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창서당(社倉書堂)
1. 조선의 교육기관과 과거
가. 교육기관
옛날에 어린아이들이 학문을 처음 시작하는 곳이 사설 교육기관인 서당(書堂)이다. 우리나라의 옛 사설 교육기관으로는 고구려의 경당(扃堂), 고려의 경관(經館)과 서사(書社)라는 교육기관이 있었지만 초등교육기관은 아니었다. 이때에 어린 학동의 초등교육은 아마 가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과거 시험과 성리학이 도입된 고려시대 말이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초등교육기관인 글방, 서당(書堂)이 생겨났다고 하며 16세기부터 서당 수가 많아졌다. 서당 학도의 수학 연령은 7~16세 정도이나 나이 제한이 없었으며 양반(兩班)의 자제뿐만 아니라 상민(常民)의 자제도 같이 수학했다.
서당은 학식이 있는 사람을 훈장(訓長)으로 모시고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훈장이 출타 중이거나 어린 학동은 학도 중에서 가장 선임인 접장(接長)이 훈장을 대신하여 가르쳤다.
서당 운영은 서당 답(서당에 소속된 논)이나 학도들의 부모가 내는 곡식으로 서당을 운영하였으며 훈장도 이 곡식으로 생활하였다.
속대전(續大典, 영조 때인 1746년 김재로 등이 편찬)에 성균관 400 결(結, 1 결은 약 3,000평), 주(州), 부(府)의 향교 7 결, 군, 현의 향교 5 결, 사액서원 3 결(실제에는 면세만 주어짐)의 학전(學田)이 법제화되어 있었으나 서당에는 학전(學田)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우리나라 관학(官學)으로는 고등교육기관인 향교( 鄕校)와 대학교에 해당하는 성균관(成均館)이 있었지만 초등교육기관은 없었다.
서당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학도들 중에서 뛰어난 학도는 큰 고을에 있는 향교나 서원에 들어가 학문을 계속할 수 있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관학인 향교(16세 이상의 양반 자제나 향리)와 사설인 서원은 중고등교육을 담당하는 곳으로 학문을 연구하였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에 설치되었으며 수용 학생수는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에 각 90명, 도호부에 70명, 군(郡)에 50명, 현(縣)에 30명이었다. 그리고 부, 목, 대도호부에 설치된 향교에는 종 6품의 교수관(敎授官, 교수)이 1인씩 파견되고 군현에 설치된 향교에는 정 9품의 훈도관(訓導官, 훈도)이 1인씩 파견되어 가르치고 재정은 학전(學田)에 의해 유지되었다.
향교의 관직은 한직(寒職)이라 군현의 향교에 훈도(訓導)의 파견이 여의치 않아 때로는 교도(敎導, 생원, 진사), 학장(學長, 지방 지식인, 녹봉 없음)으로 대리하였다.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경상도 순흥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그 시초이다.
서원은 학문연구와 선현 제향(先賢祭享)을 목적으로 세워진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을 운영하는 자치 기구였다.
서원은 정신적인 지주이면서 유림의 사표인 원장(院長)을 모시고 강장(講長), 훈장(訓長)이 강의하고 유생의 장인 장의(掌議)가 있어 훈장 대신 유생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서원의 원생 정원은 처음에는 규제가 없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정해졌는데 사액서원 20인, 문묘종사 유현 서원(文廟從祀儒賢書院) 30인, 미사액 서원에 15인이었다.
중앙의 당파는 지방의 서원과 연결하여 당파의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고 향촌 사림은 서원을 통하여 중앙관료와 연결하여 의사 전달과 입신출세의 발판으로 삼았으며 또 향촌 사림은 그 당파의 세력을 배경으로 향촌을 장악하고 지방관과 연결하여 향촌을 운영하였다.
그 결과 서원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여 명종 때에 17개였던 서원수가 선조 때에 100여 개, 18세기 중반에는 700여 개로 늘어났다.
성균관(成均館)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이었다. 이곳에서는 서울의 사학(四學, 국립 고등교육기관)과 지방의 향교(관립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하면서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된 선비들이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다.
