로 노예해방을 선언하여 이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전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유럽은 인권이라는 명분에 걸려 이 전쟁을 실제로 지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 영국은 부족한 식량을 미국 북부에서 옥수수 등으로 수입하고 있어 북부를 자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흑인도 18만명이 북군에 지원하여 참전하였으며 4만명이 전사했다.
남군은 남부에서 게릴라전을 펴 전과는 우세했으나 갈수록 수세에 몰리고 있었으므로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공세적으로 북으로 진격하여 워싱턴을 점령하고 이를 이용해 협상하여 분립독립을 쟁취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워싱턴을 급습하여 속전속결로 점령할려는 모험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남군의 리 장군은 75,000명의 대병력을 워싱턴을 우회하여 펜실베이니아주로 이동시켰으며 북군 총 사령관 조셉 후커(Joseph Hooker, 1814 ~ 1879) 장군의 후임인 조지 고든 미드(George Gordon Meade, 1815 ~ 1872, 세미뇰 전쟁과 미국-멕시코 전쟁 참전, 북군 총 사령관) 장군도 100,000명의 대병력으로 대항했다.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Gettysburg)에서 1863년 7월 1일 ~ 1863년 7월 3일까지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로 북군 23,000명, 남군 28,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으며 남군의 결정적인 패배였다.
링컨 대통령은 넉달 뒤인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에서 열린 죽은 장병들을 위한 추도식에 참석하여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연설(Gettysburg Address)을 하였던 것이다.
북군은 모든 면에서 남군을 압도하였으나 전쟁을 승리로 빨리 끝내지 못한 것은 초기 군지휘관들이 유명한 백전노장의 장군들이라 너무 늙어 과감한 작전을 펴지 못하였으며 연방이었으므로 권력이 집중되지 못하고 각 주로 나뉘어져 있어 그들 여러 권력자들을 만족시키는 인사 정책으로 인하여 군 지휘관을 적재적소에 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864년 무명의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1822 ~ 1885, 제18대 대통령, 재임 1869 ~ 1877, 멕시코 전쟁에 대위로 참전하였고 이후 퇴역, 남북전쟁 초기 일리노이 의용군 대령, 이어서 연방군 준장으로 진급) 장군을 소장으로 승진시켜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그랜트 장군은 뛰어난 전략을 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휘관과는 달리 패전에 가까워도 후퇴하지 않고 남군보다 우세한 북군을 이용하여 버티는 뚝심으로 전쟁을 승리하였던 것이다.
총과 포를 만드는 중공업과 군수공장은 대부분 북부에 있었으며 경제력, 인구수, 명분 등 모든 면에서 밀린 남부연맹(南部聯盟, Southern Confederacy)이 결국 1865년 4월 9일 항복하였다.
내전을 치르는 동안 60만 명의 젊은 이들이 죽고 수많은 시설이 파괴되었다.
전쟁 중 사용한 무기도 북부가 우수하였고 공급도 원활했다.
북부에 대부분의 총포 공장이 있었고 북부는 유럽의 발달된 총포류의 신기술을 수입하여 총포류를 제조하여 공급하였던 것이다.
1853년 영국 엔필드 조병창(Enfield armory)에서 개발되어 생산된 강력한 엔필드 소총(Enfield rifle,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 Enfield Pattern 1853 rifle musket, 1853 ~ 1889)을 미국이 수입하여 전쟁에 사용함으로써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했던 것이다.
엔필드 소총은 총열에 강선(rifling, 腔綫)이 있고 미니에(minie) 탄환을 사용하며 방아쇠를 당기면 percussion(충격)-lock으로 격발하는(뇌관식) 전장식 소총이었다.
미국 기병대는 스페서 소총(Spencer Rifle, 스펜서 연발 소총 Spencer Repeating Rifle, 후장식)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1859년 크리스토퍼 마이너 스펜서(Christopher Miner Spencer, 1833 ~ 1922, 미국 발명가)가 발명했으며 뇌관식이고 자동으로 총기 동작이 반복 작용(Lever action)한다.
뇌관식 소총은 1805년 알렉산더 존 포사이스(Alexander John Forsyth, 1769~1843, 발명가, 스코틀랜드 교회 목사)가 염소산칼륨(KClO3)에 타격을 가하면 폭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충격 잠금 장치(percussion-lock)을 발명하여 1807년에 특허를 받았다.
뇌관식 격발장치는 게속 개량되어 1841년부터는 뇌관식 격발장치의 소총을 만들었으며 크리미아 전쟁(Crimean War, 1853 ~ 1856)과 1861년 남북전쟁에 사용되었다.
1836년 독일의 드라이제(Johann von Dreyse, 1787 ~ 1867, 발명가)가 발명한 바늘 총(needle gun, 공이가 있는 총)은 소총에 혁신을 가져와 프로이센군은 이 총으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Second Schleswig War, 1864)에서 덴마크군을 참패시켰고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Austro-Prussian War, Seven Weeks' War 7주전쟁, 1866)에서도 압승했다. 
미국이 남북전쟁 후 다시 남북이 정상적으로 합쳐지는데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남북전쟁으로 흑인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남부에서 흑인들은 문맹이거나 세금을 내지 않으면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 1965년까지 완전하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one drop rule(한 방울의 법칙)에 의거 조상 중에 흑인이 있었다면 백인이라도 흑인으로 간주되어 차별을 받아왔다.
그리고 일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 ~ 1871) 때 일본 내부의 막부와 유신파의 격돌 때뿐만 아니라 그 후 유신파 내의 반란으로 일어난 세이난 전쟁(西南戰爭,1877)에 남북전쟁 중 사용되었다가 전쟁 후 남아도는 무기를 팔아 획득한 많은 금과 은이 경제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미국 함대사령관 매슈 캘브레이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 ~ 1858)가 무력을 시위하여 일본과 가나가와 조약(神奈川條約, Convention of Kanagawa, Kanagawa Treaty, 神奈川条約, 미일 화친조약 美日和親條約, 1854)을 맺고 일본을 개항시킨 후 개혁파와 막부 사이에 정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유신파에 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하여 승리하게 하였던 것이다.
남북전쟁 후 미국의 북부는 노예 해방을 지지하는 등 1850년에 창당된 진보적인 공화당의 터전이었으며 남부는 농장주를 대변하는 보수당인 민주당의 터전이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산업이 발전한 북부에서는 많은 자본가가 형성됨에 따라 공화당은 보수로 기울고 민주당은 진보로 돌아서게 되었다.