유생수는 많았을 때는 최대 200명이었고 후대에 재정이 빈약하여 유생수가 적었을 때는 최소 70여 명이었으며 보통 100명 정도였다.
실제 유생의 구성을 보면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입학한 상재생(上齋生)과 소정의 선발 시험이나 음서(蔭敍, 관리의 특별 추천이나, 조부와 부의 관직생활이나 공훈에 의거 특별 채용)로 입학한 하재생(下齋生)이 있었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 생활을 하였으며 대과 초시(大科 初試)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업기간을 이수해야 가능했다.
대과(大科)에 합격하면 이는 졸업을 하지만 대과에 합격하지 못한 유생이 몇 년 동안 수학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와 같았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유학 유생은 9년, 율학 유생은 6년으로 하는 수업 연한이 있었다.
나. 과거제도(科擧制度)
조선시대 과거(科擧)에는 소과(小科), 문과(文科, 대과, 大科), 무과(武科), 잡과(雜科)의 네 종류가 있었으며 실시 시기는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정기 시(定期試)인 식년시(式年試)와 수시로 열리는 부정기 시(不定期試)인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 정시(庭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었다.
처음에는 소과에 합격한 사람이 문과(대과, 大科)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소과와 문과(대과)는 별개의 시험이 되었다. 소과(小科) 합격에 관계없이 대과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소과(小科)는 감시(監試),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하며 생원(生員)을 선발하는 생원시(生員試, 승보 시, 升補試)와 진사(進士)를 선발하는 진사시(進士試, 제술과, 製述科)가 있다.
생원시(生員試)는 유교 경전에 관한 오경의(五經義, 禮記 春秋 詩 書 易에 관한 문제)와 사서의(四書疑, 大學 論語 孟子 中庸에 관한 문제)를 시험하였으며 진사시(進士試)는 부(賦)와 시(詩)를 시험하였다.
소과(小科)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가 있으며 각 도(각 도마다 초시 합격수가 정해져 있었음)에서 초시에 합격한 1400명(생원시 700명, 진사시 700명)이 서울에 모여 복시(覆試)를 치렀다. 복시에서 생원시에 합격하면 생원이 되고 진사시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는데 생원 100명, 진사 100명을 선발하였던 것이다.
소과(小科)의 복시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게 되며 종 9품으로 등용될 수도 있었다.
문과(대과)는 소과(초시와 복시)에 합격한 후에 문과(초시, 복시, 전시)에 응시하여 문과(대과)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합격하거나 성균관에 입학하여 문과의 초시와 복시에 합격하면 왕 앞에서 전시(殿試)를 치러 문과(대과) 복시 합격자의 등위를 정하게 된다.
이렇게 문과(대과)에 합격하려면 소과 2번, 대과의 3번의 시험을 거쳐야 하지만 소과는 대과의 자격시험이 아니므로 소과를 치르지 않고도, 성균관을 거치지 않고도 문과(대과)에 응시할 수 있어 문과(대과)의 3번 시험(초시, 복시, 전시)에 합격하면 문과(대과) 급제자가 되었다(합격자 80%).
문과(文科, 대과, 大科)의 시험 과목은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과 유교이념에 바탕을 둔 문학적 재능과 논술(論述) 능력을 시험하였다.
문과(文科, 대과)의 초시(初試)는 각 지역에서 치러졌는데 각 지역의 합격자 수는 정해져 있었다. 초시의 합격자(240명)들이 서울에 모여 복시(覆試)를 치르며 복시에 합격된 33인이 왕 앞에서 전시(殿試)를 치러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인을 정하였다. 갑과 3인 중에서 1등을 장원이라 한다.
대과의 전시(殿試)에서 시험 주제는 대책(對策), 표(表), 전(箋), 잠(箴), 송(頌), 제(制), 조(詔) 중에서 1편을 시험 보게 되어있으나 대책(對策)이 가장 많이 시행되었다. 대책(對策)이란 왕이 정사(政事)나 경의(經義) 상의 문제점을 과제로 책문(策問, 대책을 질문)을 출제하면 응시자가 그 문제의 해결책인 대책(對策)을 작성하는 것이다.
대과(大科, 文科)의 장원자는 규정에 따라 종 6품 내지 정 7품의 실직(實職, 現職, 正職, 顯官, 實官, 流品官)에 등용되었다.
그리고 과거에 관품(官品)을 가지고 있는 자가 등과(登科)했을 때에는 대과(문과)인 경우에 기존의 관 품에서 장원은 4계, 갑과 3계, 을과 2계, 병과 1계를 승진시켜 주었다.
소과는 시험기회가 문과(文科, 대과) 보다 적어 소과에 합격하고 문과(文科, 대과, 大科)에 합격하면 더 당당하였다.
무과는 초시(원시, 향시) 합격자를 서울에 모아 복시를 치러 28인을 뽑고 이들을 대상으로 왕 앞에서 전시(殿試)를 치러 28인의 등위를 정하였다.
잡과 에는 역과(譯科), 의과, 음양과(陰陽科:천문학·지리학·명과학), 율과 등의 네 종류가 있고 초시를 거쳐 복시로 선발했다.
과거(科擧) 응시자격은 경국대전에 의하면 죄범영불서용자(罪犯永不敍用者, 죄를 범해 평생 동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자)의 아들, 관리로서 금전상의 부정을 범한 장리(贓吏)의 아들, 재가(再嫁) 또는 그 밖의 부도덕한 행실을 저지른 부녀자의 아들이나 손자, 그리고 서얼(庶孽)의 자손들은 문과(文科, 대과, 大科)나 소과(小科, 생원진사시)에는 응시할 수가 없다.
조선시대의 과거는 예조, 집현전, 성균관이 주관하여 시행하였다.
고려시대의 과거제도에는 제술과(製述科:進士科), 명경과(明經科), 잡과(雜科:醫卜科), 승과(僧科:敎宗試와 禪宗試)가 있었으며 무과(武科)는 1390년(공양왕 2)에 시행되었다.
과거 시험 과정은 3차에 걸쳐 시행되었는데 1차에서 선발된 자 중에서 개경에서 선발된 자를 상공(上貢), 지방에서 선발된 자를 향공(鄕貢), 외국인으로 선발된 자를 빈공(賓貢)이라고 하였다. 2차 시험은 1차에서 선발된 삼공(三貢:상공, 향공, 빈공)들을 국자감(國子監)에서 다시 선발하고(국자감시 : 재시), 2차에 합격한 자[貢士]와 국자감에서 3년 이상 수학한 학생, 벼슬에 올라 300일 이상 경과한 자들이 응시하여 3차[東堂監試]를 치렸다.
고려시대 과거제도에서 소과(小科)는 없으므로 진사시(進士試, 제술과, 製述科)에서 등과 했다는 것은 대과에 등과 했다는 의미이다.
2. 사창 서당(社倉書堂)
사창 서당은 향교나 서원같이 넓은 터와 큰 건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건물은 정면 오칸, 측면 두 칸 총 열 칸이므로 일반 서민 집보다는 넓고 크다. 공포가 없는 납도리집이고 단청으로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았으며 기둥이나 대들보도 크지 않고 천장도 높지 않아 위압감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소박하여 친근감을 준다.
그러나 일반 서민 집에서 볼 수 없는 측면 두 칸 집의 천장 구조와 맞배지붕이 특이하다.
사창 서당(社倉書堂)은 성주군 수륜면 오천 1리 사창 마을의 위뜸 북쪽 산기슭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뒤쪽은 산이고 옆은 밭이며 앞쪽에 동네가 있어 주변이 번잡하지 않고 조용하다. 서당 주위에 배롱나무(백일홍)가 붉게 피어 있다. 특히 앞쪽에는 대밭이 펼쳐져 동네와 구분되어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고 있다.
주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오천 1리 324-1번지이다.