자. 산업 발달

1857년에 지정된 낮은 관세를 높여서 고율의 보호관세를 규정한 모릴법(Morill Act)이 저스틴 스미스 모릴(Justin Smith Morrill, 1810 ~ 1898)하원 의원의 발의로 1861년에 제정되어 남북전쟁(1861~ 1865)이 끝난 후 보호무역을 위해 본격 시행되었다.
보호무역을 시행한 결과 기술과 산업이 유럽에 뒤쳐져 경쟁력이 없던 제조업이 유럽을 능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제16대 대통령, 재임 1861 ~ 1865)은 대통령이 되자 넓고 험하여 동서 대륙횡단에 마차로 6개월씩 걸리는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첫 대륙횡단 철도 건설을 1862년에 시작하였으며 6년의 험난한 공사 끝에 1869년에 완공되어 단 7일 만에 대륙을 횡단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험난한 서부의 철도 공사에 골드러시로 들어온 중국인들이 참여하여 수많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링컨은 강력한 특허법을 다시 제정하여 지적재산권을 확고히 보장함으로써 그 후 수많은 발명이 이루어졌다.
링컨은 전쟁을 불사하고 큰 희생을 치른 남북전쟁으로 흑인 해방뿐만 아니라 미국 연방의 분리를 막아 대국으로 발전할 토대를 마련하였다.
미국은 남북 전쟁 중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기술이 발전되고 풍부한 물자를 이용하여 미국의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전국을 연결하는 미시시피강의 수로와 1870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철도 부설로 산업의 기본인 물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졌으며 철도산업의 발달로 철강업 등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1859년 비셀, 실리먼 2세, 드레이크에 의해 펜실베이니아 지역에서 석유가 처음 시추된 후 석유 정유에 뛰어든 록펠러 1세(John Davison Rockefeller,1839 ~ 1937)는 1863년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Co.)을 창설하여 거대한 석유 제국을 형성하였으며 1881년에는 미국에서 석유를 생산하는 정유시설의 95%를 지배하였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회사는 가장 안정적이고 질이 좋은 등유(燈油, kerosene)를 생산하여 품질로 소비자를 사로잡아 성장하였으며 여러 정유회사를 사들여 대형화되자 유일한 수송 수단인 철도를 독점하여 다른 석유회사가 살아남을 수 없게 하여 석유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였던 것이다.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 ~ 1919)는 철도 침대차 사업에 투자해 벌어들인 거금을 석유개발에 투자하여 막대한 부를 이루었으며 대륙횡단 철도가 개통되자 철강산업이 유망할 것이라 예견하고 다시 이에 투자했다.
1867년에는 유니온 제철소, 1870년에는 루시 용광로 회사를 설립하였다.
당시 강철의 제조 과정이 복잡하였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강철 생산이 어려워 외국에서 수입하였으므로 강철 가격이 높아 주로 연철이나 선철을 사용하고 있었다. 강철이 연철이나 선철보다 수명이 길었지만 단가가 낮고 제조가 쉬운 연철이나 선철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1872년에 영국의 헨리 베서머(Henry Bessemer, 1813 ~ 1898, 베서머 제강법 발명) 제강소를 방문한 카네기는 그곳에서 염기성 평로법(鹽基性平爐法, basic open-hearth furnace process, Siemens-Martin-Verfahren, 독일 칼 빌헬름 지멘스가 개발, 1865년 프랑스 피에르 에밀 마틴이 라이센스로 적용)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생산되는 강철의 놀라운 잠재력을 발견하고는 도입하여 1875년에 미국 최초의 강철 공장인 에드거 톰슨 강철 회사를 설립하였다.
카네기는 많은 광산을 구입하여 재료를 조달하고 염기성 평로 법의 제강소를 설립하여 강철을 대량 제조하였으며 자체 유통망을 구축하는 등 철강업의 트러스트(trust)를 실현시켜 철강을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공급하였던 것이다.
이때 미국에서는 저렴하고 강력한 철강을 이용하여 기계는 물론이고 수많은 마천루(摩天樓, Skyscraper)가 세워졌던 것이다.
마천루는 오티스(Elisha Graves Otis, 1811 ~ 1861)가 1853년에 발명한 엘리베이터(elevator)로 오르내릴 수 있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열대성 과일인 바나나는 인도네시아-말레이반도, 필리핀 지역이 원산으로 씨가 없는 종이 발견되어 식용으로 이용됨에 따라 선사시대에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까지 전해지고 대항해시대에 중남미에 전해져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열대지방 현지에서는 주식급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잘 상하는 과일의 특성상 무역상품으로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870년 6월 미국의 선장인 로렌조 다우 베이커(Lorenzo Dow Baker, 1840 ~ 1908, 매사추세츠 주 웰플릿)는 뉴잉글랜드에서 금광이 발견된 베네수엘라로 스쿠너(schooner, 돛대가 두 개 이상인 범선) 선인 텔레그래프(Telegraph)호에 금광 탐사자들과 장비를 실어갔다.
그는 빈 배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장이나 자메이카의 포트 안토니오(Port Antonio)에 들러 수리를 하면서 미국으로 가져가면 돈벌이가 될 화물을 찾아 돌아다녔다.
항구의 상점 주인으로부터 당시 미국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상한 모양의 그 지역 과일인 바나나를 상품으로 제안받고 베이커는 모험을 하기로 결정했다. 바나나는 저장성이 없어 쉽게 상하는 과일이라 빨리 수송하여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덜 익은 녹색 바나나 608 다발을 구입하여 스쿠너 선 텔레그래프(schooner Telegraph)호에 싣고 미국으로 출발했다.
바다에서 거의 2주가 지나자 벌써 바나나는 익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뉴저지주의 저지 시티(Jersey City)로 향했다. 저지 시티(Jersey City)의 한 도매상이 바나나 모두를 사주어서 Baker는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그는 즉시 다시 바나나를 실어오기 위해 자메이카의 포트 안토니오(Port Antonio)로 가서 1,408 다발의 바나나를 텔레그래프호에 실어 빠른 속도로 항해하여 이번에는 보스턴으로 운반하였다.