사창 서당은 일제강점기 지사 소학교가 개교된 후 오래 동안 사용되지 않고 관리가 불실하여 황폐해졌다. 그래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가정집과는 달리 튼튼하게 지어졌으며 또 한옥도 오래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동안 사랑방이 없어 손님이 오면 불편했던 가정에서는 서당 제실을 손님용으로 이용했으며 여름에 시원하게 잠자고 싶었던 남자들은 서당에 올라가 마루를 잠자리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오래 동안 여러 사람이 이용했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서당이 가지는 엄숙함 때문인지 화재 등으로 소실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롭다.
1987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0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황폐되었던 건물을 1990년,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서당은 성주 대가면 칠봉동 유촌 출신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이 1591년(선조 24) 초가 서당을 지어 주자학을 가르치던 장소에, 200년이 지난 1796년(정조 20년)에 후학들이 곡식을 거두어 건립한 것이다.
사창(社倉)은 자연부락 명이다. 성주군 수륜면은 본디 성주군 지사면(志士面)과 청파면이 합쳐진 것이며 지사면 소재지는 오천 1리의 지심(只士山, 지사 미, 사창 윗동네)이었다. 오천 1리가 이 근방 고을들(방)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사창 동네에는 폐교된 지사초등학교(志士初等學校)가 있다. 조선 시대에 흉년이 들면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봄에 곡식을 꾸어 주었다가 가을에 돌려받는 환곡(還穀) 제도인 사창(社倉) 제도가 있었는데 아마도 지심 아랫동네에 환곡을 대여하기 위한 곡식을 보관하는 미곡 창(米穀倉)이 소재했으므로 사창이라는 동네명이 되었으며 서당명은 동네 명에서 유래했다.
서당 진입로는 동쪽에 있다. 주차장에 들어서면 서당 동편에 서당을 관리하는 고자(庫子)가 거주하던 주소(廚所)가 있고 서당 앞 정면에는 두 개의 기둥으로 세워진 일각문(一角門,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만 세워 문을 단 대문으로 문간이 없음)이 보인다.
중앙 출입문인 일각문(一角門) 앞 왼쪽(건물 중심, 동쪽)에는 돌로 쌓은 기단 위에 1797년(정조 21년)에 세워진 문목공 한강 정선생 유허비(文穆公 寒岡鄭先生 遺墟碑)가 있다. 비석(碑石)은 크지는 않지만 비신(碑身, 문장을 새기는 부분)과 이수(螭首, 용의 형체이지만 뿔이 없는 이무기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 용은 왕만 사용)와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碑身)에는 문목공 한강 정선생 유허비(文穆公 寒岡鄭先生 遺墟碑)라고 새겨져 있다. 서당 경내로 들어가는 길은 동쪽의 주소(廚所) 마당을 거쳐서 들어가거나 중앙에 있는 일각문(一角門)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마당을 가로질러 강당으로 올라간다.
서당의 모든 건물은 수수한 가정집과 같이 무 단청이다.
강당 동편에 있는 3칸 규모의 주소(廚所)는 서당을 관리하는 고자(庫子)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고자(庫子)는 서당을 관리하고 서당 일에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하며 학동들의 부모가 내는 모곡과 서당에 딸린 토지를 부쳐 먹고살았다
3. 사창 서당(社倉書堂) 강당의 구조
사창 서당(社倉書堂)은 서당 건물로는 비교적 규모가 크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기와지붕으로 건물의 앞, 뒤로만 지붕이 있고 측면에는 지붕이 없는 맞배지붕이다.
서당(書堂) 강당은 자연석을 2단(段)으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기단 위에 큰 막 돌로 된 주춧돌(덤벙 주초)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전면의 6개 기둥과 후면의 귀기둥은 둥근기둥(圓柱, 원주)을 사용하였다.
속 구조를 보면 가운데 3칸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놓아 하나로 합쳐진 넓은 마루로 되어 있고 양 가쪽 칸에는 온돌방이 있다. 이런 배치를 중당 협실형(中堂挾室形)이라 하는데 강의를 하는 강당(마루)을 가운데 두고 양 가쪽에 잠자는 방을 배치하는 것이다.
건물의 좌, 우측 끝에는 온돌방의 재실(齋室)이 있으며 좌측 재실의 상부에는 다락을 설치하여 서고(書庫)로 사용하였다. 각 재실 앞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앞 마루)가 있다.
중앙 마루의 안쪽 뒷벽 중앙에는 사창 서당(社倉書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그 왼쪽(동쪽)에는 제사창신구(題社倉新構, 한강 시, 小小生涯小小家 志存容膝更無加 半生已熟茅茨下 瓦覆新居便覺奢)가 걸려있고, 그 오른쪽(서쪽)에는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이 지은 사창 서당기(社倉書堂記)가 걸려 있다.
동서 양쪽 재실에도 현판이 걸려 있는데 동쪽인 좌측 재실에는 낙영재(樂英齋, 잠자리나 공부방), 서쪽인 우측 재실에는 경산헌(景山軒, 잠자리나 공부방)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서쪽 벽에 조그마한 편액에는 조선의 국왕과 왕비의 탄생일이 정조 대왕까지 기록되어 있다.
한옥 건축에서 원목을 정확하게 잘라 다듬는 것을 치목이라 하며 치목으로 만든 부품을 부재라 한다.
기둥, 보(기둥의 위쪽과 기둥의 위쪽을 세로로 연결), 도리(서까래를 받침), 공포, 소로, 창방(기둥의 위쪽과 기둥의 위쪽을 가로로 연결), 장여(장혀, 주심도리 지탱, 기둥의 위쪽 연결), 대공, 서까래 등의 부재(部材)를 짜 맞춘 모양 전체를 가구(架構)라 한다.
민가의 건축에서는 공포가 없고 창방과 소로도 없이 결구하는데 이것을 민도리식이라 한다. 민도리식은 보통 기둥 위의 사로 틈에 보받침, 장여, 대들보, 주심도리 등의 순서로 짜 맞추어 함께 결합하는 것이다.
사창 서당은 공포가 없는 민도리식이지만 장여 밑에 창방을 설치하고 창방 위에 소로를 얹어 장여를 받치게 하여 민가와는 다른 고급 격식을 가미했다.
사창 서당은 정면이 5칸으로 앞면에 기둥이 6개이다.
앞면의 6개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로로 창방(기둥 윗부분을 연결, 주심도리 밑에 주심도리와 같은 방향으로 놓여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여 안정되게 붙잡아 줌)이 튼튼하게 연결한다(창방이 없는 집은 주도리와 장여가 대신한다).
그리고 서까래를 받치는 주심도리가 기둥과 기둥의 위쪽을 연결하여 지붕의 하중을 받친다. 주심도리 바로 밑에는 장여(장혀, 주심도리 밑에 붙어서 주심도리와 같이 기둥과 기둥을 가로로 연결)가 붙어 있어 주심(기둥) 도리가 받는 하중을 함께 지탱하게 한다.
또 창방 위에 소로(창방과 장여사의 짧은 받침목)를 얹어 장여와 도리를 받혔다. 소로는 장식의 효과와 함께 주심도리에 작용하는 지붕 가구의 하중을 창방에 나누어 효과적으로 지탱하도록 한다.
이들 부재들이 앞면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로로 연결하는 상하 순서를 보면 창방이 가장 밑이고 그 위로 소로, 장여, 주심도리 순이다.
뒤쪽에는 창방과 소로가 없고 장여와 주심도리가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고 지붕 가구의 하중을 지탱한다.
또 측면 2칸이란 것은 옆에서 보았을 때 기둥이 3개이다. 앞면의 기둥과 뒷면의 기둥 가운데 기둥이 1개 더 있는 것이다.
여기 앞칸과 뒤칸에 있는 기둥을 위에서 세로로 연결하는 것을 대들보(대량 大樑, 기둥 위에 위치한 가장 길고 큰 보, 건물의 앞 기둥과 뒷 기둥 위에 설치)라 한다.
대들보는 둥글고 굽은 나무로 되어 있으며 기둥에 결구되어 앞뒤 기둥을 연결한다.