베이커는 바나나를 보스턴 농산물 회사에 판매하여 전에 운송료로 올린 수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수익을 얻었다.  
그리고 바나나를 판매한 농산물 회사의 점원인 앤드루 프레스턴(Andrew Preston, 1846 ~ 1924, 매사추세츠 주)과 동업을 하기로 했다.
1885년 두 사람은 투자자를 모아 Boston Fruit Company라는 수입 회사를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부패하기 쉬운 바나나를 상하기 전에 미국으로 신속하게 운송하여 바나나 시장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범선이라 바나나를 빠르게 운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 동부까지는 거의 운송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증기기관차와 고속 증기선(1807년 풀턴 발명)을 도입한 후부터 바나나는 운송이 빨라지고 냉장기술(푸른색의 덜 익은 바나나를 냉장하면 노랗게 익는 속도를 늦추어줌, 노랗게 익은 바나나를 냉장하면 껍질이 검게 됨)의 발달로 미국 전역에 판매되어서 가장 인기 있는 식품의 하나가 되었으며 회사는 생산지 국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기업이 되었다.
시간을 다투는 바나나의 특성상 바나나를 생산하는 수없이 넓은 토지(바나나에 병든 농장은 휴경하고 새 토지로 대체하여 경작)를 소유한 플랜테이션(Plantation) 뿐만 아니라 운송회사와 판매회사까지 소유하여 계열화한 거대 회사가 되었던 것이다.
Baker는 자메이카의 바나나 생산과 수집을 감독하면서 회사를 쿠바 및 도미니카 공화국에 확장했다.
1899년에 중앙아메리카의 부동산을 흡수한 후 회사 이름을 United Fruit Compony로 변경했다.
United Fruit Compony는 강력한 힘을 행사하여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손아귀에 넣고 노예적인 "바나나 공화국"으로 만든 엘 풀포(elpulpo, octopus, 문어)가 되었던 것이다.
United Fruit Compony의 후신인 Chiquita Brands International은 현재에도 전 세계 바나나 무역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에게 바나나 상표로 친숙한 돌 식품회사(Dole Food Company, Dole plc, 1852년 James Dole 설립, 파인애풀 농장 및 수출)는 1906년 Vaccaro 형제(Joseph, Luca 및 Felix Vaccaro)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과일 수입회사 등을 통합하여 Vaccaro Bros. and Co. 를 설립한 것이 기원이다. 이 회사는 온드라스에 대규모의 바나나 농장을 개발하고 수입하였다.
1924년에는 스탠다드 과일 회사(Standard Fruit Company)로 회사명이 바뀌었고 1926년에는 Standard Fruit & Steamship Company로 변경되었다.
1964년 Hawaiian Pineapple Company(HPC, 1901년 James Dole 설립, 파인애플 통조림)를 인수하였으나 재정이 어려워져 1968년 Castle & Cooke(하와이 설탕 및 파인애플 생산 및 물류 회사,1851, Amos Starr Cooke와 Samuel Northrup Castle 하와이에서 설립)에 인수되었으며 Castle & Cooke은 1985년에 Dole Food Company(1852, James Dole 설립, 파인애풀 농장 및 수출)에 합병되었다가 1995년에 Castle & Cooke와 Dole Food Company(1852년 James Dole 설립, 파인애풀 농장 및 수출, Dole plc)로 분리되었다.
이들회사 외에도 델몬트(Del Monte Corporation, 1926, 과일 ·채소류 등의 통조림 제조회사), 피프스(Fyffes, 1888, 런던, 과일 및 신선 농산물 회사) 등의 회사들도 같이 에콰도르,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멕시코, 과테말라, 필리핀 등에 대규모 농장을 개발하여 바나나를 생산하고, 미국, 동북아시아, 유럽 등에 유통망을 갖추어 세계 바나나 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이과정에서 중남미의 엘살바도르, 그레나다, 자메이카, 니카라과,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에서와 같이 바나나 등과 같은 1차 상품의 수출에 의존하면서 서구자본에 경제가 예속된 국가들을 지칭하는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부패 등으로 인한 정국불안과 심한 대외 경제의존을 겪는 국가를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다.
바나나 재배품종으로 1950년대 이전에 이용되던 그로 미셸종(Gros Michel)은 파나마 전염병으로 거의 멸종되고 1950년대 이후 캐번디시종(Cavendish Banana)으로 대체되었다.
씨 없는 바나나 재배종은 무성생식인 포기나누기로 번식하여 재배하였으므로 유전자가 같은 단일종이 되어 바나나의 상품성으로는 균일하여 좋지만 전염병에는 전체가 감염되는 취약성을 가졌다.
은행가인 J. P.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 ~ 1913)은 아버지 헨리 S. 모건이 하던 금융업을 이어받아 1895년 회사 이름을 J.P. 모건 회사(J.P. Morgan & Co.)로 바꾸었다.
J.P. 모건은 19세기말 미국의 철도 회사들을 합병하는 데 투자를 하였으며, 미국의 대표적인 철강회사 US스틸(US Steel), 제너럴 일렉트릭, 제너럴모터스, 듀폰 등에 투자를 하여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J.P. 모건은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없었던 1913년까지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했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 ~ 1931)과 테슬라(Nikola Tesla, 1856 ~ 1943) 등은 전기를 실생활에 사용되는 산업화를 이룩함으로써 증기기관에 이어 전기라는 제2의 에너지 혁명을 이룩하였다.
헨리 포드(Henry Ford, 1863 ~ 1947)는 1903년에 포드 자동차 회사(Ford Motor Company)를 설립하고 1908년에 T 자동차 모델을 생산하여 자동차 대중화를 이룩하였다.
포드는 이동하는 조립라인을 설치하고 각 노동자들은 조립 라인에서 각기 특정한 업무를 맡게 하여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는 체계를 만들었는데 이를 포디즘(Fordism)이라 한다.