기둥 위 사개통에 보받침(짧은 길이로 기둥 위에 설치하여 보를 받침)을 받치고 창방, 장여를 가로로 끼워 맞춘 다음 이들과 교차하여 세로로 대들보를 끼워 맞추고 그 위에 대들보와 교차하여 주심도리를 얹어 기둥에 튼튼하게 결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 대들보 위에 두 개씩의 동자주 대공(童子柱 臺工, 대들보 위에 중량을 올리기 위한 어린 동자처럼 작은 기둥)을 세우고 같은 대들보 위의 동자주 대공 사이를 연결하는 종량(宗樑, 마룻보(종보), 건물 맨 위에 위치한 보, 대들보 위에 있는 보)을 대들보와 같은 방향인 세로로 올려놓았다. 종량에 직교하여 가로로 종량과 종량 사이에 장여를 받쳐 중도리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종량 중앙 위에 마루 대공(종도리를 받치는 짧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종도리(천장 가장 위쪽의 도리, 용마루 받침대, 상량)와 장여를 종량에 직각으로 가로질러 가로로 올려놓았다. 마루 대공의 형태는 제형판 대공(梯形板臺工, 사다리꼴 형태의 판자로 만든 짧은 기둥)이다.
주심(기둥)도리는 건물 처마 밑 앞뒷면의 기둥 위쪽과 측면의 기둥 위쪽에 놓여서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고 처마 쪽에서 서까래를 받친다. 사창 서당은 측면 지붕이 없는 맞배집이므로 측면의 서까래가 없어 측면의 주심(기둥)도리도 없다. 사창 서당의 앞뒤쪽에 있는 주심도리는 단면이 둥근 굴도리이다. 사창서당(社倉書堂)의 지붕을 보면 5개의 도리가 있는 오량가(五樑架)이다.
건물을 세로로 자른 종단면에서 지붕의 서까래를 직각으로 받치는 도리(가로대)가 3개면 삼량가, 5개면 오량가라 한다.
사창 서당의 대청마루에 올라 위쪽을 쳐다보면 서까래가 보이는데 서까래를 받치는 도리(가로대)가 용마루 밑의 종도리(천장 가장 위쪽의 도리, 용마루 받침대)와 처마 근처의 주심(기둥)도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 서까래를 받치는 중도리가 하나 더 있으며 뒤쪽 서까래도 종도리와 주심도리뿐만 아니라 중도리가 하나 더 있어 총 5개의 도리를 가진 오량가이다.
사창 서당은 측면이 두 칸으로 지붕이 넓기 때문에 넓은 지붕의 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양쪽 지붕의 중간에 중도리를 추가한 것이다.
지붕의 서까래는 종도리(천정 가장 위쪽의 도리, 용마루 받침대), 중도리(가운데의 도리), 주심도리(처마 쪽 기둥 위의 도리) 위를 가로질러 얹혀 있는 것이다.
맞배지붕의 양 측면에는 기와를 받치는 목기연이 나와 있고 그 밑에 八자 모양의 널판(나무판)인 박공이 있으며 박공널(나무판)의 끝에는 게눈을 새겼다. 박공 밑에는 삼각형의 풍판(風板, 여러 개의 널판을 세로로 붙여 마감한 것)이 설치되어 있다.