차. 대공황(大恐慌, Great Depression)

미국은 1783년에 독립한 후 성장을 계속했다. 국토가 넓어지고, 인구도 늘었으며, 특히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으로 파괴된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경제력은 유럽 국가들을 능가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경제력은 영국의 2배, 프랑스의 3배를 넘었고 밀려드는 이민자들은 확장된 영토 개발과 공업발전에 필요한 인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은 독일계와 영국-프랑스계 사이에서 한쪽 편을 들기 어려워 중립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1915년 독일 잠수함이 미국인 128명이 탑승한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침몰시키고 1916년 비무장 상선 서섹스 호를 공격하는 등 적대행위를 하였다.
1917년 독일 외상 짐머만이 멕시코 정부에 보낸 비밀문서에서 미국이 전쟁에 참가할 경우 멕시코가 독일 편에 가담해 준다면 독일은 그 대가로 미국령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넘겨주겠다고 제의했다는 것을 알아낸 영국은 이 비밀을 미국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미국 신문에 공개하여 대서특필되도록 하였으므로 미국 내 여론이 참전 쪽으로 기울었다.
1917년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등 비타협적인 태도로 나오자 미국은 ‘세계의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1917년 4월에 참전하였다. 제28대 윌슨 대통령(Thomas Woodrow Wilson, 재임:1913 ∼ 1921)은 1918년 1월 의회에서 14개 조 평화원칙(十四個條平和原則, Fourteen Points)을 발표하였고, 전후에는 파리 강화 회의에 출석하여 ‘승리 없는 평화’를 외쳤다. 윌슨의 14개 조 평화원칙(十四個條平和原則, Fourteen Points)에는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National Self determination)란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1914.7~1918.11)을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영토를 확장하려는 독일과 식민지를 지키려는 연합국의 전쟁에서 미국은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해야 이들 국가와의 무역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1926년 미국 최초의 동서 대륙횡단 고속도로인 미국 국도 제66호선(US Route 66, Mother Road)이 개통되었다.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Los Angeles County) 산타모니카를 잇는 길이 3,945km의 국도이다.
미국 경제불황기에 국민들이 서부로 이주할 때 이용한 유서깊은 도로였으나 1985년 새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국도에서 해제되었으며 2003년 일부 구간이 고난의 역사를 추억하는 관광도로로 복원되었다.
미국은 1922년부터 신흥 공업과 새로운 생산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기계화, 기업 조직의 거대화, 대량생산, 새로운 기업 경영방식의 도입, 그리고 신용제도의 정비로 자본주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되어 갔다. 1927년에 이르러 미국 경제는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았다.
그런데 미국 경제는 계층 간 소득 불평등이란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국민 5%인 상류의 부유층이 전체 소득의 3분의 1을 차지했고 대부분의 국민은 구매력이 없어 과잉 생산된 물건들이 창고에 쌓여갔다.
이에 따라 성장이 정체되면서 자금은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증권 등 투기 시장에 몰려들었다. 이렇게 증권을 통해 불실 기업으로 들어간 자금은 투자로 전환될 수 없었다.
그 결과 주가가 기업체의 실질가치 이상으로 높아지는 주식 시장의 거품현상이 나타났다. 주가가 상승하면서 더 많은 돈이 증권 시장으로 몰리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증권 시장이 과열되어 1929년 10월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하는 '파탄(the Crash)'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주가의 대폭락은 각 부문에 급속도로 연쇄되어, 물품의 공급과잉, 제반 물가의 폭락, 생산의 축소, 경제활동의 마비상태로 공항상태가 되었다. 많은 기업이 도산하여 실업자가 수없이 늘어났다.
공황은 단순히 과잉생산으로 인한 공업 공황뿐만 아니라, 농업 공황, 금융공황, 자본주의의 근본을 흔드는 통화 공황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대공황이었다.
미국의 공황은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각국으로 파급되었다.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재임 1933∼1945)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먼저 은행업무를 정지시키고 댐 공사 등 국가에서 주도하는 사업을 펼쳐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뉴딜(New deal) 정책을 시행하여 일부 성공하였다.
다른 여러 나라 정부에서도 경제를 시장의 원리에만 맡기지 않고,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10여 년 동안의 대불황에 허덕인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에 필요한 무기, 군수품 등을 공급하기 위해 수많은 공장이 설립되고 가동되어 실업자가 줄어드는 등 경기가 활성화되어 대공황이 끝나게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실질소득이 거의 2배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2. 캐나다의 개척과 독립

아이슬란드 인들은 바이킹 뱌르니 헤룔프손(Bjarni Herjolfsson)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985년경에 표류하다가 캐나다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001년경 바이킹 레이프 에이릭손(Leif Ericson)이 배핀섬, 래브라도, 뉴펀들랜드에 진출하여 빈란드(Vinland)라고 했다.
이들은 기후가 좋지 않아 완전히 정착하지는 못하고 임시로 거주한 것으로 추정한다.


가. 캐나다 탐험

1497년에는 영국 국왕 헨리 7세의 명을 받은 존 캐벗(John Cabot, Giovanni Caboto, 지오반니 카보토, 1450 ~ 1499, 이탈리아 출생, 영국 탐험가)이 캐나다의 노바스코샤(Nova Scotia, New Scotland, 뉴 스코틀랜드) 지역을 발견하고 영국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노바스코샤(뉴 스코틀랜드) 주는 노바스코샤 반도, 케이프브레턴 섬(Cape Breton Island, 북동쪽)과 인접한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주는 북쪽으로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 해협과 세인트로렌스만(Gulf of Saint Lawrence), 남쪽과 동쪽으로 대서양, 서쪽으로 펀디 만(Bay of Fundy), 북서쪽으로는 본토와 유일하게 육지로 연결되는 뉴브런즈윅 주(New Brunswick)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1498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 드 포르투갈( Manuel I de Portugal, 재위 1495 ~ 1521)의 명을 받은 주앙 페르난데스 라브라도르(João Fernandes Lavrador, 1453 ~ 1501, 포르투갈 탐험가)는 캐나다 동부와 북미 북동부 해안 등 북대서양 해안을 탐험하였으며, 1501년과 1502년에는 가스파르 코르테 레알(Gaspar Corte Real,1450 ~ 1501, 포르투갈 항해사)과 미구엘 코르테 레알(Miguel Corte Real1448 ~ 1511, 포르투갈 항해사) 형제가 뉴펀들랜드(Newfoundland, Terra Nova)와 라브라도(Labrador)를 탐험하고 포르투갈 제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1506년에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 드 포르투갈( Manuel I de Portugal, 재위 1495 ~ 1521)는 뉴펀들랜드 해역의 고래, 대구 어업에 세금을 부과했으며 1521년경 주앙 알바르스 파군지스(João Álvares Fagundes, 1460 ~ 1522, 포르투갈 탐험가)와 페로 드 바르셀로스(Pêro de Barcelos, ? ~ 1508, 포르투갈 탐험가)는 뉴펀들랜드와 노바스코샤에 어업 전초기지를 세웠으나 포르투갈은 남미 지역 개척에 집중했으므로 후에 이들 지역은 버려졌다.
1534년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 1491 ~ 1557, 프랑스인)가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재위 1515 ~ 1547)의 중국을 찾으라는 명령에 1534년 대서양을 건너 현재의 뉴펀들랜드 및 캐나다 동부 연안을 조사하고 세인트로렌스 만 지역을 탐험하여 ‘Long Live the King of France’라고 적힌 십자가를 설치하고 프랑스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 가는 지역을 프랑스가 차지(영유, 領有, 영토, 캐나다 식민지)하게 되었다.
캐나다라는 용어는 1535년 자크 카르티에의 두 번째 항해에서 세인트로렌스 강 주변에 거주하던 원주민인 이로코이족(族)이 대답한 말인 카나타(Kanata : 부락이라는 뜻)가 어원(語源)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자크 카르티에를 캐나다 발견자로 인정하고 있다.
영국의 험프리 길버트(Humphrey Gilbert, 1539 ~ 1583, 탐험가, 국회의원, 군인, Walter Raleigh 의 아버지 다른 異父 형)은 1583년 뉴펀들랜드를 탐험하고 세인트존스에 도착하여 이지역을 영국령이라 주장했다.

나. 캐나다 개척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는 달리 별도로 15 ~ 16세기에 바스크 족(Basque, 서유럽 민족, 스페인, 프랑스 등)의 고래잡이 어부들이 그랜드 뱅크에서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북극고래와 흰고래를 잡아 고래기름과 옷을 만들기 위한 고래수염 판을 얻었다.
16세기 중반에는 래브라도(Labrador)와 뉴파운드랜드(뉴펀들랜드, Newfoundland)에 아홉 곳 이상의 전초기지가 세워졌으며 잉글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등 여러국가의 어부들이 북미에 일시적으로 정착하여 고래잡이를 하였다는 것이다.
가장 큰 정착촌은 레드 베이(Red Bay, Red Bay Basque Whaling Station, 뉴펀들랜드 앤 래브라도 주) 기지로 900명 정도가 살았다. 이들 고래잡이에는 매년 여름 약 2,000명 정도가 고용되었다.