4. 한강 정구(寒岡 鄭逑)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 ~ 1620, 중종 38 ~ 광해군 13년, 성주 대가면 유촌 출생) 선생은 조선 중기 선조, 광해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의 선대는 6대조 정총(鄭摠)과 그 동생인 정탁(鄭擢) 형제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어 출사 한 이래 조선의 고관을 배출한 가문으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부사맹을 지낸 한강의 아버지 정사중이 부인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처가가 있는 경상북도 성주에 내려와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한강(寒岡)과 그의 둘째 형인 정곤수(鄭崑壽)가 다시 가문을 일으키는데, 형 정곤수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좌찬성 등을 역임한 당대의 고관이었으며 임진왜란 때 대사간으로 명나라 구원병 요청을 건의하였으며 명나라에 청병 진주사(請兵陳奏使)로 파견되어 1593년 명나라 구원병을 성사시킨 공로로 숭정대부에 오르고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사후에 명나라의 구원병을 성사시킨 공로로 임진왜란 호성 1등 공신(문인 대상 공신, 정곤수와 이항복 2명임)으로 책록 되었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은 과거를 보러 한번 한양에 올라와 과거 시험을 치르는 것을 보고는 과거시험 방식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과거 보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동향으로 성주향교에서 같이 공부한 선배 동강 김우옹(중종 35~선조 36, 성주 대가면 사도실 출생, 남명 조식의 외손서, 문과의 병과로 급제, 대사성, 대사헌, 이조참판, 예조참판) 선생이 한강의 학문이 높음을 임금님께 아룀에 따라 과거를 보지 않고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게 되는데 1580년 창녕 현감을 시작으로 1594년에 우승지, 강원도 관찰사, 임진란 때는 선조의 피난길을 호종하였으며 성천 부사, 충주 부사, 안동부사, 공조참판, 1608년(광해군 즉위년) 사헌부 대사헌을 1년간 지냈다. 광해군 즉위 초 임해군(臨海君)이 유배된 뒤, 조정에서 임해군 처리에 대한 논의가 있자, 정구는 대사헌을 사직하는 차자(箚子,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리면서 광해군이 형제간의 은의(恩義)를 온전하게 하는 쪽으로 처리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일로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에는 낙향하여 지방 학문을 융성시키고 민중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사 후 인조 때 문목(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인조 때 이조판서, 효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문장력이 뛰어나고, 경서(經書),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하였으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예학(禮學)에 특출하여 후대에 송시열과 허목의 예송 논쟁에서 남인인 허목이 주장하는 논리의 근원이 되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들은 효종이 적장자(정비의 첫째 아들)가 아니다는 것을 은연 중에 강조하면서 적장자가 아닌 효종을 무시하는 의미로 장례(葬禮)에서 왕가(王家)도 사가(士家)와 같이 사가(士家)의 예(禮)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한강의 예설은 왕가(王家)에서는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적통이므로 차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차자가 적자와 같다는 것이므로 왕가(王家)의 예(禮)와 사가(士家)의 예(禮)는 같을 수 없다(王士不同禮, 왕사부동례)라는 주장을 하였으며 허목은 이를 예(禮)에 적용해 주장하였던 것이다.
특히 한강 정구는 조선의 실학의 뿌리이다. 한강 정구의 학문은 제자인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선조 28 ~ 숙종 8, 우의정, 이원익 손서, 임제 외손)을 통해 경기도의 남인(근기 학파)으로 학문이 전파되어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실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 찾아가는 길
-성주읍에서 고령으로 가는 33번 국도를 타고 대가면, 가천면을 지나 수륜면에 접어들면 신정리에 회연서원(檜淵書院, 한강 정구 배향)이 있으며 고개를 넘어 내려오면 수륜면사무소가 있고 100m 정도 내려오면 서쪽으로 해인사로 가는 가야산 백운동 길과 고령으로 가는 남쪽 길로 갈라진다. 남쪽 고령 방면으로 4km쯤을 내려가면 오천 2리가 되고 대가천을 따라 2km 더 내려가면 계정리가 되는데 계정리 입구에서 33번 국도를 벋어나 좌측(북쪽)으로 대가천에 있는 사창 다리를 건너면 오천 1리가 보이는데 위쪽은 지심, 아래 동네가 사창이다. 자연부락 지명이 사창인 동네로 들어가면 동네의 위쪽 산기슭에 사창 서당이 보인다. 성주에서 오천리 사창까지는 16km쯤 된다.
-고령읍에서 성주, 가천 쪽으로 33번 국도를 타고 계속 8km쯤 북쪽으로 올라오면 고령군 운수면을 지나 성주군 수륜면 계정 2리가 나오고 이어서 계정 1리에서 33번 국도를 벋어나 우측(북쪽)으로 대가천에 있는 사창 다리를 건너면 오천 1리가 보이는데 위쪽은 지심, 아래 동네가 사창이다. 자연부락 지명이 사창인 동네로 들어가면 동네의 위쪽 산기슭에 사창 서당이 보인다.
서당까지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으며 주차장도 있다.