1) 프랑스의 퀘벡지역 개척

프랑스는 1534년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 1491 ~ 1557, 프랑스인)가 캐나다를 발견한 후 정착을 시도했으나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 후 프랑스는 내전과 30년 종교전쟁으로 캐나다 개척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프랑스 앙리 3세(Henri III, 재위 1574 ~ 1589)의 피살로 왕위를 이어받은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 ~ 1610)는 1590년 파리에서 가톨릭의 신성동맹군에게 포위당해 고난을 겪었으나 벼텨 벗어났으며 구교도의 신교도 학살로 일어난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 1562 ∼ 98년)을 종식시키고 1598년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화평과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는 ‘낭트 칙령’을 반포하고 프랑스를 재건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러시아가 시베리아산 모피(毛皮, fur)를 고가에 수출하는 것을 보고 1580년경 모피를 수집하기 위해 캐나다로 진출하였다.
프랑스에 이어 1614년 네덜란드가 무피무역(Fur trade)에 참여하였고 1668년에는 미국도 참여했다.
대량의 모피가 유럽으로 유입되자 모피값이 하락하였다.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 ~ 1610)의 명에 따라 1603년부터 피에르 뒤가(Pierre Dugua de Mons), 샤무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 ~ 1635)의 탐험대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뉴펀들랜드를 지나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1607년까지 여러 번 탐험하고는 퀘벡(Quebec, 해협, 인디언 어) 지역 쪽에 누벨 프랑스(Nouvelle France)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디언들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1608년에 샤무엘 드 샹플랭이 퀘벡(Quebec) 시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642년에 프랑스인은 몬트리올(Montreal) 시를 세웠다.
유럽인 개척자들은 식민도시들을 중심으로 점점 개척지를 넓혀 나갔고, 선교사들은 오대호와 미시시피 강유역으로 전진하여 포교를 하였으며 모피 사냥꾼들도 비버와 같은 모피를 찾아 활발히 개척을 진행하였다.
북동부 쪽에서는 비버(beaver) 등을 사냥해서 모피를 교역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영국도 비슷한 시기에 캐나다에 식민지 개척을 시작하여 1637년에 찰스 1세는 뉴펀들랜드를 데이비드 커크 경 등 귀족들의 식민지로 승인하였다.
영국이 캐나다에 뉴잉글랜드를 세우면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던 중 17세기 중반에는 북미 모피 교역로를 두고 비버 전쟁(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가담한 부족 간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663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XIV)가 뉴 프랑스(New France, 누벨 프랑스, Nouvelle France)를 식민지로 선언하였다.
뉴 프랑스(New France, 누벨 프랑스, Nouvelle France)는 1712년의 전성기(위트레흐트 조약 전) 때의 영토는 뉴펀들랜드에서 로키 산맥까지 그리고 허드슨 만에서 멕시코 만에 이르렀으며 농업과 어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2) 영국의 캐나다 개척

캐나다에 대한 영국인의 진출은 1621년 이후에 스코틀랜드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이곳에 도착하면서 프랑스와의 오랜 분쟁이 시작되었다.
캐나다에 영국인이 정착한 것은 1628년 노바스코샤(Nova Scotia, New Scotland, 뉴 스코틀랜드, 남동쪽 끝) 식민지의 설립과 동시에 본격화하였으며, 그 뒤 150년간 뉴펀들랜드, 뉴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섬, 허드슨만(灣) 지방에 많은 식민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토는 뉴 프랑스 지역으로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말경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 등 모피 생산지에서는 프랑스인보다 영국인이 10배나 많이 유입되어 프랑스인의 모피무역을 영국인이 거의 모두 차지하게 됨에 따라 분쟁이 일어나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의 조지 밴쿠버(George Vancouver, 1757 ~ 1798)는 1791년 미국 북서해안의 탐험대 대를 조직하여, 희망봉을 거쳐 북위 52°18 '의 밴쿠버섬 지역을 조사하였고 1793년에는 북위 56°44 '까지 탐험하였으며 1794년 샌프란시스코의 북 해안을 탐험하였다.

다. 영국의 캐나다 지배

영국과 프랑스는 영국왕 윌리엄 3세(William III, Willem III van Oranje 빌럼 3세 판 오라녜, 재위 1689 ~ 1702, 네덜란드 공화국 통령, 재직 1672 ~ 1702) 때 뉴프랑스와 뉴잉글랜드 및 이로쿼이 부족 연합 간 윌리엄왕 전쟁(King William's War,1689 ~ 1697)이 일어났으나 승패 없이 채 리즈윅 조약(Treaty of Ryswick,1697, 9년 전쟁 종식)을 맺고 끝났다.
영국이 1713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함으로써 위트레히트 조약(Treaties of Utrecht)에 의해 뉴펀들랜드와 노바스코샤, 허드슨 만(灣) 지역(아카디아)이 프랑스령에서 영국령이 되었다.
그 후 영국군은 7년 전쟁(1756 ~ 1763, 프렌치 인디언 전쟁) 중에 프랑스령인 퀘벡, 몬트리올을 점령하였으며 영국은 7년 전쟁의 승리로 1763년에 맺은 파리 조약(Treaties of Paris, 1763년)에 따라 프랑스로부터 전 뉴 프랑스(Nouvelle France, New France, 캐나다)를 양도받았다.
이리하여 캐나다는 완전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캐나다에는 주민이 부족하였고 기존의 주민들은 대부분 프랑스계(6만 명)였으므로 영국 정부는 이주민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제공하여 정착민들이 이주해 오도록 권장하였다.
영국 정부는 프랑스와 치른 프렌치 인디언 전쟁(7년 전쟁, 1756 ~ 1763)의 전쟁 비용을 북미 식민지 주민에게 부담시키고 수입품 관세 도입, 인지세 도입 등의 조치를 취하여 식민지 주민의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에 대한 징벌법인 불용의 법령(intolerable act, 1774)을 식민지 주민에게 적용하자, 1775년 북미의 13개 영국 식민지는 영국에 대항하여 아메리카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다.
캐나다 식민지인들은 대륙회의(大陸會議, Continental Congress, 1774)에 초청받았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이 중립파나 충절파(Loyalists)로 영국의 식민지로 남기를 희망했다.
워싱턴 장군(George Washington)은 캐나다 내 식민 주민들이 미국 편에 가담할 것으로 생각하여 혁명군이 1775년 몬트리올을 점령, 퀘벡시티까지 침공하지만, 영국군의 지원으로 퀘벡시티 점령에 실패하고 물러났다.
미국이 독립 전쟁에 승리하자 미국 독립을 반대하며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끝까지 지킨 충절파들은 미합중국 주민들의 박해를 피해 1780년대에 캐나다의 노바스코샤주(州), 온타리오주 등으로 5만 명 정도가 이주해 왔다.
영국은 캐나다가 아메리카 식민지(미국)에서 일어난 독립혁명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1774년에 제정된 퀘벡 법(영토확장, 가톨릭 보장, 프랑스인 등용)을 실천하여 주민들이 독립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퀘벡주의 구(舊) 프랑스령 식민지에 거주하는 지주와 교회의 특권을 옛날과 같이 그대로 인정해 주어 프랑스계 주민들이 미국 독립혁명에 영향을 받아 독립을 요구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789년 영국은 미국과 트론트 협정을 맺어 미국을 독립시켜 주는 조건으로 영국이 캐나다 관활권을 전부 갖는다는 것을 합의하였다. 그래서 미국과는 달리 캐나다는 영국의 식민지로 남았던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새로 이주한 영국계 주민과 기존의 프랑스계 주민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아 1791년 캐나다 입헌법령(The Constitutional Act of 1791)이 제정되어 뉴프랑스 지역이 오타와강을 경계로 두 식민지로 분리되었다.
세인트로렌스 강 하류 쪽의 퀘벡 지역은 로어 캐나다(province du Bas-Canada, 지금의 퀘벡주)로 프랑스인들의 자치를 인정하고 세인트로렌스 강 상류 쪽의 퀘벡 지역(오대호 북쪽)은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이 올라와 정착하였으므로 어퍼 캐나다(Province of Upper Canada, 지금의 온타리오주)로 분리되어 자치권이 인정되었다.
캐나다 식민지인들은 이 법에 의해 자치 의회 구성권을 얻었지만, 영국 정부가 총독과 총독이 임명하는 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함으로써, 식민지 통치 구조는 총독-위원회-자치의회의 구조로 이루어졌다.
미국 독립을 반대하고 영국 쪽에 가담했던 미국인들이 독립한 미국에서는 박해를 받아 살 수 없어 캐나다의 노바스코샤주(州), 온타리오주 등으로 이주함에 따라 프랑스인이 대부분이던 캐나다에 미국과 영국계 주민이 프랑스계 주민만큼 많아진 것이다.
1812년 미국이 어퍼 캐나다를 차지하기를 원하던 차에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1803 ~ 1815)에서 영국이 프랑스와 친한 미국이 나폴레옹 1세 쪽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하고 부족한 선원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미국 상선을 나포하고 상선의 선원을 영국 병사로 차출하자 미국이 캐나다에 주둔한 영국군을 공격하여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캐나다와 영국군이 워싱턴까지 공격하여 함락시키기도 하였으나 전쟁은 미국의 끈질긴 반격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기존의 국경을 유지하기로 하는 갠트 조약(Treaty of Ghent, 1815,  헨트 조약, 벨기에)을 맺고 전쟁을 종료했다.
캐나다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영국군보다 자신들의 군대가 주로 싸워 승리하였으므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818년에는 노스다코타 주 대부분, 사우스다코타 주 일부, 미네소타 주 북서부를 미국에 매각하여 국경선을 북위 49도선으로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1837년에는 그동안 불만이 많았던 프랑스계가 주축인 로어 캐나다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으며 그 후 같은 해에 미국에서 자치를 경험하고 이주했던 주민도 불만이 많아 어퍼 캐나다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1840년 영국의회에서 연합법(Act of Union)이 통과되어 1841년 양 식민지의 입법의회가 통합되고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가 합쳐져 캐나다가 되었다.
이후 아일랜드계를 비롯한 여러 나라로부터 수많은 이민자가 들어와 캐나다는 다양한 민족의 국가가 되었다.
1846년(미국과 멕시코 간에 전쟁 중) 영국과 미국은 1819년 조약에 의해 공동으로 점유하고 있던 오리건(아이다호에서 알래스카 국경까지)에 대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함에 따라 오리건 국경 분쟁이 발생하였으며 미국과 오리건 조약(Oregon Treaty, Treaty of Washington, 1846)을 맺어 이를 해결했다.
오리건 조약은 북미에서 미국과 영국의 경계를 북위 49도선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1848년 노바스코샤(뉴 스코틀랜드)는 최초의 자치정부를 세웠으며 이어서 모든 곳에 자치정부가 세워졌다.

라. 러시아의 알래스카(Alaska) 남부 이동과 미국과 국경 분쟁

러시아는 알래스카(Alaska)에서 태평양 해안을 따라 더 멀리 남부로 내려와 모피 무역을 원하였다.
1812년 러시아 전권을 가진 알래스카의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쿠스코프가 스페인령인 북부 캘리포니아 해안에 식량구입과 모피 수집 및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로스 요새(Fort Ros, 모피가 고갈되어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멕시코인에게 매각하고 1841년에 철수)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1825년 영국은 러시아와 알래스카(Alaska)의 국경조약을 맺어 확정했다.
모피를 찾아 러시아인들은 캐나다쪽으로 내려오면서 개척하고 영국 식민지의 캐나다인들은 알래스카쪽으로 올라가면서 개척함에 따라 결국 이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러시아는 1825년 영국-러시아 협정(The Anglo-Russian Treaty of 1825, Treaty of Saint Petersburg)을 맺었으는데 사용한 지도가 불완전하고 경계선 정의('해안선에 위치한 산의 정상부를 따른다' 등)도 명확하지 않았으나 그 때는 별 쓸모없는 땅이라 문제가 되지 않았다.
캐나다와 알래스카의 국경은 남쪽 해안에서 10 리그(48km) 떨어진 안쪽부터 서경 141도를 경계로 내륙을 구분하고 남쪽 해안 쪽은 서경 141도와 북위 56도가 만나는 지점까지 남쪽으로 해안에서 10 리그(48km) 떨어지고 해안선에 평행한다는 것으로 남쪽으로 약 800km 길게 내려와 있다.
1825년 러시아와 맺은 이 조약에는 남쪽 해안 쪽은 서경 141도와 북위 56도가 만나는 지점까지 해안에서 10 리그(48km) 떨어지고 해안선에 평행한다는 것으로 모호하였다.
1867년 미국이 알래스카를 매입한 후인 1871년부터 캐나다는 미국과 국경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특히 1896년에 캐나다의 클론다이크(Klondike)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일어남에 따라 이 지역 해안에 있는 클론다이크 강(Klondike River)이 금광에 진입하는 수로로 유용하게 되었다.
서경 141도와 북위 56도가 만나는 지점까지 남쪽으로 해안에서 10 리그(48km) 떨어지고 해안선에 평행한다는 것에서 미국은 해안선에서 10 리그(48km) 떨어진 곳을 경계선이라 주장하였고 캐나다는 섬으로부터 10 리그(48km) 떨어진 곳을 경계선이라 주장하여 서로 대립하다가 국제재판소에 제소하여 미국 측 주장 데로 결론이 났던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1903년에 새로 국경 협약을 맺었다.

나. 1867년 캐나다 연방 자치정부 인정

캐나다와 미국은 1812년 전쟁 후 관계가 좋아져 관세 철폐 등으로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져 두 나라는 동반하여 산업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캐나다보다 산업이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으므로 캐나다의 부러움을 샀으며 영국은 미국의 캐나다 침략이나 캐나다의 폭동을 걱정해야 했다.
그리고 캐나다는 미국이나 서인도제도와는 달리 사탕수수, 목화 플랜테이션과 같이 노예를 대규모로 고용하는 곳이 별로 없어 노예들이 세력을 키워 항거할 집단이 없었으며 영국에서 1797년에 노예무역 폐지령, 1833년에 노에 해방령이 공포되어 시행되었으므로 노예제에 대한 문제가 발생되지 않았다.
미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한 영국과 캐나다 자치주들은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 후 복구과정에서 발달된 산업과 강해진 군사력에 더욱 위협을 느껴 영국은 1866년 런던회의와 1867년 3월 빅토리아 여왕이 영령 북미조례(British North America Act)에 서명함으로써 1867년 7월 1일 캐나다 자치연방(Dominion of Canada Confederation)이 탄생되었다.
영국은 여러 자치주들이 모여 캐나다 연방을 결성하도록 하였으며 영국은 결성된 캐나다 연방에 자치령을 인정하였다.
외국과의 조약체결권과 군사권은 영국이 행사하였으며, 캐나다는 영국이 외국과 체결한 조약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처음에는 퀘벡주(Province of Quebec), 온타리오주, 노바스코샤주(Province of Ontario), 뉴브런즈윅주(Province of New Brunswick) 4개 주로 구성되었으나 그 후 매니토바주(Province of Manitoba, 1870), 브리티시컬럼비아주(Province of British Columbia, 1871), 프린스 에드워드 섬(Province of Prince Edward Island, 1873), 앨버타주(Province of Alberta, 1905), 서스캐처원(Province of Saskatchewan, 1905), 뉴펀들랜드주(Province of Newfoundland, 1949)가 합쳐져 현재는 10개 주와 유콘(Yukon), 노스웨스트(Northwest), 누나부트(Nunavut) 3개 준주(準州, territory)로 구성되어 있다(州 주, state 미국, country, Province).
1896년 유콘준주의 클론다이크(Klondike)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금광이 발견되었다. 금광에 엄청난 인구가 몰려들었다.
그런데 금광으로 가는 통로인 클론다이크 강의 하류가 분쟁 중인 알래스카령이었으므로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알래스카 국경 문제가 발생했다.
국경문제를 국제 재판소에 제기했으나 재판관 6명 중에서 미국인 3명 캐나다인 3명 중 1명이 영국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영국인이 미국 주장에 동조하여 거의 미국이 주장하는 국경선으로 1898년 확정되었다.
이는 외교권이 없는 캐나다에게는 큰 손실이었고, 캐나다는 이를 계기로 자체 외교력이 필요함을 절감하여 1909년 자치령 독자 외무부를 설립하였으며 점차 영국으로부터 외교권을 가져와 1926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1926)이 발표됨으로써 마침내 캐나다가 독자적으로 외교권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1926년에는 완전히 자치정부를 인정받았다. 이렇게 캐나다는 독립전쟁을 치르지 않고 쉽게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던 것이다.
1931년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국이 되었으며, 1951년에는 정식 국명을 캐나다 자치령에서 캐나다로 변경하였다.
1965년에 국기와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하였다.
1982년에 캐나다 헌법을 선포하고 영국과의 형식상의 법적 종속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였으며 단지 명목상 영연방의 일원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